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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0 13:54
[기타] 현 사드정국은 려말상황이 아닙니다.
 글쓴이 : 문삼이
조회 : 2,206  

현 중국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정권중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것은 거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당나라(선비족),요(거란족),원(몽고),청(만주족) 중국공산당(만주족 출신이 많은 팔로군소속)등이 있죠.

여기서 당이나 요는 당시 이를 막는 정권이 확실한 원칙을 갖고 대응해 이를 물리쳤는데 신라같은 경우는 구백제,고구려세력과 힘을 합치고 고려땐 왕의 확고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요를 물리치고 송,요와 두루두루 잘 지내면서 동북지방의 힘의 균형을 이루었죠.

반면에 몽고침입시절엔 무신정권하의 문란한 정치와 학정에 이미 고려신민들은 당시 고려정권에 등을 돌렸을때입니다. 당연히 여말 원,명 교체기때도 우리의 힘은 극히 미비했어요.
왜구,홍건적 온갖 외적의 침입과 부정부패의 수렁속에서 백성들만 죽어나가던 시절이었죠.

당시 위화도 회군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후 조선을 창업하고 힘을 적당히 길렀죠.
명의 과도한 요구를 막을수 있는 수준으로 길러냅니다.(사병을 혁파하고 중앙군으로 다 모으고 토재개혁을 해서 과도한 경제 쏠림을 막고 중하층의 경제력을 상승시켜냈어요)
 
여러개혁정책으로 조선의 힘이 상승합니다.주원장이 조선 20만 병력을 두려워했을 정도로요.
이때 이방원이 명을 등에 업고 정권을 차지하면서 조선은 그이후 명 사대 국가로 영원히 빠져나갈수 없는 수렁속에 갇히고 마는 거죠.

역사를 살펴봐도 당시 정권이 무리없는 국정운영속에서 리더쉽을 발휘해 명징한 원칙을 세우고 여러 사람을 불러모아 대응했을땐 아무리 강한 강대국의 침입도 거뜬히 물리쳤지만
원칙없는 대응에 국민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자신들만 잘난척하는 독선적 국정운영에 민심이 이반하면 싸우나 마나 필패였습니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선 자 힘을 모아서 적을 깨부수자라는 선동보다는 국민의 어려움을 살피면서 원칙을 명확히 세워 대응방식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조선말 살기 어려운 대중들이 당시 개화파니 척화파니 당시 고위층들의 이념논리에 놀아나던가요?
동학을 일으켰을뿐입니다.

이런시기에 자신들의 사리사욕과 정권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먼저 국민들을 보듬고 명확한 원칙을 세워서 국민들에게 제시해야할 윗대가리들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자꾸 대중을 개돼지 취급해대면 누가 이나랄 위해 나서겠나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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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설계 16-07-11 00:33
   
1388년 음력 3월 명나라가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개 소에 참을 두고,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왕득명을 고려에 보내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고하여 철령위 설치를 시작하자,

그 대응은 님이 말한 방원이의 사병 혁파후 중앙군 양성, 토재개혁을 통한 중하층의 경제력 상승,
조선군 20만(?) 대군이 아니라,
 
바로 다음달 1388년 4월 고려의 요동출병이었습니다.
이후 철령위 얘기 조용히 없어집니다.

몽골 따라하려다 고려와 전쟁 없이는 없을 수 없는 땅이라는 '인식'
그게 강대국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개혁정책으로 조선의 힘이 상승합니다.주원장이 조선 20만 병력을 두려워했을 정도로요.
     
문삼이 16-07-11 01:19
   
뭔소리예요?
고려의 요동출병으로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포기했다는 말인가요?

고려가 왜 철령위설치에 격분해  요동으로 출병했겠어요?
철령위 설치지역이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철령위가 원산이라고 주장되어졌지만 실제 명역사지리지에는 철령위는 한반도 밖에 있었고요 명나라는 자신들 주장을 한번도 굽힌적이 없어요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신진사대부는 나라를 혁신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나라에 대항할수 없음을 직시하고 먼저 고려를 개혁하고자 한거죠.
당연히 대국을 칠수없다는 명분으로 위화도회군을 하고 새왕조를 개창했지만 여전히 정도전등은 과거 고려땅이라고 여겨지는 철령위지역을 회복하고자 여려개혁정책을 펼치고 국방을 강화시켰어요.

당연히 이런 움직임은 명나라에 잘 알려져있었지만 북원과의 전쟁에 온힘을 기울여야 했기에 주원장은 꼬장만 부렸죠.
정도전을 명에 보내라고요. 당연히 이성계는 이를 거부하고 이방원을 보내고 이방원은 명나라에 가서 주원장과 쿵짝쿵짝 ~~~
명을 등에 업고 정권획득한후 사대의 길로 간거죠.

님 왜 우리가 요동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여겼는지 아세요?
고려의 몽고침입시기에 수많은 고려인들이 몽고에 끌려가 요동지역에 정착했어요.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사이에 태어난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옹립하는데 큰공을 세우고 만주땅을 받게 된겁니다.
당시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게 그 원인이기도 했죠.

충선왕은 만주지역(요동지역이 중심)을 차지한 심양왕과 고려왕을 동시에 겸하지만 둘다를 한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심양왕은 조카에게 고려왕은 자식에게 물려주게 됨으로 비극의 씨앗이 생긴거죠.
역대 심양왕들은 원을 배경삼아 고려를 압박하고 고려왕까지 차지하려고 했고 고려왕들도 심양왕이 다스리던 지역을 자신들의 구역이라 생각했고요 당연히 여기에 고려인도 많이 살고 있었으니까요.

공민왕때 원에서 난을 진압하는데 고려의 원군을 요청하죠. 당시에는 반원정책 전이어서 장수들을 급파해 요동지역에서 고려인들을 모병해서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여기에 최영장군이 있었죠.
당연히 고려를 이은 조선초기에는 이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심각히 고려했지만 이방원이 포기한거예요.

나중에 여진족들이 자신들은 심양왕의 후손들이라면서 조선을 자주 침입합니다.
          
전략설계 16-07-11 02:17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1388년 음력 3월 실제로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개 소에 참 설치를 시작하고
고려에 사신에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한 명이
이후 철령위에 입도 뻥긋 안 한 이유가  뭐냐고요?

이방원의 사병철폐인가요?

고려군 요동출병 이후 명은 더 이상 철령위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금 시국이 중국에 발발 기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미리부터 발발 긴다고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걸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란 얘기입니다.
               
문삼이 16-07-11 06:35
   
뭔 다른말을 한다는거예요.
명나라가 설치한 철령위가 한반도 밖에 있는 심양왕이 다스리던 지역이라니까요.
제가 위에 적었잖아요.
명나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힌적이 없다고요.
자신들이 설정한 지역을 당시 고려가 잘 따르는데 뭔말이 필요하나요.

님과같이 생각하는 이유가 일제식민학자들이 우리 국토를 최대한대로 좁히기 위해서 갖은 수작을 다했기 때문이예요.
철령위가 한반도 원산이 아니라 한반도 밖에 있었어요.
일제식민학자들의 주장을 그 제자들이 충실히 받들어 모셔 국사책에 자랑스럽게 철령위를 한반도에 표시해 놓으니 님과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수 밖에요.

명나라 역사지리지에 철령위 위치가 다나와요.
명나라 역사서에 철령위설치후 그에 대해서 설치 철회를 한적이 없어요.

일제 식민학자들이 고려시대 동북구성도 똑같은 짓거리를 했죠.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면 좀 명확한 사실을 가지고 하세요.
그래야 설득력이 있으니

당시 려말 정도전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했죠. 이대로 현 고려의 체제로는 명나라의 쳘령위 요구에 아무것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이성계와 새왕조를 건국하며 기존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 여러개혁정책을 펼친거죠.

님이 굳이 이런 맞지도 않는 역사사실로 현재를 호도하고 싶다면 저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네요.
지금 중국요구 미국요구를 따지기전에 국민무서운줄알고 정책 똑바로하라고요.
국민을 개돼지취급해 대는 공무원이 튀어나오고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는 쓰레기들이 고위직이라고 설치면 남아있던 애국심 다 사라진다고요.

정부가 국민을 보듬아 안고 생활을 최대한 보살피며 부정부패에 대해서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등 모범을 보인다면 그정책이 무엇이든지 국민은 그걸 믿고 잘 따라갈겁니다.
                    
전략설계 16-07-12 03:38
   
철령위 위치는 내가 얘기한 적이 없는데,
계속 다른 얘기를 하시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C%B2%A0%EB%A0%B9%EC%9C%84
위키가 복교수 주장까지 '철령위'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네요.

1387년 12월 - 명은 과거 원나라에 속했던 영토는 모두 명에 귀속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와 함께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1388년 -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보낸 이사경(李思敬) 등이 압록강을 건너와 “호부(戶部)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이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므로 이곳에 속해있던 군민으로 한인, 여진인, 달달인(타타르인), 고려인은 종전대로 요동에 속하게 한다.”고 통보하였다.

수시중(守侍中) 최영은 재상 회의에서 철령 북쪽의 땅을 명에 줄 수는 없다고 결론이 내려진 가운데 고려는 정당문학 곽추(郭樞)와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명에 보내 철령 북쪽은 고려의 영역이므로 결정을 철회할 것을 청했다.

1388년 3월 -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두 사람을 보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 압록강의 경계)에 철령위를 두고 요동에서부터 철령까지 10리 간격으로 70여 곳의 역참을 설치, 역마다 1백 호씩 주둔하려 한다'는 보고하였고, 이어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의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고하였다. 최영은 노하여 명의 방문(榜文)을 가지고 고려의 양계(兩界)에 온 명군 병사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은 현지에 잡아둘 것을 명했다.

1388년 4월 1일 - 봉주(鳳州)에 온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양(遼陽) 공격을 명하였다.

1388년 6월 - 명에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은 6월에 명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고, 이후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3월에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개소 참을 설치하던 명이,
6월에 설치를 중지합니다.

1388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뭣이 중헌디" 고려에 통보하고 설치하던 명이 달라지게 됏습니까?

그 해 3월과 6월 사이에,
이방원이 사병철폐가 있었습니까?
조선 대군 20만이 있었습니까?

이 얘기 하는겁니다. 논점 외에 철령위 위치같은 다른 얘기할 필요가 없지요.

명의 겁박에 굴하지 않은 <고려의 요동 출병>이 명의 철령위 설치를 바꾸게 한 것입니다.
그걸 역사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문삼이 16-07-12 10:48
   
왜 자꾸 철령위 위치에 대해서 얘기하냐면 철령위가 한반도 내에 있다면 당연히 명나라가 고려,조선을 위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굽혔다는 결론이 이르게 되고요
철령위가 압록강 밖에 있었다면 명나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힌적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돼서요.

님의 주장은 명나라가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고려가 이에 발끈해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놀란 명이 기존 주장을 물렸다는거 아닙니까?
얘 뭐 알겠습니다. 이것도 추측이겠죠

당연히 명도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들었죠.
명 역사서에 고려,야인들이 반발해서 압록강 근처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가 뒷쪽으로 물렸다는 기록이 나오는거 보니까
북원과의 전쟁에 바쁜 명에게는 고려,야인들은 고려할 대상이었겠죠.
철령위 위치에 대해서 말 안하겠습니다.


그런데 님은 자꾸 요동출병만 고려하지 명나라같은 대국을 칠수 없다는 명분으로 회군해버린것에 대해선 의미부여를 하지않잖아요.
님의 논리대로 설명하려면 요동출병을 해서 실제로 요동을 공격했어야 해요.
그래서 명의 후퇴를 이끌어냈다고 해야 되는데 출병하고 회군해 버린걸 명의 겁박에 굴복하지 않다고 말하니 이상하잖아요.
굴복한걸 굴복하지 않다고 설명하니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요?


우리가 준비가 되어있지않을때 허세(요동출병)를 부리지 말고(위화도회군) 집단속을 철저히해(조선개창과 개혁) 개혁에 몰두해 외부세력의 위협에 대해 어떠한 흔들림없는 대응을 하자는 겁니다.

근데 님은 자꾸 허세부리는것에만 집중을 하니 답답한거죠.
왜 내가 허세라고 하냐면 당시 요동출병때의 고려군사가 2만 5천인가...가물가물 하네요. 그정도였는데 그게 고려 남부지방을 왜에게서 방어할 정예인력등을 죄다 뽑아간 고려군세의 대부분이라서요.

웃기죠 한나라의 군세가 그정도까지 줄었어요. 이성계가 회군해 개성에 왔는데 대응할 군사가 없다니...웃기는 사실이죠.


제결론은 간단해요 허세부리지 말고 실력좀 키우라는 겁니다.
                         
전략설계 16-07-13 00:32
   
1388년 6월 - 명에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은 6월에 명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고, 이후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철령위가 요동이고 한반도고 간에.. 댁 혼자 하는 소리고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설치하던걸 중지했다니까..
설치를 하던 1388년 3월과 중지한 6월 사이에 뭐가 있었냐고 물어보자나요.

명의 철령위 설치 --> 중지,
고려의 요동출병 때문입니다.

지금도 첫 댓글처럼 이방원의 사병철폐, 조선 20만대군으로 생각한다면 패스하겠습니다.
그게 1388년에 있었던 일인가요?
                         
문삼이 16-07-13 01:24
   
그러니까 님이 답답하다는 겁니다.
요동출병해서 위화도회군한게 명의 겁박에 굴하지 않는 행동으로 본다는게 이상한 논리라니까요.
위화도회군하면서 대국을 칠수없다고 명분을 세웠는데 이게 명의 겁박에 굴하지 않는 행동인가요?

내글에 썼잖아요 명사에 처음 압록강 근처에 철령위를 설치했으나 고려,야인들이 반발해 뒤로 물렸나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그뒤 고려나 조선이 철령위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어요.
한반도 내에 철령위가 있다면 님말대로 철령위를 명에게서 수복한거지만 그런 내용은 명사에 없어요.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요동출병,위화도회군,고려국내상황등 전체적으로 보고 설명해야지 딸랑 요동출병만으로 님글의 논리를 유지하려고 하니 문제라고 보는겁니다.
                    
전략설계 16-07-12 03:48
   
철령위 위치 얘기를 언급하셔서 부연하자면..

당시대의 고려인들은 철령 북쪽의 땅을 고려의 영역이라고 명에 철회하라 요청합니다.
심양왕 땅이란 생각은 본인 생각 같고요. 당시를 살던 고려인들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식민사관 얘기하시는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고려사》 및 《명사(明史)》에 기록된 철령은 당시 조선의 정평(定平)ㆍ영평(永平) 등 지방의 위에 있는 고개로, 명에서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은 본래대로 개원에 속하게 한다”고 한 기록에서 철령 동쪽은 영동(강원도), 서쪽은 절령(岊嶺) 이북인 평안도 지역으로 지목하였다. 명의 목적은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모두 명의 판도에 포함시키려 한 것으로서, 명에 사신으로 간 박의중이 고려를 위해 훌륭하게 변론한 덕분에 그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영조때 이익도 식민사관이네요.
                         
문삼이 16-07-12 10:25
   
http://blog.naver.com/ybm0913/40117556003

잘 정리된 블로그라서 올립니다
중간에 보시면 공민왕이 기새인티무르가 나오고 요심지방이 나오죠.여기가 심양왕의 봉작지예요.

그리고 위키긁어 오셨는가 보군요. 뭐 식민사관들이 아무이유없이 철령위가 원산이라고 주장한건 아니겠죠.
근데 명사서에 철령위에 대해서 다르게 설명되어 있어서요.
                         
전략설계 16-07-13 00:28
   
영조때 이익도 식민사관이냐고 물어봤습니다.
답변이 없으시네.
                         
문삼이 16-07-13 01:45
   
아닌데요.
그럼 님은 영조때 이익의 글을 보고 글을 쓰셨나요?
아니죠 님은 아예 철령위 위치 자체에 관심이 없었죠.
단지 요동출병했다는 사실과 철령위를 명에서 설치중단했다는 단편적 역사사실을 이어서 님의 논리를 만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제가 님의 그런 논리는 당시 역사 상황과 맞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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