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금사에서 신라계 황제 어쩌고도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지역적 관점에서도 금사는 발해와 큰 연관성을 당연히 가집니다.>
발해 멸망 후에도 엄연히 흑룡강 일대 발해의 중심 수도인 상경용천부는
저 위에 첫 지도처럼 동란국으로 이름만 바뀌어 있었고 반란이 거세지자 요
양일대로 대대적 발해인들의 이주도 있었지만 (이들 발해유민은 거란인으로
변칭되어 고려와 내왕을 함) 1115년 금나라가 건국되기 전까지 이 일대에는
후발해(後渤海)라는 줄곧 발해의 한지역에 엄연한 100여년을 지속한 후신
왕조가 있었습니다.(정안국도 그렇고)
와다세이(和田淸)같은 학자는 존속기간을 10여년으로 보았지만 히노가이사
부로(日野開三郞)은 그 시점을 1007년(遼 統和25年) 경으로 박시형은 1114
년 경으로 보고 있음. 즉 금건국 직전까지도 흑수말갈을 주변 반독립세력으
로 거닐고 있던 올야(兀惹)성의 후발해 세력이 건재했다는 말입니다. 이들
은 실제 유민으로 불려서도 안되는 엄연히 국호를 가지고 사신 왕래를 하든
발해 후예의 나라임.(宋나라에 발해(渤海) 사신이 등장) 이렇게 보는 이유는
히노가이사부로는 후발해의 멸망을 오소경(烏昭慶(烏昭度))이
요나라 統和22년(1004)에 여진에게 붙들려 거란에 바쳐진 사건을 근거로 후
발해가 멸망했다고 보았고 박시형은 오사성발해국 즉 후발해(烏舍城渤海國
(後渤海))의 멸망을 올야가 여진에 귀속하는 1114년 때로 보고 있는 연구를
낸바 있습니다. (이런 동만주일대의 소위 생여진으로 불리면서
발해 후국들과 변방민들의 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거란은 당시 연운 16주 관리에 신경을 세우면서 송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발해인들은 반독립적 혹은 엄연한 왕조국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임)
이게 뭘 말하냐 하면 아래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 발해의 중축 건국 세력은
우리 한민족의 중심 세력인 즉 고구려민화된 부여(속말말갈)과 백산말갈등
이 주축이 되어 고구려 옛영토를 수복(收復)하면서 지배 피지배 대다수가
고구려민이 였던 상황이였고 이후에 등장하는 여진족 역시도 사료를 보면
여진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쓰여지던 시기는 발해의 힘이 약화되고
거란이 강해지던 903년 경부터로 일부에 한정적으로 불리던 것이
요사(遼史)와 구오대사(舊五代史)등의 사료에서 확인가능 합니다.
이러다 발해가 망하면서 요의 통치를 받던 발해유민들은
거란인 혹은 숙여진(熟女眞)으로 요의 통치를 받지 않는 후발해나
정안국같은 엄연한 발해 후신 국가와 변경민들이 다 생여진 즉 여진족으로
변칭,범칭 되어져 나오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죠(즉 실제 여진족이란 대
다수 발해민+ 발해시대와 멸망 이후 후국인 후발해에서 관리되고 있던 반독
립적 소수 완안여진이 실체라는 사실임)
이런 전체적 사항을 보면 여진족이란
발해의 대도인 상경용천부 즉 흑룡강 일대에 후신으로 등장한 100여년의 후
발해 올야성을 중심으로 엄연히 왕조사가 지속되고 있었고 그 변경에 반독
립적 신라계가 들어가서 생겨난 완안부족의 여진족들이 발해가 약화되는 시
기에 일부에서 한정되어 불리다 발해가 망하면서 따로 새로운 종족들로 대
체된게 전혀 아니라 거란의 통치 아래 있던 발해민은 거란인이나 숙여진으
로 따로 독립된 발해 후신 후발해나 정안국 및 변경 완안부등은 생여진으로
이름만 변칭되어 광범위하게 범칭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그러다 상경용천부 일대 후발해 올야성의 힘이 약화되면서 완안부가 회유
나 요의 알력을 이용해서 본격적 생여진 즉 상당수의 발해민들을 통합하면
서 급격히 불어나게 됩니다.(그리고 이들 올야성의 발해민들은
금황실에서 가장 큰 견제 세력이 됨)
이런 가운데 나오는 말이 발해와 여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기록중 하나로 여진발해본동일가라는 말이 나왔던 시기의 전황임.
「女直、渤海本同一家,我興師伐罪,不濫及無辜也。」
-금사(金史)
..여진과 발해는 본시 동일(同一)한 집안이니, ..
위의 ‘女直渤海本同一家’ 기록을 단순히 정치적 목적에서 보는데 이 말에는
상당한 역사적 여러 관련성과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여진이 발해의 피지배층 유예이자 발해유민이었던 사람들이었다는 한
증거 자료임. 다시 말하면 발해와 여진을 本同一家로 보는 위의 기록은 여진
족이란 앞서도 계속해서 말한 발해(渤海)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복합민족
적 성격의 종족명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에게서도 알겠지만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의 후손을 자칭하지 않았다는 것임. 즉 이들에게서
만약 말갈이 한집안인 일가(一家)의 기준이었다면 여진발해본동일가(女直
渤海本同一家)가 이나라 여진말갈본동일가 (女直靺鞨本同一家)라고 말해서
야 옳겠죠.
그리고 첫지도에서 확인되는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 역시 발해유민이 세운
국가로 고려사를 보면 서여진(西女眞)으로 지칭되어 나옵니다.
정안국이 멸망하는 시점이 10세기 말엽인 바로 그 이후의 이런 여진족도
다름 아닌 발해유민의 이칭(異稱)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