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은 한 역사 토론회에서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이덕일 소장이 논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도를 하였다. 그것은 낙랑군이 현 "평양" 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덕일씨를 거론한 기사였다.
* 아직 교치에 대한 강단의 주장이 옳은지, 이덕일씨가 옳은지 완전한 판단이 난것은 아니지만, 이덕일씨를 위한 변명을 강단의 교치설에 대한 그의 반박글을 통해 적어본다.
(문헌은 이덕일 우세, 유물은 여전히 강단 우세 but 둘 다 뚜렷한 유적(왕검성 궁성 및 성곽 혹은 낙랑의 치소)에 대한 근거는 없슴.....a) 유물은 상당수 위조존재, b) 강단이 제시한 유적은 대부분 위조-낙랑치소,장무이묘 등 )
1. 기사 발췌. "이덕일 소장은 토론 상대자인 윤용구 박사의
다음 지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한서>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은 <한서>에 주를 붙인 거예요. …이건 <후한서>의 기록이 아니에요. 여기 주가 달려 있는… 괄호 친 건 다 ‘주’예요.”
알고 보니 이덕일 소장이 ‘1차 사료’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자료는 한나라 존속 시기에서 수백 년 지난 당나라 때 사람 안사고나 이현 등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니었다.
...한겨레21 기사처럼 이덕일의 한사군 요동설은 과연 그의 망상인가?
2.이덕일씨의 강단에 대한 항변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평양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수십 개 이상 공개되었으므로 이 사료들이 말하는 사실에 대해 무언가 설명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교군설(僑郡說)’이다. 교군설(일명 교치설)이란 간단하게 말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한사군의 중심이라는 낙랑군 조선현의 자리를 평양 남쪽의 대동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를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이라고 말한다. 교치는 평양 대동면에 살던 ‘조선’이 하북성 노룡현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많지만 그 전에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사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교치설 자체가 사료로는 입증할 수 없는 공상이란 뜻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사료에 낙랑군이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8, 진기(晋紀) 10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건흥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 모용외(慕容廆)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 동사람 장통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 미천왕과 싸웠는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의 설득을 들은 장통은 1000가구의 백성을 데리고 선비족 모용씨에게 귀부했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외는 창려(昌黎) 극성(棘城) 사람으로 전연(前燕)의 건국자 모용황의 부친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첫째, 고구려 미천왕 때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군과 대방군은 평안남도나 황해도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미천왕 때라면 고구려가 이미 요동반도는 물론 그 서쪽 상당 부분까지 차지한 상태였다.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장통이 1000가구를 거느리고 자국 영토를 지나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고대 요동에서 활동하던 선비족 모용씨에게 가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하고 있었겠는가?
둘째, 1000가구의 낙랑인이 이주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 전체가 이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낙랑군의 인구에 대해 ‘한서지리지’ 낙랑군 조는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략 한 가구의 구성원이 7명 정도라는 이야기다. 즉, 장통이 거느리고 간 1000가구는 7000명 정도라는 뜻이다.*40만7000여 명의 낙랑인 중에 7000명이 이주한 것을 낙랑군 전체가 이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나머지 40만 명은 어디로 갔나?
식민사학의 논리라는 것은 이처럼 조금만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 대방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 고구려가 단군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서쪽에 있던 낙랑, 대방을 공격하자 장통이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1000가구만 거느리고 고대 요동의 모용씨에게 귀부한 것이다.
나머지 낙랑인들은 계속해서 하북성 낙랑지역에 살고 있었다. 낙랑군 1000가구가 귀부하자 모용외는 낙랑군이란 명칭을 부여해준 것에 불과하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없고, 따라서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이주한 적도 없다. 중국의 어느 사료에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강단의 망상지도
3. 강단의 이덕일씨의 주장에 대한 반론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313년 이후의 자료들이다. 그런데 313년 이후 낙랑군은 요서로 교치되어 졌다. 그러니 313년 이후의 낙랑군에 대한 사료들은 당연히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덕일은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각종 사료에 등장하는데 식민 사학계는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한다고 비웃고 있다. 하지만 사학계가 313년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의 낙랑군만을 가리킬 뿐이다. 313년이후 낙랑군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덕일의 주장은 313년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축출된 후 요서 지방에 새로운 낙랑군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알고도 우길수도 무식한 주장일 뿐이다. 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만들었다(이른바 교치).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4. 참고. 같은 토론회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발췌
고조선 멸망(BC 108년) 후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은 어디에 있었나? 상고사(上古史)의 쟁점 중 하나인 낙랑군 등의 위치를 놓고 '한반도설'을 주장하는 주류 학계와 '요서(遼西)설'을 주장하는 비주류 학계가 격돌했다.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상고사토론회는 '한반도설' 입장에 선 공석구 한밭대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과 '요서설' 입장에 선 복기대 인하대 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각각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이주영)가 주최한 이날 토론회는 대립하는 두 학설의 학자들이 맞대결을 펼쳐 시작 전부터 관심거리였다. 또 정부가 새로 만드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에 상고사와 고대사 서술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후라 더 주목을 끌었다.
공세적 입장인 '요서설' 학자들은 중국 역사서들을 주된 논거로 삼았다. 고조선 연구자인 복기대 교수는 "그동안의 낙랑군 연구는 문헌 사료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고학적 발굴에 너무 의존했다"며 "중국 정사(正史)들에 중국사의 일부로 기록돼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하북성 북부에서 요령성 서남부였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은 "후대의 기록이나 연구보다는 고조선 멸망 후 상황을 보여주는 당대의 기록이 중요하다"며 "낙랑군·대방군이 존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중국 고대 사서는 그 위치를 고대 요동(遼東)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낙랑군의 중심지인 조선현은 하북성 노룡현이었다"고 주장했다.
방어적 입장인 '한반도설' 학자들은 이들 중국 역사서의 사료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공석구 교수는 '요서설'의 근거로 인용되는 중국 사서들이 후대에 편찬된 것이고 그 원조에 해당하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의 "낙랑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라는 기사는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돼 요서로 교치(僑置·이름만 옮김)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조선 연구자인 윤용구 박사는 "한사군의 위치는 조선 후기에 추정 가능한 모든 논리가 이미 제기됐고, 1920~30년대 점제현신사비·대방태수묘 등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통해 대강의 결론이 내려졌다"며 "더구나 해방 이후 평양 일대에서 수많은 낙랑 유적·유물이 나와 낙랑군의 한반도 서북 설치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양측은 낙랑군 위치 문제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서도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복기대 교수는 "동북아에서 역사는 안보의 시작인데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덕일 소장은 "중국과 역사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굳이 왜 우리에게 불리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석구 교수는 "정치적 이유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료만 택하면 안 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용구 박사는 "낙랑군은 고조선 이래의 토착 세력이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고 낙랑문화는 고조선 문화의 기반 위에 한문물이 융합된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7/2015111700090.html
ps.....삼바님이 주신글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험독현(險瀆縣),[4] [4]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王)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此)은 자연적으로(自) 올바른(是)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 주석문의 시대 應劭==후한(동한)시대 인물/ 험독현에 처음 주석을 단 인물(AD 200년 전후) 臣瓉==서진(AD 265~316)대의 인물 顔師古==당나라 초기 인물(AD 581~645) ------------------------------------------------- 험독현 주석에 나오는 3인은 안사고만 후대의 인물이고, 응소와 신찬은 낙랑군 존재 당시의 인물입니다. 비록 주석이라할지라도, 1차 사료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윤용구의 한마디로 한순간에 무녀졌다고 하는 소리는 사실과 다릅니다. 원문 제시하면서 그안에 주석까지 소개한걸 트집잡아 후대의 인물만 주석을 단것처럼 말한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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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중인 평양출토 낙랑향로(위조품으로 생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