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 원년(B.C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한 준걸인데 용병술이 뛰어났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적떼들은 더욱 강성해짐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이름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을해 3년(B.C 106) 帝(제)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였더니 이르는 곳마다 달할 자가 없었다. 열흘이 못되어 모인 무리가 5000에 이르렀고 매번 한나라 도적떼와 싸울 적에 모습만 보고도 무너졌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를 따라 건너서 서안평에 이르렀더니 곧 옛날 고리국의 땅이었다.
‣北夫餘(북부여) :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2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은 史學界(사학계)의 상식이다. 일부에서는 북부여의 건국을 실질적인 고구려 건국연대로 간주하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인데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이를 한사람으로 묘사했다.
⌜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또한 묘하게도 동명의 부여 건국설화와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화가 똑같다. 즉 동명이 고리국으로부터 탈출 → 沸流水(비류수)를 물고기 도움으로 渡江(도강) 과정이 주몽이 북부여 탈출 → 岎陵水(분릉수)를 물고기 도움으로 渡江 (도강)과정과 똑같다. 북부여나 비류수가 현재 내몽고의 부이르호수 및 바이칼호수 동쪽이라는 몽고과학원 슈미야바타르 교수의 학설이다.
‣卒本(졸본) : 종래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홀본과 같은 땅으로 지금의 혼강 유역 한인 지방이라 했으나 슈미야바타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부이르호수 근처의 어느 곳이니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으로 비정된다.
‣西安平(서안평) : 본서 대진국 본기의 설명이다. “서경은 압록보다 본래 고리국이며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옛날의 서압록이다. 고로 구지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이다. 임황은 뒤에 요의 상경인 임황부가 되었으니 곧 옛날 서안평이다.”
‣槀離國(고리국) : 슈미야바타르 교수는 고리국의 위치를 바이칼호수 동쪽의 몽고내부에 있다고 하였다.
갑오 22년(B.C 87)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배천의 한나라 도적떼를 격파하였다. 유민들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떼를 연파하였다. 그들의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았고 대비가 있음으로써 막았다. 을미 23년(B.C 86) 북부여가 성읍을 통털어 항복하였는데 지위를 보전해주도록 여러 차례 애원하므로 단제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를 강봉하여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단제께서 북과 나팔을 앞세우고 수만의 군중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오시니 이에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나라 도적떼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 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 60)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유명을 따라 졸본천에 장사하고 태자 고무서가 즉위하였다.
‣高朱蒙(고주몽) : 고구려의 시조. 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고진의 손자인 沃沮侯 弗離支 高慕漱(옥저후 불리지 고모수)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河伯女 柳花(하백녀 유화)이다. 본부인은 禮氏(예씨)이다. 북부여로 남하하여 고무서 단제의 사위가 되었다가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며 召西弩(소서노)를 부인으로 삼아 沸流(비류)와 溫祚(온조) 형제를 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