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26 21:04
[일본] 아사히 신문,패전기념일을 종전이라 부르는 이유,국화와 칼에서 본 일본인의 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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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의 저자 베네딕트는 “구미(歐美)에서는 죄(罪)의 내면적인 자각에 따라 선행(善行)이 행해지지만 일본에서는 수치(羞恥)라는 외면적인 강제력에 의해 선행이 행해진다”고 하였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이 타율적인 행동양식에 철저하다고 하였으나 타자(他者)와 대비되는 자기의 내면적인 규율이 상실되면 타율적인 행동은 모방과 위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일본인은 자기의 정직 보다 타자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패전은 부끄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인의 사회적가치관은 부끄러움이 타자(他者)와의 상호관계를 불리하게 한다는 인식으로 보편화되어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요체(要諦)를 이루는 것은 국가와 자기와의 관계이다. 일본인에게는 국가는 공동체가 아니다.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상징되는 천황과의 적자(赤子)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봉건적(封建的)이라기보다 신화적(神話的)인 관계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수치심(羞恥心), 즉 부끄러움은 천황에 대한 불경(不敬)이자 불충(不忠)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패자(敗者)의 스테이터스를 패전(敗戰)이 아닌 종전(終戰)으로 수용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패전을 종전으로 기만(欺瞞)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이 6ㆍ25의 정전(停戰)을 전승일(戰勝日)로 기만한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한 때, 항복(降伏)의 <伏>자를 <服>자로 바꾸어 항복(降服)이라 써왔다. 개<犬>자가 그렇게도 싫었던 모양이다. 중국어도 <降伏>과 <降服>을 병용하지만 <降伏>을 주로 사용한다. 설문(說文)에는 <伏>자를 “개(犬)가 엎드려 사람의 의향을 묻는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항복(降伏)을 승리자 앞에 개(犬)처럼 엎드려 애걸하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 같다.
일본은 민주주의 개념에 흥미도 없었다
에드윈 라이샤.워는 일본인의 정치적 전통(政治的傳統)에는 개념으로서나 관행으로서나 민주주의와 관련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했다. 라이샤.워(Edwin Oldfather Reischauer)는 선교사의 아들로 토쿄(東京)에서 출생하여 하버드 교수로 재임한 뒤 한일회담이 고비에서 타결로 달리고 있던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대사를 역임한 대표적인 지일파(知日派)학자다. 그의 대저(大著) ‘일본인(The Japanese)’은 일본인 부인(松方ハル)의 내조도 있었겠지만 대단한 저술이다. 라이샤.워는 일본의 민주주의 전통에 관한 설명으로 19세기 중엽의 일본인은 민주적인 제도를 창출해 보겠다는 의욕조차 없었고, 20세기 신흥국 같지 않게 민주주의 개념에 흥미조차 가지지 안했을 뿐 아니라 민주적 제도를 만들어 보려는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긴급했던 것은 하루라도 빠르게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 이었다”고 설명했다. 1871년 12월 23일부터 73년 9월 13일까지 약 2년간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시찰한 이와쿠라ㆍ견외사절(岩倉遣外使節)의 시찰보고서를 보면 라이샤.워 교수의 지적을 실감하게 된다. 정치적 이념의 발전이나 민주적 제도의 실태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설립된 천황(天皇)의 새 정부를 강(强)하고 부(富)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데 열중했다. 프랑스혁명(1789년) 이후에 대두된 인권사상이나 미국과 영국의 민주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하고 부한 나라의 외모에 정신을 팔았을 뿐, 유럽을 부흥시키고 미국을 강대하게 만들고 있는 원동력이 민주주의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사절단 보다 40년 먼저 1831년 미국의 형무소제도시찰을 위해 뉴욕에 도착한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라는 불후(不朽)의 명저를 남겼다. 도크빌은 그 책머리 첫 줄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다. 내가 미국 체재 중에 주목한 새로운 것들 가운데 지위의 평등만큼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없었다. 지위의 평등이라는 기본적 사실이 사회발전과정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일본은 타력 민주화, 한국은 자력 민주화
일본의 시찰단은 비엔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구경하고 “프랑스혁명 이후 국가가 입헌체(立憲體)로 변했으며 유럽문화의 정화(精華)로 이루어진 공예(工藝)가 국가의 이원(利源)이 되고 있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사절단의 안목은 입헌군주제의 실태와 국가의 재원이 된다는 공예품의 실태를 관찰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명치국가의 기초가 되어 제국주의로 달려가는 군국주의 국가의 모델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사절단의 수뇌들은 조선침략에 두뇌를 모아 정한론(征韓論)을 제창하며 운양호(雲揚號)사건을 꾸몄다. 이후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유례없이 견고한 독제체제를 이어갔다. 맥아더의 통치로 비로소 민주주의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항복이 없었으면 우리의 해방도 요원했겠지만 일본의 민주화도 요원했을 것이다. 우리와 일본은 민주주의 출발점이 동일하다. 일본은 미국의 점령통치에서 타력으로 민주주의를 습득했지만 한국은 자력으로 사상유례 없는 공산당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화를 성취했다. 일본이 타력이라면 우리는 자력이었다. 일본이 지식으로 배웠다면 우리는 실제로 배웠다. 일본이 평화적성취라면 우리는 전투적성취를 이루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아베(安倍晋三)총리에 이르러 민주주의 교습시대를 비판하며 그 시대를 탈출하자는 ‘레짐첸지’를 들고 나섰다. 이 모두가 항복(降伏)을 부인하고 패전(敗戰)을 종전(終戰)이라고 기만한 것이 원점이다. 한일문제와 동(東)아시아의 지역갈등도 그것이 원인이다. 일본의 군국화경향에 세계가 우려하게 된 것도 그 기만이 원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석간(夕刊)에 게재된 “명예로운 패배, 씻을 수 없는 수치(恥)와 함께”라는 개인칼럼(池澤夏樹)을 읽었다. 40만부의 베스트셀러라는 어떤 서책을 인용하며 “일본인은 패전(敗戰)은 없던 것으로 하고 종전(終戰)만으로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강한 미국에는 그저 일념으로 복종하고 중국과 한국에는 강기(强氣)로 밀어붙였다. 그 자세를 경제력(經濟力)으로 지탱해 왔다. 경제력의 지탱을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 겨우 사태를 직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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