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낙랑군의 한나라 문물에 대하여
"중국의 정사 문구, 저명한 중국 사가들의 주석, 평양 방면의 왕광 묘에서 출토된 낙랑태수 인장, 낙랑군 인구 조사 목간, 2000여 기가 넘는 낙랑고분 등으로 보아, 전한이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설치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심히 문제가 있다.
1)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 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전한이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2)또 낙랑군 목간은 이동이 가능한 것이므로, 평양 방면에서 낙랑군 목간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낙랑군이 전한 때부터 서북한에 설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약하자면 '낙랑군 유물이 무역이나 교류를 통해 평양에 온 것이다. 다른 곳의 낙랑군 유물을 교류로 얻었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그런 유물들이 평양에 있다고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견이다.
2.낙랑국이라는 입장
고대 중국에서 각지에 번군을 세운 적은 많아도 그 번군의 수장을 '왕'이라 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낙랑군 태수들 가운데 최리라는 이름의 사람도 없었으니, 낙랑군이 아닌 다른 나라로 봐야 한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신채호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게 본 잘못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상고사에는 '평양 부근을 낙랑이라 불렀으며, 서한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진번, 임둔, 낙랑, 현토 등의 지역을 공격하고 병합하여 그 자리에 각각 진번군, 임둔군, 낙랑군, 현토군을 만들 계획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하지만 각 지역을 병탄하기 위한 병사들은 모두 동명왕에게 패퇴해 결국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진 못하고 번조선이 있던 자리에 지리멸렬하게 현토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세워 자기만족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3.낙랑국 유적,유물의 조작 가능성: 낙랑의 대표적인 유적,유물이 대부분 조작되었다는 의견
a)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 점제는 당시 낙랑군에 소속된 25개 현(縣) 가운데 하나이다.그런데, 비석에 적힌 글자에 비해 탁본이 너무 선명하고, 또 변조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b)영광 3년명 동종(銅鍾) : 악기 종(鐘, 오른 쪽이 아이 동 童)이 아니라 술잔 종(鍾, 오른쪽이 무거울 중 重)을 쓴다. 기원전 41년의 유물로 효문제의 군국묘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효문제묘동종', '효문묘동종'이라고도 한다. 사진마다 모양이 다르고, 또한 관동대지진 때 유실되어 현재 다시 확인할 길이 없다.
c)낙랑군 봉니 : 죽간 혹은 목간을 묶고 봉할 때 썼던 흙에 도장이 찍혀 굳은 것으로, 현재 약 200여 개 가량이 발굴되었다. 상당수 조작된 유물이 발견되었고, 낙랑대윤장이라는 낙인도 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낙랑이 낙선으로 명칭이 바뀐 신나라 때는, 태수가 아니라 윤장이라 불리었으므로, 낙선대윤장이라 되어야 하나, 실재는 낙랑 대윤장이라 적힘)
d)대방군 장무이묘: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나, 그것을 왜곡하여 한나라 양식의 무덤이라 주장함. 즉, 평양일대 한나라 양식이라는 무덤의 존재도 재검토가 필요함
고구려식 무덤 양식 ---장무이 무덤과 동일하다, 평양일대 한나라 무덤 재조사 필요
e)낙랑치소: 대동강면 토성에서, 일부 한나라 양식의 와당을 발견했지만, 양각(양의 뿔)모양의 그 와당은 한무제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낙랑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슴
조작의 대가 세키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