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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각 국의 주장 (발해)
‧ 일본측의 관점
일본학계에서는 건국자 대조영을 말갈계의 인물로 보고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말갈계임을 들어 발해를 그들이 세웠던 만주국의 왕조로 보고 발해사를 한민족 역사체계에서 분리시켜 남만주 지역이였던 동북삼성의 남부지역과 한반도의 북부지역의 역사를 소위 만주사로 정리하려했던 “만선사관(満鮮史観)”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시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러시아 주장
발해영토의 일부였던 연해주 남부를 차지한 러시아에서는 발해가 문화면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가까우나 어디까지나 지배세력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이였다고 하여 속말말갈의 본거지인 지역이 현재자국의 영토이니 자국의 지방역사 내지 소수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하려 하고 있다.
‧ 중국측 주장
한편 발해의 영토였던 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중국은 발해는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고 기타의 말갈족과 읍루(挹婁) 부여(夫余) 예맥(濊貊) 옥저 계통의 여러 종족, 고구려 유민 등이 이에 합류하여 세워진 나라고 보고 또 발해가 멸망 후 주민의 대부분이 중국의 각지로 옮겨가 한족(漢族)에 동화 되였으므로 당(唐)의 지방정권으로 고정시켜 거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임.
이와 같이 중국 측으로서는 많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바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가장 수가 적은 민족인 허저족(赫哲族)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속말말갈의 지역인 흑룡강과 송화강 하류가 만나는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지역인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의 조상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 장군이라고 공공연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우리 조선족과 풍속습관 등이 거의 비슷하고 얼굴 생김도 너무나 흡사하기에 앞으로 연구대상이 될 것 같다.
4. 발해고의 고찰
조선후기 21대왕 영조, 22대왕 정조대의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의 역사책으로써 1784년(22대 정조8)에 저술한 한민족 최초의 발해역사서이다.
이 책을 편찬한 동기는 직접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서문 중간중간에서 이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조선이 약소국이 되고 선비들의 눈과 귀가 막히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즉 일국의 흥망의 계기를 지리적 요인에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가 발해사에 주목한 것도 이런 인식이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되는바 그는 발해의 땅은 부여(夫余) 고구려로 이어진 우리 영토였으며 건국자 대조영(大祚栄)은 고구려인 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는 남북국 시대이며, 고려는 마땅히 남북국사를 편찬해야 했는데, 한반도 지역에만 집착하여 북쪽의 지역을 그대로 버렸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는 발해가 망한 후 이 지역에는 여진과 거란이 들어 왔는데, 고려정부가 급히 발해유민을 통하여 발해사를 편찬하여 이 지역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한사람의 장군만 보내었어도 쉽게 토문(土門) 이북과 압록강 이서 지역을 장악했을 것이라 했다.
체제는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어고(国語考), 국서고(国書考), 속국고(属国考)의 구고(九考)로 구성했다.
정사(政史)의 세가전지(世家传志)의 형식을 딴것이라 분량은 많지 않으며 의장고 이하는 더욱 간략한데 이는 자료의 부족탓이였을 것이다.
그는 수십만 이상의 발해 유민이 고려에 귀순해 왔음에도 고려가 발해의 자료를 보존하지 않아 문헌이 없어져 버렸음을 크게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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