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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天王=단군)은 마침내 우순(虞舜=순임금)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唐)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禹:하나라 시조)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했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단군)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辰韓)에 조근(朝覲=알현)하기를 네번씩 하였다.”(인용 끝)
중국에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성인으로 받들며 태평성세를 이룩한 모범이라고 하며 자기네 조산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까지 넣고 있다. 그러나 순임금은 단군왕검의 신하로 동이족이었다. 요임금은 왕위를 자의로 순임금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조선)에게 굴복하여 어쩔 수 없어 왕위를 순임금에게 넘겨준 것이다.
당시 황제헌원의 고손자인 요임금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단주가 거만하고 포악하고 항상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했다고 한다. 요임금은 단주를 남방으로 추방하여 제후로 삼았는데,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간다하자 단주가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요임금이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부자간에 전쟁을 했다는 것은 제가(齊家) 즉 집안을 다스리는 것조차 못할 정도로 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요임금은 순임금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양위했다고 하는데, 박제상의 <부도지>에는 요임금이 두 딸로 미인계를 써 순임금을 유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요임금을 성인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맏아들이 방탕하면 다른 9명의 아들 중 똑똑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도 있었으나 혈통이 전혀 다른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것은 뭔가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자의가 아니라 단군왕검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요임금의 나라와 단군왕검의 조선은 동시에 홍수피해를 입었다. 조선은 홍수를 잘 다스려 극복했으나 요임금의 당나라는 치수에 실패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과 요임금의 나라가 서로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임금이 도읍했던 곳을 평양(平陽)이라고 하는데 그 위치는 현재 산서성 중부에 있는 임분시로 그곳에는 요임금의 무덤(堯陵)까지 있다. 따라서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의 아사달은 거기서 가까운 곳에 있었단 말과 같은 것이다.
<단군세기>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B.C 2267년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속했으며,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를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 순임금)에게 그 일을 감독케 하였다. ”
여기서의 유주란 <한서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 현토군, 상곡군, 북평군, 어양군이 포함되어 있는 행정구역이다. 즉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영주는 유주와 붙어있는 지역으로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요택과 발해 일대를 말한다. 회대는 말 그대로 회수와 대산 사이에 있는 곳인데 황하남부 하남성 일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맹자는 <이루장구 하(離婁章句 下)>에서 “순임금은 제풍(諸風)에서 태어나고 부하(負荷)로 이사하시고 명조(鳴條)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중 순임금이 죽은 동이족의 땅인 명조(鳴條)를 <중국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번역)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위 명조에 대한 설명은 현재 순임금의 능이 있는 운성시 염지 부근과 같다. 맹자는 이곳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산서성 최남부인 운성 일대가 단군조선의 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설명은 <한서지리지>에서 유주를 설명한 것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하겠다. 우리는 맹자의 말에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의 강역을 추출할 수 있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