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진이 실존했던 삽살개의 기록입니다...
▶동네마다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던 삽살개는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이 땅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북방으로 진출하는 군인들의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용 군수품으로 견피(犬皮)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에서 약 50만-100만 마리로 추정되는 삽살개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포획, 도살되어 일본군의 외투와 장화 등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아끼다 견, 규슈 견, 홋가이도 견, 시코쿠 견 등 일본의 토종 견들과 유사한 외모를 갖고 있던 진돗개는 비교적 화를 면한 반면, 눈망울이 덮일 정도로 길고 부드러운 털이 복실 복실하게 덮여있고 일본 개들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조선의 온순한 토종 견 삽살개들은 무참하게 죽어갔다. 귀신과 액운을 쫓고 조선의 왕실과 가문을 지켜준다는 말에 삽살개는 더 큰 고통을 받으며, 이 땅에서 사라져 갔다.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살아남은 삽살개는 불과 50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6.25전쟁과 가난을 거치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이후 밀려 들어 온 외국 산 애완견들 사이에서 삽살개는 그 생김새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서 끝없이 사라져 갔다.
조선의 토종 견 삽살개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는 겨우 2,500마리의 삽살개들이 그 수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1960년대 초,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하성진 박사 팀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살아 남은 삽살개 30여 마리를 수집해 그의 아들 하지홍 교수(경북대) 대에 이르기까지 사재를 털어 대물림 해 온 헌신적인 보살핌과 인공 번식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칫 이 땅에서 멸종될 뻔한 위기는 넘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