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남군에 예관이 설치되었다는 기사가 분명히 있기에 낙랑군에 예관이 있었슴을 반론할 여지는 없습니다. 다만, 예관의 설치가 극히 예외적인 사항이고, 여남군의 예관사례를 볼 때, 여타 지역에서 에관이라는 관청의 존재가 더 확인되면 확실하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관이 태수의 산하에 있었다는 것은, 특수하게 낙랑지역에 대한 한나라의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다른 의견으로는 예관의 수막새에 대해서는, 낙랑국 최리의 유산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기는 합니다.
다음은 예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낙랑 토성 유적에서 발견된 "낙랑 예관(禮官)" 와당이다. 이는 낙랑 토성 내에 '예관' 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이다. 예관은 의전과 제사, 학문 진흥 등의 역할을 했는데, 군삼로와 마찬가지로 지방에 예관이 있었던 사례는 극히 찾기 힘들다. 지방 관청에서 예관은 꼭 있어야 하는 기관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후한서 하창(何敞)전에 나오는 여남군 예관의 사례가 유일하다. 물론 이것을 두고 지방의 예관이 딱 그것 하나만 있었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낙랑군처럼 예관이 있었지만 편찬 사서에 굳이 기재되지 않아 후세에 그 존재가 망실된 지방의 예관은 아마도 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발굴 성과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