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4년 1월 22일 오사카
100만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 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 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10000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1764년 1월 28일 쿄토
발전도에 있어서는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래도 왜왕이 사는 수도로서 매우 사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산의 모습은 장엄하고 강은 평야를 둘러싸고 흐르고 비옥한 농지가 광할하게 퍼져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 분하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같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가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 등은 중국의 중심지에도 없는 풍경이다. 사람들의 용모도 아름답다. 특히 여성이 아름답다. 나고야의 미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 일원은 나고야의 미인을 한 명도 놓칠세라 머리를 좌우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
좌측에는 집이 줄지어 있고 우측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옥한 토지가 광할하게 퍼지고 있다.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사람들의 활기참,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교량과 배 모두가 오사카와 같이 뛰어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다
//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저서 일동장유가
순조 11년 (1811년) 11월 7일
해가 돋았다. 선실을 나가 문설주를 잡고 섰다. 사면이 바다다. 굉장하다. 세상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싶다. 온 우주에 사방에 물결만이 있다니,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싶다.
순조 11년 (1811년) 11월
10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구경하는 왜인들이 산에 앉아 쪼그리고 우리를 보고 있다. 행색이 다르니 기웃기웃한다. 머리는 깎 았는데
뒤통수만 남겨놓고 고추상투를 틀어놓았다. 어떻게 여기 놈들은 하나씩 칼을 차고 있다. 여자들은 노소와 귀천 을 가리지 않고 고운 빗을 꼽고
있다. 소매가 남녀구분 없이 한가지이니 알아보기가 힘들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
여기는 교토이다. 이
도시는 오사카의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 왜왕이 사는 도시인지라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왜왕 의 성벽마저 사치스럽다. 아니다 사치보다는
아름답다. 나도 이 풍요에 길들여 져버린 것인가 더 이상 사치스럽다는 표 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왜국에 있고 왜국의 눈으로 이 풍요를 보기
시작했다. 강에 모인 아녀자들이 매우 아름답다 .
순조 13년 (1813년) 1월
나는 재작년 조선
통신사의 서기로 갔다 온 이후 아직 그 풍요의 충격에 있다. 일본을 무로서 대하던 관점을 탈피하여 문의 일본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 를 ‘실사구시’ 라고 한다.
순조 13년 (1813년)
2월
날이 추워진다. 백성들은 가난에 굶주리고 먹을 걱정만 하고 있다. 왜인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나같이 역사적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본을 보고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일본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보고 배운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 록하고자 한다. 해사일기, 일본록, 승사록, 화국지 등 일본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수집하여 나의 관찰과 집대성하고 하고자 한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방대한 견문록이 저술되긴 하였으나 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었 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은 고작
물레방아나 고구마 재배 등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난 믿기질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일 본을 너무 성리학적 테두리에 가둬놓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것이다. 왜놈들의 일본 경제상에 대해서 내심 경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화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대체 알 수 없다. 문화적 우월감이 힘
앞에서 무슨 소용인가? 이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져와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외교를 하고 있었다. 가면을 써가면서 까지 왜 거기서 배우지 못했냐 는 말이다. 일본은 무에서 한국은
문에서 강세를 띠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하고 있었다. 대일외교관계를 담당한 조엄이 라는 작자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상을 보고도 왜인들이 짐승과 같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는지 궁금 하다. 일본의 물레방아, 절구, 제방 공사 등을 견학하고 도입하려 했던 것은 높게 사나 그는
정말 현상을 볼 줄 모르는 인 물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논 사회를 봤어야 옳다. 조엄 이놈은 역사에 남을 죄인이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박제가가 유배생활을 끝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한다. 팔을 걷어 올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할텐데 조선은 대체 어디 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르겠다.
21세기 사는 우리가 너무 국뽕에 젖으면 안되는 것임. 19세기 조선 통신사 선비들도 알던건데.....
반일이나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올바른 역사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배워야하고 잘못된건 버리고
잘된건 받아들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