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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ㆍ랴오양현)이다."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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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에는 낙랑이 중국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20여개의 각기 다른 자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 사고전서에는 북경 북쪽의 조선하(朝鮮河), 시라무렌강 유역의 조선국(朝鮮國),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조선성(朝鮮城) 등 요서조선에 대한 기록이 넘쳐 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전한서(前漢書)>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낙랑·현도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태강지리지>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두 사료에 나오는 수성현·갈석산의 위치를 찾던 그는 <사고전서>의 관련 사료들을 훑어본 결과, 현재의 하북성 남쪽에 낙랑군의 수성현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에 진(晋)나라 때 설치했던 평주(平州) 지역을 설명하면서 <후위(後魏)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후위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으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 정권을 가리킵니다. 《통전》의 <평주> 조항에는 <평주 소재지는 노룡현에 있다. 오늘날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는데 백이 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진(秦)나라 때는 우북평과 요서군 지역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태평환우기》에 <고조선의 조선성이 있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다행히 수ㆍ당시대의 노룡현은 현재 중국 지도에 아직도 그 지명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북위시대, 진(晋)나라시대의 평주, 진한시대의 요서군, 은나라시대에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었던 그 지역이 바로 요서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입니다. 남송시대 학자 왕응린의 《통감지리통석》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노룡현 부근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이 요서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은 평주(平州) 산하다. 평주는 다섯 개 군(郡)을 관할하는데 창려군(昌黎郡)·요동국·낙랑군·현도군·대방군이다. 그런데 이 다섯 개 군을 포괄하는 평주 전체의 호수가 1만 8100호로서 한 호당 6명씩 잡으면 모두 10만 8000여명 정도다. 중국의 ‘중국역사지도집’은 평주가 지배하는 지역을 지금의 하북성 서쪽부터 한강 이북과 강원도 북부까지로 그려 놨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대한민국 국고 47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조조의 위나라가 경기도까지 지배했다고 맞장구쳤다. 현재 하북성과 요령성, 북한의 인구는 1억 5000만명이 넘는다. 10만 8000여명 중 여성을 빼면 5만 4000여명 정도다. 여기에서 다시 노약자를 빼면 남성 장정들은 2만~3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2만~3만명의 장정들로 이 광대한 지역에서 농사 지어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북경에서 황해도 수안까지 수천㎞에 달하는 만리장성도 지키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깜찍한 상상력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학계 및 남한 학계에는 그대로 통용된다.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중국 동북공정의 정치선전을 추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