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조선 하는거 보니까 연배가 적지 않으신듯... 저도 학교 다닐때 선생님이 이씨조선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죠.(책에도 안나왔었던거 같은데) 한 10년 넘게 지나서 그게 식민사관이라고 들었어요. 근데 요즘은 세상이 워낙 빨리 바껴서 어떤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저게 알고 보니 식민사관이 아니더라 라는게 나왔을 수도 있고 식민사관이라는 말 자체가 잘 못 된거다 라는 말이 있을 수 있고 ㅋ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6월 16일(경인) 1번째기사
섬라곡국에서 소목·속향·토인을 바치다
섬라곡국(暹羅斛國) 에서 그 신하 내(乃)【내(乃)는 그 나라 관직 이름이다.】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2장 A면
【영인본】 1책 45면
【분류】 *외교-동남아(東南亞) / *무역(貿易)
태조 11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4월 23일(을사) 2번째기사
왜인에게 잡혔다 도망온 섬라곡국 사신들에게 옷을 하사하다
섬라곡국(暹羅斛國) 사자(使者) 임득장(林得章) 등 6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왔으므로, 득장(得章) 등 4인에게 각각 옷 1습씩 하사하고 종인(從人)에게도 주었다
○暹羅斛國使者林得章等六人, 爲倭所虜逃來, 賜得章等四人各衣一襲, 以及從人。
태조 11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4월 26일(무신) 1번째기사
근정전 조회에 투항해 온 왜인 나가온과 섬라곡국 사신들도 서열하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조회를 받으니, 항왜(降倭) 나가온(羅可溫)은 조반(朝班) 동8품(東八品) 반두(班頭) 조금 뒤에 서열(序列)하고, 섬라곡국(暹羅斛國) 사람은 서8품(西八品) 반두 조금 뒤에 서열하였다. 나가온에게 단자(段子) 옷 1습(襲)과 세포(細布) 옷 1습과 사모(紗帽)·은대(銀帶)·목화[靴]를 하사하고, 그 당류 12인에게도 각각 베옷 1습씩을 하사하였다.
태종 13권, 7년(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1월 17일(임신) 1번째기사
일본 단주의 사자의 소개로 회회 사람인 승려와 가족을 귀화시키다
일본(日本) 단주(丹州)의 사자(使者)가 대궐에 나와 하직하였다. 회회(回回) 사문(沙門)806) 도로(都老)가 처자(妻子)를 데리고 함께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서 살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3장 A면
【영인본】 1책 383면
【분류】 *외교-왜(倭)
○壬申/日本 丹州使詣闕辭。 有回回沙門都老, 率妻子與之偕來, 願留居, 上命給家以居之。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9월 5일(정해) 2번째기사
회회 사문 다라에게 쌀 10석을 하사하다
회회 사문(回回沙門)2247) 다라(多羅)에게 쌀 10석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양옥(良玉)을 내어 다라에게 주며 각서(刻署)2248) 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賜米十石于回回沙門多羅。 上出良玉授多羅, 令刻署以進。
세종 1권,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9월 27일(갑술) 3번째기사
종묘에 배알한 뒤에 조하하는 의식의 절차
예조에서 종묘에 배알한 뒤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유사(有司)가 인정전(仁政殿) 한가운데에 남향하여 왕좌(王座)를 배설하고, 향로(香爐) 두 개를 전 앞 기둥 밖에 놓고, 통례문(通禮門)이 협률랑(協律郞)의 자리를 전계(殿階) 위 서쪽 가까이 동향하여 설치하고, 좌우 시신(侍臣)의 자리를 동계와 서계의 남쪽에 서로 마주 대하여 서게 설치하되, 겹줄로 북쪽을 상으로 하고, 전의(典儀)의 자리는 좌우 시신의 남쪽에 설치하고, 통찬(通贊) 두 사람은 남쪽에 자리하여 조금 뒤로 물러나와 모두 서향하게 한다. 문관(文官) 1품 이하의 자리는 길 동쪽으로 북을 향하여 서쪽을 상으로 하고, 종친(宗親)과 무관(武官) 1품 이하는 서쪽에 자리를 정하여, 동쪽의 문관에 대하여 같은 등급의 두 사람씩 겹줄로 북향하여 서게 하고, 각도의 진전관(進箋官)은 각기 직품(職品)에 따라 중앙 직원 본품의 끝 자리에 서게 하고, 감찰(監察) 두 사람은 동·서반(東西班)의 뒤에 자리를 정한다.
중략..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통찬이 ‘국궁하라.’ 창하여,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그 사이에 전하는 안으로 들어간다. 풍악이 그치고, 통찬이 ‘평신하라.’ 창하면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펴고 통례문은 문무 여러 관원들을 나누어 인도하여 차례로 나간다.”
하였다.
세종 35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1월 1일(경인) 1번째기사
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고, 근정전에서 조하를 받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고,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왜인·야인(野人)과 귀화(歸化)한 회회인(回回人)과 승인(僧人)·기로(耆老)들이 모두 조하에 참예하였다. 의정부에서 안장 갖춘 말과 옷의 겉감과 안찝을 바치고, 여러 도(道)에서는 하전(賀箋)과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근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연회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