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수구리님의 주장은
스카이데일리라는 이름의 언론에
오랜 기간 고대사 관련 글을 연재하는
한 재야사학자의 주장과 비교적 일치합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영역 범주, 지리비정 등)은
이들뿐만 아니라
재야사학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의 연구자,
가장 많은 인구의 지지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수구리님은 이러한 재야의 몇몇 사이트에
자신의 글을 줄곧 게시하고 있습니다.
2)
수구리님의 주장에서 일부는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그 유사동질한 주장을 하는 재야연구자가
수십수백 명인 까닭이 있지만
그보다는 일부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한 일부 그 범주에서는 논리맥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의 허무맹랑한 언술 속에는 이들이 논리적 서술에 담지 못 한, 사실을 근거한 논리맥락이 있습니다
이들은 단지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는 아카데미식 논술 전개에 취약하고, 습득하지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수구리님의 주장에서 일부 사실이라 한 것들은
일부 사실, 또는 사실로서 고려할만 하다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요수, 요동, 연장성 등입니다
요수는 현 한단시와 형대시(형태시) 사이에서 모여서 흘러서 대청하로 들어가는 강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요수를 수경주와 통전, 신당서 등이 다른 요수를 서술하면서 이 산해경의 요수의 서술을 그대로 답습해 다른 요수에 적용하면서 오류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시기적으로, 또한 시대적으로 다른 요수를 수구리님을 비롯한 재야연구자들은 마치 강단주류가 현 요하에 고정해놓고 역사를 서술하듯이 형태시와 한단시 사이에 고정해놓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죠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동아게에 몇 차례 말씀 드렸 듯이 요수와 요동 연구를 완료했습니다
즉 모든 문헌의 요수, 요동 관련 기록을 다 분석하고 고찰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주장의 문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고집으로 인해서 요동과 연장성 등을 너무 남쪽에 잡고 있는 것입니다
4)
연구가 연구가 되려면,
주장이 주장이 되려면
문헌 기록 내에서도 교차검증을 해야 하고
물질문화와도 교차검증이 돼야 합니다
연나라는 bc 8세기 말에나 비로소 다시 나타나는데
산융에게 국가가 파괴되어 제나라에게 의탁하면서입니다
연나라는 제환공의 도움으로 bc 7세기 산융을 정벌하고
국가를 수습해서 임역, 또는 역에 도읍을 두는데
여기가 바로 연하도입니다
연하도문화라 지칭되는 문화가 그 후부터
현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연소왕 bc 4세기에 계에 도읍합니다
여기가 북경시 방산구입니다
즉 bc 7세기에 제환공이 산융을 정벌해 멸망시켰다고 나아가 영지와 고죽을 멸망시켰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고고물질문화로는
bc 5~4세기부터 현 북경시와 장가구시, 당산시 일대의
옥황묘문화가 연하도문화로 대체됩니다
저는 이 산융의 문화라 하는 옥황묘문화를
동호로 보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ㅡ 진개의 동호정벌
ㅡ 연하도문화의 옥황묘문화 대체
ㅡ 연소왕의 계 천도
ㅡ 이른 바 거연의 성립
이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산융과 동호의 이행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5)
저는 주류든 비주류든 재야든 그 누구의 것도 참고하지 않고
오직 사서와 문헌을 교차분석하면서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ㅡ유적과 유물의 물질문화적 사실과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난하유역부터 현 요하 서쪽 지역에
bc4~3세기에 확연히 나타나는 전국연계 물질문화의 주역을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 교체기까지
유망민들, 그리고 이윽고 성립한 위만조선의 것으로 본다는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비중 있는 연구자인 삼바님(단군님) 역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동의를 표해주신 바 있습니다
문제는
현 시라무룬허~로합하 유역(현 내몽골 적봉시 범주)의
문화와 현 하북성 북부의 옥황묘문화의 관계,
그리고 저 적봉시 일대 문화의 성격과 성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남습니다
저는 이들을 선비와 부여의 공동조상, 뿌리터전으로 보고자 하는데
아직 주장을 성립시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주류학계의 최근 비정처럼 동호로 보고
동호를 선비와 부여의 공통 뿌리로 보거나
아니면 발(맥)으로 보고서
이들이 선비와 부여의 공통 뿌리로 보고자 하는 것이
제 연구 과정 속에 맞서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들을 신채호 선생의 설에 근거해
발조선(변한)으로 보고자합니다
그래서 더욱
옥황묘문화와 적봉시 일대 하가점상층문화의
역학 관계, 생화학적 관계에 고심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 하면
하북성과 산서성에서의 우리 상고사의 역사 지평이
봇물 터지듯 뚫릴 것입니다
6)
저는 강박신경증적으로 연구를 해오고 있고 연구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은
강단주류설에 맞서는 주장과 연구는
아예 취급도 받지 못 하는 것을
무수히 계속하여 봐왔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주장이
단 하나의 허점으로도 무참히 논박 당하는 꼴을
또한 무수히 봐왔던 데에 있습니다
자기검증을 하지 않은 연구는
모든 사실을 검토하지 않은 연구는
자신의 가정을 적대시하면서 진행하지 않은 연구는
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연구자 자신의 인생이 허망해질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생까지 허망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