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친구님이 아까 퍼오신 동아일보 특종기사에 대해서 4 leaf님이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셨더군요.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이전에는 전혀 낙랑 유물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데
오리지날 유물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복제가 가능하며 어떻게 그걸 평양에 묻을 수 있느냐면서요.
마침 점심 먹으러 집에 들렀다가 감방친구님 글과 댓글 읽고
전에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본 내용이 기억나서 방금 찾아 보니 역시 수상한 내용이 있네요.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중략)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이 책 351-355p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이 정도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유물 조작 알리바이가 충분히 성립하는 거 아닙니까?
세키노 타다시가 자기 일기책에 자기 손으로 직접 적었으니 협박이나 조작일 리는 없겠죠?
저자 주장에 따르면 대정 10년(1921)의 물가로는 1엔으로 쌀 5kg을 살 수가 있고
대졸자나 엘리트 은행원 월급이 50엔 정도(351p)였다는군요?
여러분 300엔이 얼마나 거금인지 감이 잡히시나요?
더 놀라운 것은
총독부 부탁으로 그 유물들을 300엔으로 사 들인건 첫날이고
며칠 후에 또 본인이 개인적으로 눈에 보이는 한대 낙랑 유물이란 유물은 다 싹쓸어서 사 들입니다.
세키노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중국에 한번만 갔을까요?
한번 갔을 때 사 들인 것만 해도 저 정도인데 5번 10번 갔다면?
또 본인이 직접 사지 않고 남의 명의로 사거나 아예 일본군들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살 수도 있겠죠??
결론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낙랑" 글자가 찍힌 기와, 와당, 토기 따위는 우습게 위조할 수 있었다는 거죠.
아참
세키노가 건축학과 교수인거 기억들 하시죠?
건축학과가 괜히 건축학과가 아닙니다 건축공학에 밝은 대단한 분들임 ㅋ
그런 분들이 건축공학의 원리에 맞춰서 유물, 유적 조작하는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오늘 동아일보 특종으로 이렇게 마침내 식민사학자들의 더러운 역사왜곡 꼬리가 밟혀버렸으니
이제 말도 안되는 낙랑평양설 같은 개소리는 끝장이 났다고 봅니다.
평양이 낙랑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넘쳐난다 이딴 헛소리는 집어넣어야 될지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