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문은 위대한 만족들이 사용하는 만주어 보통명사인 투먼을 음차한겁니다. 두만강도 토문으로, 송화강 상류 지류인 오도백하도 토문으로 불렸습니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은 명백히 두만강입니다.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에 오르기전 혜산진에서 이선부, 박권과 회동할때 차관접대사의별단에 토문은 두만이라고 적혀있었고, 곧 오라총관 목극등이 자신들의 일행과 조선인 군관을 데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죠. 그러나 목극등의 착오로 실제위치는 두만강이 아니라 오도백하였죠.
다음은 이를 증명해주는 숙종 38년 5월 23일자 기록입니다.
총관(摠管: 목극등)이 백산(白山: 백두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생략)
몇달 뒤인 12월 7일, 홍치중이라는 인물이 국경을 잘못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조정에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때 함경 감사 이선부가 백두산에 푯말 세우는 역사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겸문학 홍치중이 일찍이 북평사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이 북관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중략)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조정에서는 논의가 오고갔긴한데 결국 청에 알리지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