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6-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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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군사조직은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한 6정(六停)이었다. 그렇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그 기능과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군사조직을 설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앙군으로서의 9서당(九誓幢)과 지방군으로서의 10정(十停)이었다. 원래 9서당도 583년(진평왕 5)에 조직된 서당(誓幢)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미 법당(法幢)과 6정(六停)이 있었으므로 이 서당은 아마도 그들과는 성격이 다른, 소모병(召募兵)으로 구성된 군사조직이었을 것이다. 이 서당은 나중에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625년(진평왕 47)에 낭당(郎幢)이 조직되었고, 672년(문무왕 12)에 장창당(長槍幢)이 조직되었다. 이 군단들은 모두 신라인들 가운데에서 모집하여 조직된 것으로, 정규부대와는 달리 왕권과 밀착된 특수한 성격의 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낭당은 677년(문무왕 17)에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장창당은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피정복민들로써 새로운 부대를 조직해 나갔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평정된 지 1년 뒤인 672년(문무왕 12)에 백제인들로 구성된 백금서당(白衿誓幢)이 조직되었다. 신라가 책봉했던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을 왕경으로 불러들인 다음 해인 683년(신문왕 3)에는 고구려인과 고구려 지배 아래 있던 말갈인들로써 황금서당(黃衿誓幢)과 흑금서당(黑衿誓幢)을 각각 조직하였다. 보덕성(報德城)에 남아 있던 안승의 서자(庶子) 대문(大文)의 반란을 진압한 지 6년 뒤인 686년(신문왕 6)에 보덕성민(報德城民)으로써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687년(신문왕 7)에 백제의 잔민(殘民)으로 구성된 청금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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