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역사연구의 최종 목적지는 고조선입니다.
'고조선 - 발조선/부여 - 위만조선' 의 시대에 대하여 그동안 게시글이나 댓글로 구상적 견해를 나름대로 표해왔는데요 제 역사연구의 최종 목표는 이 구상적 견해, 즉 제 가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부여는 하가점상층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하가점 상층 문화는 대략 기원전 10세기부터 5세기, 또는 4세기 초까지를 가리킵니다 하가점 상층 문화의 특징은 후대로 갈 수록 흉노 및 중원계 물질문화와 섞이는 양상을 띤다는 것입니다.
부여 문화의 특징이 흉노적 성격을 어느 정도 띤다는 것인데요 저는 이 부여가 하가점 상층 말기의 동호라 지칭되는 세력, 또는 그 이전의 세력이 만주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쭝궈의 전국시대가 돌입하면서 고조선의 동쪽 지역인 발조선은 현 로합하를 경계로 하여 그 남쪽은 전국계, 그 북쪽은 흉노계와의 교류, 또는 유입이 있었고 이것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분리되는 데에까지 나아간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부여가 만주 송화강으로 이동하여 기존에 그곳에 터주하여 있던 진한(진조선)을 밀어내고 그 땅을 차지하면서 진한은 남쪽으로 밀려 현 제2송화강 서쪽, 동요하 남쪽, 혼하, 태자하 유역에 자리를 잡고 또 일부는 동만주로 흩어지게 되었고
발조선 지역에서 위만이 역성혁명을 하면서 위만조선의 세력이 팽창, 현 요심지역의 진한을 압박하였고 결국 위만조선에 땅을 빼앗기고 동요하 방면으로 위축되어 갈등을 겪다가 서기전 128년 진한의 통치자인 예군 남려가 전한에 투항하는 사태로까지 발전
남려의 투항은 전한과 진한 사이에 위만조선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는 어려웠으므로 남려가 전한 세력을 이용하여 위만조선을 압박하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결국 위만조선이 진한의 땅을 차지하고 다시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진한의 제2터전이었던 요심 지역, 즉 낙랑지역에 낙랑군이 설치
이 시기와 낙랑군 위축 시기 사이에 이곳에서 서북한 지역으로 이주한 진한, 즉 낙랑인들이 낙랑국을 건국하였고 그 전, 또는 동시기에 남만주~동만주~동북한 루트를 따라 진한인들이 이주
이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진한유민, 신라6부는 조선유민이라는 기록으로 남게 되고
또 삼국지 동이전의 아잔(阿殘)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저는 보는 것이죠.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는 동경도 지역이 진한의 옛땅이었기에 진주라는 명칭으로 주를 건립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동북아의 기원을 전후하여 수 세기에 걸친 정세의 변화, 그리고 예왕의 추적 등을 교차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수차례, 그것도 몇 년 동안 이곳에서 표해왔던 것이죠.
# 저는 이것을 본인이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얻은 가설인 '고구려-백제 1국 2체제'설, 그리고 반도삼한과 백제의 관계에 대한 일도안사님의 '진왕체제'설과 연계하여 검토하려 하는 연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고구려-백제 1국 2체제설'을 구체화하고,
일도안사님의 '진왕'을 중심으로 반도와 열도의 관계상을 설명하는 주장을 검토하려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