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려시대 송나라를 궁지로 몰아 넣는 세계사에서도 - 동북아의 도시 규모나 군사력의 수나 질은 근대 이전까지
세계사적으로 매우 크고 강한 수준을 유지해 왔으며 동아시아의 일부 세력이 서로 가서 세운 대형 제국들이 상당히
많은 예들을 볼수 있다- 매우 강력한 전사적 국가인 요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의 대전을 치르고 승리로 이끈 고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아가 여진정벌등 대외적 무력행사를 강행할수 있던 힘들 역시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 단지 깡으로
이루어낸 우연의 결과들이었을까.. 듣은 풍월에는 나름 강력한 군사력이나 국제사회에서 외교력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역
량은 실질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반인들이 실제 좀 더 체감할수 있는 고려의 전반적 힘을 느낄수 있는 고려의 도시
의 규모와 문화 수준의 역량을 통해서 이해 한다면 나아가 세계사의 다른 유명한 국가들과 비교해 본다면 고려
의 포스가 어떻한지를 조금이나마 더 가깝게 느껴 볼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수도를 통채로 강화도에 단기간에 옮기거나 몽골의 요구에 수많은 배를 단기간에 만들거나 거란과
의 전쟁에서 2, 30만명의 대군을 동원한다는 것들은 고려에 대한 기존학계의 인식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고려는 개경을 중심으로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이라는
대도시및 기타 중소도시를 두었습니다. 서경이라 불리는 평양은 남북국시대에 폐허가 된 도시를
고려시대에 새롭게 건설했지만 그 위세나 행정체계를 개경과 동일한 위치로 놓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상당히 번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남경의 경우 그 규모가 대봉(東), 기봉(西), 면악(北), 사리(南)를 경계로 했는데
그 면적이 조선시대 한양도성보다 훨씬 큽니다. 물론 이 구역이 모두 도시화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남경의 경계는 남경이 가지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남경이라는 도시는 고려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고,
개경과 서경처럼 궁궐을 둔 곳이었습니다. 풍수지리로 인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천도를 계획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남경의 인구를 10만명 정도로 추정하는데...만약 동경도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면 개경과 평양은 이
보다 크기 때문에 고려시대
의 도시들 중에서 10만명 이상이 되는 도시는무려 4개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아래에서도 언급이
있겠지만 근대 산업 혁명 이전의 고대의 도시에서 서구나 기타 동양에서 10만 이상의 도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임을 아래에 설명으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개경은 현종 이후 사찰이 성곽 바깥으로 건설됩니다.
이러한 것으로 당시 시가지가 나성 바깥으로 확장되어 도시가 계속해서 팽창
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평양은 고려시대에 서경이었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서경의 사찰 19개 중에서8개가 성(城) 바깥에 위치했습니다. 당시에 기록된 사찰들은 군대가 주둔하거나천자가 방문했던 곳입니다. 중요한 것들만 기록된 것이죠.
서경의 성곽내 면적은 11.85㎢입니다. 당시 사찰의 분포를 추정하면 최소한 20만은 될 수 있는 도시입니다.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도 서경을 개경이 비슷하다고 기록할만큼 대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개경은 50만의 인구를 가졌습니다. 동경과 남경도 규모가 큰 도시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시가지는 위의 지도에 보이는 성곽 내부의 점으로 표시한 부분으로실제 시가지의 크기는 파리 성곽 내부에서도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파리가 저 정도 수준으로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은 13세기입니다. 당시 파리의 성곽 내부 면적은 2.4㎢...실제 시가지가 형성된 면적은 약 1.5㎢입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 통합니다.파리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 줄어들면서 중세 초기에는 시테섬에만 국한되었다가
중세 후기로 가면서 점차 확장합니다.이러한 것은 서유럽의 공통적인 현상인데, 이것이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를 50~100만 정도라고 말하지만실제 면적 12㎢에서 시가지가 형성된 지역은 7㎢ 정도입니다.
전형적인 과장이며 100만이란 매우 상투적 표현입니다 .로마도 유럽에서 매우 독보적 큰 도시이지만 로마의 100
만도 상투적인 과장에 기인합니다. 물론 남북국 시대의 전성기 신라의 서라벌의 100만도 역시 과장된 표현이나 신
라의 서라벌이 상당한 규모인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제국의 로마인구는 20~30만,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0~15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개경과 서경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보다 큽니다.
중간이 네델란드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 17세기에 그려진 암스테르담의 지도입니다.1689년의 것이고, 네델란드의 급성장과 더불어 크게 성장한 모습의 암스테르담입니다.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입니다.고려 개경과 백제 사비성과 동일비율로 올립니다
당나라의 장안 근대 초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고대 로마
산업혁명이 있던 18세기 후반의 런던17세기 후반의 황금시대를 이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동일 비율로 올립니다.
남북국시대의 전성기 서라벌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서라벌입니다.
사찰의 분포도로 서라벌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데...이것은 실제로도 학계에서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고고학 발굴을 보면 삼국시대의 기와분포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찰의 분포보다
면적이 더 넓습니다. 서라벌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대도시였음을 알 수 있죠.
흔히 신라를 후진국처럼 인식하는데...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
실제 세계적인 기준에서 신라를 본다면 이미 삼국시대에도 최고수준의 문화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로마와 같은 비율입니다.
로마제국의 세번째로 큰 도시 '안티오키아'
고구려의 세번째로 큰 도시 '한성'동일비율입니다. 과거 고구려 인구의 보수적 축소된 시각으로(고구려인구 350만명정도) 매우 비정상적인 크기가 실제 고구려 도시 유적에서 기타와함께 나오고 있는 규모입니다. 즉 얼마나 기존의 인구 추론이 상당히 근거없고 비합리적인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지요.근대 이전의 고대 도시는 소비지향적 도시입니다. 즉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먹거리의 잉여물들이 도시 지배층에게 흘러 들어가서 소비되는 구조로 도시의 규모는 전체 인구의 10에서 최대 20퍼센트를 거의 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에 기인한 것입니다.즉 고대의 그나라의 여러 도시규모를 살펴보면 전체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수 있다는 뜻과도 같습니다.일제 식민지 이후 식민 보수적 시각의 역사관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쉬운 패턴이 인구를 근거없이 축소해 버리고 각인 시키는 방법입니다. 현대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모든 힘이 소,말 이외 인간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사회임으로 고대의 인구 규모는 그 나라의 노역, 군사력 세금등 대국이나 소국이냐를 쉽게 판가름 할수 있는 큰 잣대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고구려 오골성의 내부 사진과 지도입니다.
세번째 사진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지도입니다.
오골성은 고구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아테네는 당시 지중해의 대도시였으며, 면적은 2.15㎢입니다.
동일비율로 올립니다.
고구려 시대는 좀더 구체적으로 따로 내어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도시 크기 만으로 말할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로마는 서구 문명에서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의 동양사회에도 직간접적 많은 영향력과 훌륭한 건축물과 법률등 다
양한 문화 유산을 일구어온 역사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한국
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서구나 세계사적인 전반적 수준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도시크기를 이
른 시기 일구며 유지해 온 것을 알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