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절대다수의 한국인이 신라인을 시조 중시조로 삼고 있다. 만일 고구려가 삼한을 정복 했다면 한국인은 극씨, 중실씨, 소실씨, 명림씨, 을씨, 창씨, 음씨 등 고구려 지배 세력이 사용한 성을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한편 백제가 삼한을 정복 했다면 한국인은 부여씨, 해씨, 사택씨, 묘씨, 협씨, 골씨 등 백제 지배 세력이 사용한 성을 가진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삼한을 정복한 건 바로 신라다. 그렇기에 현재 한국인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이 다수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후 한국의 사회 정치 문화 등 제 분야도 신라에 기원을 두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적 유산은 한국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해가 925년부터 약 200년간에 걸쳐 고려에 귀순한 숫자를 고려사를 통해 분석해보면, 최대 10만명 수준이다. 발해 인구 중 극히 일부만이 고려로 왔다. 발해는 한국 한국인 형성에 기여를 못했다는 뜻이다. 적대관계였던 고구려-신라 사이에는 이보다 더 적었다. 고구려 역시 한국 한국인의 형성에 아무런 기여를 못했다. 한국인은 누구의 후손인가?
통계청의 2000년 인구통계조사에 의하면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씨가 5개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김해 김씨 412만(신라계)
밀양 박씨 303만(신라계)
전주 이씨 261만(신라계)
경주 김씨 174만(신라계)
경주 이씨 142만(신라계)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신라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본관이 총 6개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중요한 성씨로 최씨,정씨,윤씨,조씨,고씨,배씨,설씨,석씨 등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대체로 이 성씨내에 포섭된다. 이 중 최씨는 경주 최씨와 전주 최씨가 중핵을 차지하는데, 모두 최치원과 최언휘(최치원의 사촌)를 시조로 한다. 정씨는 두 갈래가 있는데, 정丁씨는 중국계이며 정鄭씨는 토종 영남계로써 경주 정씨와 동래 정씨가 핵심이다. 윤씨는 조선씨족통보에 따르면 칠원(경남)윤씨가 최초의 윤씨이며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아마 칠원에서 모든 윤씨가 분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씨는 한양조씨(조광조로 유명), 풍양조씨(세도가문), 창녕조씨등이 있는데, 현재 창녕조씨로 모두 합본된 상태이다. 창녕(경남)조씨가 모든 조씨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씨는 제주고씨로부터 분적해나갔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시조 고을나의 15세손이 신라에 입조한 것으로 나와 고씨 역시 신라계이다. 배씨는 시조가 경주배씨이며, 숫자는 성주(경북) 배씨가 가장 많다. 설씨, 석씨등도 신라계이다.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때 재상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그밖에 인구 숫자로 상위 20개 성관은 대부분 신라계다. 요컨대 한국 성관은 신라계가 80프로, 귀화계가 20프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신라계 성씨와 경상도 지역의 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역사 속의 한국인은 신라인의 후손으로 채워졌다. 한국인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과 본관을 갖고 있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결과다.
성씨는 양반만 가진다? NO
한국인 대부분은 신라성씨를 갖고 있는데 이걸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족보 조작이란 것이다. 그러나 성씨와 족보유무는 무관하다. 성씨는 아무나 다 가질 수 있지만, 족보는 양반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흔히 가진 편견이 양반만 성씨를 가지며, 한국인은 전부 성을 가졌으니, 전부 양반의 후손인데, 어떻게 노비 후손은 한명도 없고 전부 양반의 후손만 있냐. 그럼 성씨가 위조된거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성씨를 양반의 전유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씨는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 이상은 다 가졌고, 노비 중에서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한 예로 송익필(1534년)이나 홍세태(1653년)라는 천민은 성관을 가졌다. 또 한국 최초의 의사는 박서양(박봉출)이란 사람인데, 백정 출신 박성춘의 아들이다. 즉 천민도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기 전에 이미 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성씨가 있다고 해서 양반의 후손으로 착각해서도 안되고, 자기 성씨가 가짜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문재의 [석동유고]를 보면, 양반들은 품관양반인 좌수(오늘날로 치면 지방의회 의장)조차도 양반으로 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짜 양반은 누구인가? 성씨로 구분되는게 아니라 과거급제로 구분된다. 아무리 평민이라도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고, 아무리 선대에 양반이라도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평민으로 격하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양인과 천민이 있는데, 이 양인은 다시 양반과 평민으로 나누어 지고 평민은 농민 공,상, 그리고 칠반천역으로 나뉜다. 칠반천역과 공,상인은 하급 무관이나 잡직에만 응시할 수 있었고 일반 양인들은 과거응시에 제한이 없었다.
이런 사실은 한산이씨 제삼수보 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편찬자는 한산에 살던 이인적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족보 중간을 허락했다고 한다. 5년간 계속 찾아와 부탁을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일가는 과거나 벼슬길이 끊어진 채 여러 세대가 지나 이제 우리 집안 자손들이 군역대상자 명부에 오르게 되었으니 달리 손 쓸 방도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의 절박한 필요성의 하나로 병역문제가 있었다. 실제 조선 후기에는 군역대상자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할때 꼭 족보를 같이 제출했다. 관이 족보를 근거로 양반 여부를 판별했기 때문이다(양반은 군대 면제).
"족보를 검토하고 가승을 참조하니 그의 가문이 양반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병역 면제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다"[유서필지]. 조선 후기에 도래한 족보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도래한 것이다. 족보가 병역면제 여부의 입증자료였던 것이다. 즉 족보편찬은 군대 안갈려고 한거지 성씨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군적에는 성명 본관 가계등이 기록되므로 군대가는 평민 이상 계층 모두가 성이 있었고 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걸 알수 있다. 그렇다면 족보 위조는 전혀 없었나? 그렇진 않다. 하지만 그 규모는 생각보다 작다. 이조실록에는 영조때 처음 족보 위조 사건이 보이고 통틀어 위조 매매 관련인의 숫자가 500명을 넘지 못한다. 이정도 사례 가지고 대다수 한국인의 성씨가 조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후기에 양반이 급증했다? NO
시카타 히로시는 대구 호적을 근거로 조선후기에 양반이 급증했다고 주장한 뒤 국사학계 통설로 굳어졌는데. 이는 평민도 취득가능한 유학신분을 양반으로 간주하고 낸 오류있는 통계다. 오히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양반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최승희 이해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