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은나라가 쇠하매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禮儀)와 전잠(田蠶)과 직조(織造)를 가르쳐 주었더니,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 사회에는 팔조금법(八條禁法)란 법금(法禁)이 행하여졌다"고 기록 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였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五部)의 병사가 모두 [왕을] 따랐다. 이때 온달(溫達)도 그 동안 기른 말을 가지고 따라갔다.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㑹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 隨行.
-『삼국사기(三國史記)』「온달열전(溫達列傳)」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이다. 서기32년 옥저로 놀이를 왔다가 최리를 따라 낙랑에 온 고구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혼인하였다.
태조의 맏딸이며, 고려에 항복한 신라 경순왕의 처이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다.
어머니는 충주지방의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 유씨(神明太后劉氏)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11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랑공주 [樂浪公主]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낙랑이라고 적힌 물건이 발견된다고 그게 한나라 낙랑군의 증거가 되진 않습니다.
낙랑이란 단어, 지명등은 고조선 시대때부터 조상들이 자주 써왔던 지명이라 추정할수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매년 왕이 낙랑에서 사냥대회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봐서 고구려때 낙랑은 고구려안에 포함된 지명이었다고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호동왕자 이야기의 낙랑공주가 낙랑태수의 딸이라는 말도 있지만 태수의 딸을 공주라고 칭하지 않는게 상식입니다.
도지사나 시장 부인을 영부인이라 하지 않는것과 같은이치죠.
그외에 고려에서 공신에게 내린 칭호에서도 낙랑공이란 호칭이 발견됩니다.
이는 낙랑이란 단어를 무조건 한나라 식민지와 연관지으려 했던 일제사학자들의 학설이 잘못되었다게 되는거죠.
한국 주류사학의 기초를 마련한 일본사학자들이 그리 대단한 학자들이 아닙니다.
일제시대 당시 사학자들중에 일본군부의 맘에 드는 주장을 하던 사학자들을 뽑아 조선에 보내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지원해준겁니다.
왜 일제시대때 일본정부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라고 일본학자들을 지원했을까요?
'일본최고'가 기반에 깔린 일본사람들이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한국사의 기초를 마련해냈으니 그게 제대로된 연구일까요?
사서와도 맞지않는 일제시대 국가에 고용된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계승시켜 나가고 있는게 현재 한국 주류사학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