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19년(936) 9월 지금 경북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 신검(神劍)과의 마지막 후삼국 통일전쟁에 동원된 고려군은 모두 8만7500명이다. 이 가운데 ‘유금필(庾黔弼) 등이 거느린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경기병(勁騎兵) 9500명’이 포함돼 있다(『고려사』세가 태조 19년 9월조).
궁예의 폭정에 대해 얘기할때 궁예가 비현실적인 북벌을 주장했다라고 한다.
당시 동북아의 상황은 한반도는 후삼국시대.
만주는 발해가 망하고 거란이 일어나던 시기다.
이때 북쪽으로 눈을 돌린 이가 궁예다.
그럼 이때 궁예의 판단은 정말 현실성이 없었을까?
후백제와 고려와의 전투에 유금필등이 북방기병 95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거의 1만명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정도면 당시(나말여초) 고려가 만주지역에 가진 영향력이 무시할수준이 절대 아니었다는것을 알수있다.
궁예의 북벌 구상은 우선순위 부분에서 흠을 잡을수 있을뿐이지 절대 허무맹랑한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궁예와 왕건은 북방에 대한 전략에서 정반대의 정책을 가졌었다.
궁예는 당시 떠오르던 세력인 거란에 우호적이었고,
왕건은 그 반대로 발해에 우호적이었다.
왕건은 한반도 안정된 통일을 우선으로 두고 북방은 안정적으로 발해로 가는것을 원했다는것이고,
궁예는 한반도에 더해 발해가 무너질때 북방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