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역사는 신라출신 김부식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되고, 삭제되어 그 흔적이 미미한 실정입니다.
한데 중국의 사서에는 백제가 중국에서 임명한 왕이나 후, 태수들이 나옵니다. 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흔히 남조의 역사서에만 등장한다고 해서 의미를 축소하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북조의 역사서인 위서 백제국전에도 백제의 태수나 왕의 명칭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송서 백제국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통전 백제전 등에 나오는 백제의 태수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는 주로 현지 출신의 인물로 태수를 임명했습니다.
서하태수 풍야부
대방태수 장무, 고달
낙랑태수 모유
조선태수 양무, 장새
광양태수 고달
광릉태수 양무
청하태수 회매
성양태수 왕무
그에 반해 백제가 왕이나 후로 봉한 인물은 대부분 백제왕족인 여씨와 백제 8대 대성의 귀족들입니다.
송서의 여기, 여곤
남제서의 여고, 여력
위서의 여례
남제서의 사법명, 해례곤, 목간나 등입니다.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할 때,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가 약유요동 하자, 백제가 약유요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유라는 것은 힘으로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요서에 진출한 백제는 부여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그 세력을 계속 키워 나갔던 것입니다.
이들이 훗날 이정기가 제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보탰고, 장보고가 중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흔히 신라방, 신라소의 사람들이 신라에서 건너간 신라인들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신라는 전기 신라 때에는 중국과 왕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사신을 보낸 기록도 삼국 가운데 가장 적었죠.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외교관계가 단절됩니다.
신라인들이 건너갈 틈이 없었어요. 그러다 외교관계가 회복되자마자 신라방, 신라소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는 신라인들이 건너가서 생겨난 명칭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인들을 일컫는 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