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국과 몽골의 정체성 문제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일반적인 한국의 드라마와 소설과는 반대로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이상하리만큼 고려에 우호적이고 관대하였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없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대량 학살과 전국토의 초토화(焦土化)를 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인다.
1990년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하칸추루(한촐라)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몽골과 코리아(高麗)는 함께 몽골세계 제국을 창업했습니다. !”라고 해 한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 이 말의 비밀들을 찾아가 보자.
113) 木下禮仁 “「五世紀以前の倭關係記事 -『三國史記』を中心として」”『倭人傳を讀む』, 森浩一 編, (中公新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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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 대제국의 세계지배하의 고려의 지위
고려군과 몽골군의 첫 만남은 1218년 12월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퇴하기 위해 연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고려군과 몽골군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는데 이후 고려와 몽골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특수 관계를 유지했다.
몽골은 세계를 지배하면서도 고려에 대해서 국체를 유지하여 준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이 부분은 원 황제 무종(武宗)이 지대 3년(1310)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에 잘 나타나 있다. 무종은 “짐이 보건데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114)라고 하였다.
몽골학자 B.하과(Лхагва)의 연구에 따르면, 대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국가는 대체로 ① 무력 정벌을 통한 직접 지배(금나라, 위구르, 콰레즘, 페르시아의 일부분, 남송), ② 일부 대칸과 그들의 가계 소유지에서 기원해 정권을 수립하는 형태(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③ 영토나 독립된 권력을 그대로 남기고 자신을 대변하는 기구(다루가치)나 그 나라의 왕을 통해 지배하는 방식 등의 세 가지의 형태로 분류된다.
고려는 위의 형태 중 세 번째에 속 한다.115) 그러나 결혼동맹이 성립한 후 원 세조는 “고려에 굳이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하였고,116) 그래서 1278년 경에 이르면 다루가치의 존재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왕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전체 종친(宗親) 서열의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117) 특히 충선왕(忠宣王, 1308~1313)은 세계 권력의 2인자로 군림하였다.118) 충선왕은 원 무종(武宗)의 옹립으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해졌다(1308년 5월). 무종이 충선왕에게 “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승상(左丞相) 부마(駙馬) 왕장(王璋 : 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칸)의 외손자요, 전대부터 귀한 사위(貴壻)로서, 짐이 선조의 사직을 계승하는 위업[纘承]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짐을 크게 도와주었도다[參翊贊之功]. … 가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太子太傅) 상주국(上柱國) 부마도위(駙馬都尉)를 특별히 수여하고 심양왕을 진봉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김호부 옥대 칠보대 벽전금대 및 황금 500량 은 5000량을 하사하였으며, 황후나 황태자도 또한 충선왕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게 하여 보물과 비단 등 귀한 하사품들은 이루다 헤아리지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119)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충선왕이 도대체 무슨 지위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충선왕이 심양왕과 고려왕(이 즈음 충렬왕이 사거함)이 다시 됨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원나라의 각종 국사에 참의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의 실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충선왕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는 것은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 가는 지위이기 때문에 충선왕이 세계 권력의 제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20)
『원사(元史)』 에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그대로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또 원나라 성종 테무르 황제(成宗, Temü)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라는 것을 주변 신하들에게 반문한 적도 있다. 요수(姚燧)는 그의 문집(『목암문집(牧庵文集)』)에서 “몽골과 고려의 관계와 같은 특수한 밀착관계는 만고에 유래가 없다.”고 적었다.121)
114)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高麗史』 忠宣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