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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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670년 3월, 2만 병력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목표는 오골성(烏骨城). 옛 고구려의 군사 요충지로서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城) 봉성진(鳳城鎭)이다. 요동은 신라가 건국된 이래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이었다. 신라의 설오유(薛烏儒) 장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高延武) 장군이 각각 1만 명씩 거느리고 요동을 선제공격했다.
이 전격작전으로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시작되었다. 앞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상황에서 당은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믿고 있던 당에게는 충격이었다. 약소국 신라는 왜 최강대국 당에게 덤벼들었던 것일까?
신라가 나당전쟁의 포문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부터 669년까지 집중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다. 대사면(大赦免)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고, 전국 170여 곳의 목장을 재분배해 기병을 강화했다.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고,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을 모색했다. 요동 공격군의 장수는 비진골 출신의 설오유가 임명되었으며, 주력 병력은 고구려 멸망 당시 포로로 삼았던 고구려 군사들로 채워졌다. 요동 공격을 위해 이 지역의 지리와 정세를 잘 아는 특수부대가 편성되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해 나가면서 당의 지배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670년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현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에 말갈(靺鞨) 군사들과 싸워 크게 이겼으며 목벤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의 군사들이 계속 도착하자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했다. 2만 병력이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들이 건넌 강은 압록강이 아니라 대동강이라고 보았다.
당시 설오유 장군과 고연무 장군이 건넌 강은 분명 '압록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2만 병력이 향한 '옥골(屋骨)'은 바로 오골성(烏骨城)이다. 일본학자들은 신라군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축소ㆍ왜곡하였고,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신라는 요동의 오골성(봉황성)을 선제공격하여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당의 이목은 모두 요동으로 쏠렸다. 이 때 남쪽에서는 진골 귀족이 이끄는 신라 주력군이 움직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옛 백제 지역이었다. 670년 7월, 신라는 일시에 웅진도독부의 82성을 함락시켜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듬해에는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영역화했다. 이제 옛 백제지역은 신라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신의 한수였다. 당은 북쪽 옛 고구려지역에 신경 쓰느라 남쪽 옛 백제지역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신라는 이 틈을 노려 전격적으로 웅진도독부를 차지했다.
원래 신라가 당과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북쪽의 안동도호부, 서쪽의 웅진도독부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특수부대로 요동을 공격하여 당의 이목을 돌린 후, 주력부대로 웅진도독부를 전격적으로 장악했다. 이제 신라 서쪽의 방어전면이 사라져 버렸다. 신라는 서쪽 방어전면을 지키던 병력까지 북쪽으로 전환시켜, 당군의 남하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신라는 오골성까지 군대를 움직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차피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국경선의 한게는 대동강~원산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고, 또한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안동도호부를 넘어서 고구려 부흥세력과 함께 요동의 오골성으로 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안동도호부가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라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웅진도독부도 당시 완전히 병합하지 못했던 신라가 안동도호부를 지나가기엔 무리가 아니지 않았을까? 보급이나 후면의 반격을 생각을 해도 말이다.
즉, 안동도호부는 현 평양이 아닌, 다른 곳 즉 요동(구체적으론 요양시)에 위치했다는 강한 생각이 든다.
그랬기에 고구려 부흥세력도 목숨을 다하여 강하게, 신라와 동맹을 맺고 요동을 공략하려 했을 것이다.
만약,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재했다면 신라와 고구려 부흥세력은 일단 대동강 지역 공략에 더욱 신경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재했다면, 보급이나 후방의 공격을 생각한다면, 도무지 신라의 요동공격은 말이 안되는 작전이다(신라가 갑자기 징기스칸 군대가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고구려 유민이 신라의 봉황성 공격에 협조를 한 까닭은, 요동에 고구려의 평양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개인적으론 생각을 한다.
건안성 (1)낙랑동주. (2)안시성. (3)고 요동.(4)압록강.(5) 윤몰된 고 요동(古遼東)평원(지도 구산님 블로그 인용... 압록강의 위치 참고)
이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보이지 않는 동국지도에서만 보이는 요동지역을 그리고 있다.(지도 구산님 블로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