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4일 상당히 흥미로운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그동안 재야 史學에서 종종 주장되던 의견이기는 한데 공식적인 학술 세미나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되어 세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뉴스가 전해 졌습니다. 바로 만주족 ( 滿洲族 Manchus ) 에 대한 귀속문제였습니다.
[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하기 위해 열린 세미나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공론화 되었습니다 ]
만주족은 고려시대에 여진족 ( 女眞族 Jurchen ) 이라고 불렸고 그 이전에는 시대상황에 따라 숙신 肅愼, 읍루 挹婁, 물길 勿吉, 말갈 靺鞨 로도 불렸던 퉁구스계 半농 半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부분의 명칭은 주로 한족 漢族 이 만주에 살던 민족을 비하해서 불렸던 타칭이었고 만주족이라는 명칭이 스스로 정의한 유일 자칭입니다.
[ 드라마에서 야인틱하게 묘사되는 만주족 ( 여진족 ) 의 모습 입니다 ]
만주족들은 발해 멸망이후에도 동북지역에 계속하여 존재하여 있었고 더구나 우리와 같은 퉁구스계열로 유전학적으로 가까운데다 생활습관이나 언어적으로도 많은 유사점이 있어 이들의 역사도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었습니다.
[ 발해사를 끝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정사에서 만주지역은 잊혀진 강역이 되었습니다 ]
물론 한국과 일본이 유전학적으로 가깝고 언어학상으로도 비슷한 문법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의식을 결정하는 문화적 차이가 워낙 커서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너무 확대해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일단 만주족의 거주지역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의 고대사 활동강역과 일치가 됩니다.
[ 고구려시대 처럼 만주족을 지배하였던 적도 있습니다만 ]
때문에 삼국사기, 고려사는 물론이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더라도 우리역사에 수시로 등장하는 민족입니다. 고구려시대는 피지배민족으로 있었고 발해 건국 당시는 협력자였으며 조선의 개국공신 퉁두란처럼 권력의 핵심이 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고려 윤관장군의 동북9성처럼 처절한 경쟁을 벌이거나 병자호란처럼 우리를 정복하여 치욕을 안겨주었던 대상이기도 합니다.
[ 병자호란처럼 치욕을 당한적도 있습니다 ]
즉 우리가 강했을 때는 피지배민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그들이 강했을 때는 고려나 조선도 조공을 바치는 상대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만주족은 12세기 金 ( Jin ) 을 세워 만주지역은 물론이거니와 화북지방을 재패하는 제국을 세웠었고 17세기 다시 金 ( 後金 이후 淸 Qing 이라 개명 ) 을 건국하여 중원은 물론이거니와 몽골, 티베트, 투르크메니스탄 지역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창건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 만주족의 제1차 극성기라 할 수 있는 12세기 金제국은 만주와 화북의 패자였습니다 ]
그러므로 金과 淸 ( 後金 ) 의 역사를 국사에 편입하여야 한다는 의견은 우리 역사가 만주지역을 단절 없이 지배하였다는 것을 뛰어넘어 대륙전체로 그 강역을 확대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august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생각하였던 부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기존 우리의 역사에서 스스로 金이라는 나라를 세웠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17세기의 金제국 ( 後金 - 淸 ) 은 중원은 물론 몽골과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하였습니다 ]
1453년 수양대군 ( 世祖 ) 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김종서를 비롯한 기존 권력의 핵심들을 제거하여 나갔습니다. 이때 김종서의 오른팔로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 李澄玉 이 정난의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자 반란 세력들은 이징옥의 직위를 파직하고 후임으로 박호문을 임명하여 함길도로 파견하였습니다.
[ 두 金제국의 중간이라 할 수 있는 단종 복위운동이 있었던 15세기 또 하나의 金제국이 있었습니다 ]
이징옥은 1399년 경남 양산태생으로 17세 무과에 장원급제한 무장으로 주로 함경도 일원의 북방 국토방위를 수행하였고 김종서, 최윤덕 등과 함께 사군 육진 개척에 용맹을 떨쳐 단종 5년 종일품의 품계를 하사 받았던 청렴 강직한 인물로 그의 인품은 함길도 주민들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널리 알려져 여진족들의 존경을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 15세기 大金帝國의 황제였던 충경공 이징옥의 묘 ]
이징옥은 불사이군을 외치며 후임으로 온 박호문을 처형하면서 수양대군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함경도의 많은 조선민과 만주 일대 여진족은 대민족 국가 건설에 앞장서자며 이징옥을 영도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장 앞장선 인물이 청 태조 淸 太祖 누르하치 愛新覺羅 努爾哈赤 의 조부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기오창까 覺昌安 였습니다.
[ 청 태조 누르하치의 영정입니다.
그의 조부였던 기오창까가 이징옥을 大金帝國의 皇帝로 옹립하였습니다 ]
도읍을 만주의 오국성 五國城으로 정하고 함경도는 물론 만주전역과 요동을 아우르는 지역을 大金帝國 영토로 선포하고 황제로 이징옥이 등극하였습니다. 아구타가 건국한 金帝國이 몽골에 의해 멸망 된지 200년 만에 조선인과 여진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맹아로 부활한 金이 다시 재현 된 것이었습니다.
[ 심양에 입성하는 누르하치의 모습입니다. 이징옥이 저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
하지만 오국성 입성 전야에 수양의 일당인 정종, 이행검의 야습을 당해 이징옥은 피살되었고 구심점을 잃은 대금제국은 그것으로 운명을 다하였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라고는 없지만 만일 이때 이징옥이 새로운 금의 태조로 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 아마도 이론의 여지없이 만주의 역사가 우리역사로 편입되지 않았을까요 ? 재미있었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