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중장기병 개마무사>
고구려는 이미 기원후 55년 요서 10성을 쌓으면서
태조대왕시기에 대국의 위치에 오르지만
5세기 광개토태왕에 의해 만주일대를 석권하면서
진정한 동방문명권의 패자로 군림.
뒤를 이은 장수태왕이 반석을 굳건히 다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오랜시간 지속적인 강대국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서토 사서등을 상당 부분 가져와 편찬한
삼국사기의 기록등을 보면 북위에게 조공 조공 어쩌고 이야기들이 쉴새 없이
나오는데(특히나 장수태왕시기 43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죠.
과연 북위는 고구려를 어찌할 정도의 상국이였을까??
무엇보다 전쟁이 빈번했던 삼국시대 전후로 내륙에 쳐박혀 있던
서토애들에게서 조공은 도리어 지들 평화를 구걸하기 위한
뇌물인 경우가 더 맞습니다.(한나라 유방이 흉노 묵특 대선우에 생포되어
60여년을 실질적 속국으로 해마다 증가된 조공을 갖다바쳤고
후한 시기 역시 58년 이후 정기적으로 선비족에게 한해 2억 7천만냥을
남흉노에게는 그의 3분의 1을 갖다바쳤음. 앞서 서토 최초의 상나라 역시 동
북방 이민 동이족이 내려와서 화한족을 정벌하고 세운 정복왕조사.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패하면서 망하자 돌궐이 서토 내지로 휩쓸고 들어가
면서 당나라 이연부터 이세민 조차도 위수지맹이라고 돌궐의 신하로
칭하면서 갖다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리고 그걸 서토식 뉘앙스와 체면식 묘사로 이후 선비족이 남하하여
세운 정복사인 북조사등에서도 조공(교류) 어쩌고 쳐했고.
<고구려는 초기부터 옛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다물정신을 국가 이념으로
한나라와 투쟁하면서 커온 나라였습니다.>
굵직한 사건들을 보면
49년 모본태왕시절 후한의 깊숙한 내지인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55년 태조대왕이 요서에 10성 쌓고
121년 선비(鮮卑)와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신창에
서 살해.
172년 한나라 대군을 몰살시킨 좌원대첩
311년 요동 서안평( 西安平) 점령
402년 후연의 숙군성 요서 공격
404년 후연의 연군 요서 공격
407년 고구려의 대대적 후연 공세로 멸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의 북연이 들어섬.
436년 장수태왕이 북연의 수도 조양에 대군을 보내어 북연의 물자와
사람을 내지로 접수할 당시 북위가 고구려의 군세에 눌려 지켜 보고만 있었
다는 기록이 있죠. (북위는 조양에서의 수모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이오를 사
신으로 파견. 위(조씨)나라때의 3배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강국으로 뒷날을 도
모하자고 말함)
439년 남조 송나라가 고구려 보고 북위를 같이 공략하자고 하자 말 800필과
함께 북방의 유연과 3각 동맹을 맺도록 중재.
이쯤되면 북위는 그냥 고립 무원이죠.
중세시절 고려-요-송의 삼각 견제때보다 더 심각해질수 있었던 게
북위 상황임.
이미 우리 고구려는 만주와 남북한 일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동방문명권
의 패자인 태왕으로 유연과 연합해서 북방에서 다이렉트로
북위를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남조도 배후에서 친다면 사방공격으로 떡이 될 수도 있던 상황.
이런 동북아 국제 정세를 조율했던게 고구려였고 이렇게 되자
북위에서 타개책으로 나온게 고구려와의 정략적 결혼카드로
선대부터 지속되다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에
이르러 고구려 공주를 원했지만 재차 거절 당하면서 결국
고구려 귀족가문인 후대 북위에 고구려계 황제로 등극하는 세종의 어머니
문소태후와의 결혼동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462년에 재차 고구려와 북위의 사신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 지는데
장수태왕시절에 이렇게 해서 43회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걸 서토식 뉘앙스로 북위의 교류를 마치
고구려보다 우위 어쩌고 식의 조공 어쩌고 식으로 쳐한 거죠.
위서 봉궤전을 보면 고구려 문자명태왕은 효문제 기간에
북위변방을 거란을 이용해서 두드리는 사건도 나오지만
북위가 이런 국제 정세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극적 화친을 맺는 노력을 함으로써 장수태왕에서 안장태왕 초기까지 이를
통해 고구려와 북위의 동맹이 어느 정도 평탄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508년 북위의 세종이 산둥일대에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 설치.
(고구려계 세종 등극 이후 고조가 붕당을 결성하여 북위 조정을 장악해 버림.
이를 위해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을
두었는데 뭔소리인가 하면 고구려인만 추천해서 벼슬에 앉히는 직책입니다.
이정도면 당시 어떠했는지 알만 하죠 ㅋ이후 이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고조는 세종의 사후 계략에 빠지면 고양왕에게 제거되지만 고조의 아들 고
식이 제주자사로 있는 등 여전히 고구려인들의 영향력을 철저히 제거하지
못한 이면에는 강대한 고구려가 뒷배경으로 북위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임.)
이후 요서일대에서 발견된 한기묘지명을 통해서 보면
525년에서 528년사이에 안장태왕시기에 가면 다시금 충돌이 본격화되는데
고구려는 거란을 시켜 요서 대릉하일대 조양을 공격하여 평주사마자의참군
한상을 잡아 오는 등 요하 건너 서쪽 2천리를 점령하는 북사등의 기록이 확
인되는.
이후
560년대 평원태왕 돌궐 격파 578년 북주와 싸우고
598년 영양태왕시기 수의 대대적인 공략준비가 본격화되자 영주 선제 공격
644년 당이 요서 영주로 집결하자 공격.
<이런 천년사직 우리 고구려의
일련의 맞짱이나 혹은 수시로 변방 교란, 내지 깊숙히까지 공격을
강행하고 심지어 서토 통일왕조와도 전쟁이 불가피 했을 경우에는 도리어
선제 공격을 과감히 실행하는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당시의 서토와의 조공 어쩌고는
말 그대로 그냥 서토식 자뻑 사관에 의한 교류 기록을 그런식으로 쳐한 것에
불과하며 고구려 최전성기를 구가한 장수태왕시절 43회에 달하던 사
신 왕래 기간의 조공 어쩌고 기록 역시도 도리어 북위가 이런 동북아의 힘을
조율하던 고구려의 3각 동맹에 북위가 어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고육지책으
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