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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4-24 23:22
[기타] A.D412년경 광개토호태왕시절 고구려 영토와 사료.
 글쓴이 : 애기째돌
조회 : 6,560  

1. 광개토대왕 전략.전술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가리켜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광개토대왕이 어떤 신묘한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는지? 광개토대왕이 넓힌 영토는 어디까지였는지? 광개토대왕은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등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개토대왕 특유의 통치술과 신묘(神妙)한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이 어떤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영토를 넓혔고,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살펴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A.D 386년에 태자로 된 분으로 본명은 담덕이다.

담덕이 태자로 되었을 무렵 고구려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 및 신라와 대치하고 있었고,

서쪽으로 후연(後燕)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북쪽으로 동부여와 대치하고 있었고, 동쪽으로 읍루와 대치하고 있었다. 즉 당시 고구려는

사방으로 적대국들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반면에 구태백제(仇台百濟)는 A.D 204년 10월에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

지방)에서 입국(立國)하여 A.D 205년에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였고 A.D 205-208년경에는 대마도, 일본열도 및 일부 가야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야국들을 복속시켰으며, A.D 313 - 314년경에 모용씨(慕容氏::A.D 337년에 燕이라 칭함)와 동맹을 맺고 요서(遼西)

에 진출하여 (당나라 때의) 유성군(柳城郡:조양 방면)과 북평군(北平郡:난하 서쪽 방면) 사이에 있는 (당나라 때의) 요서군 자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고, 서진(西晋)이 망하는 A.D 316년에는 양자강하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송나라 때의) 진평군

(晋平郡) 자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으며, A.D 37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平壤)을 점령하였고,

후위(後魏:北魏 A.D 386년~) 때는 중원(中原)과 중국동해안 전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국력이 아주 강성해져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군을 두었다.

(요서에 있는 군은) 지금(당나라 때)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通典 百濟傳 [註 일부 사학자는 북평을 지금의 북경 방면이라 주장하나, 통전을 지은 당나라 때의 북평군은 난하 바로 서쪽에,

유성군은 조양 방면에, 요서군은 난하에서 유성 사이에 각 있었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의 땅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

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의 땅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중국동해안 방면의) 백제의 치소는 (송나라의)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라 한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濟梁據江佐右」北史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강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위(북위) 때 중원에 자리잡았다. 自晋宋齊梁據江左後

魏宅中原」周書 百濟傳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

(王爵)을 분봉(分封)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征伐)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明治年間)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不振)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명치(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주몽)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百濟)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상해 서남 방면), 회계(會稽:강소성 소주),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

(泉州:복건성에 있는 지명)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

(百濟)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遼西), 진평(晋平)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

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郡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진평군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했다가 A.D 471년에 폐지한 군현의 이름이다.]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A.D 386년경 고구려와 그 주변국

 

2. 백제 정벌

 

고국양왕 3년(A.D 386년)에 태자가 된 담덕은 온조백제(溫祚百濟)를 공격해 보았으나 북한성(北漢城:삼국유사에는 양주로 적혀 있으나

,사학자들은 북한산 방면으로 비정한다)을 수도로 한 온조백제와 웅진(熊津:공주)을 수도로 한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기 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고국양왕 3년(A.D 386년) 봄 정월 왕자 담덕(談德)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은 군사를 내어 남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사꽃(桃) 오얏꽃(李)이 피었다. 소(牛)가 말(馬)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秋八月 王發兵南伐百濟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위에 나온 복사꽃(桃), 오얏꽃(李)은 같은 발음의 도이(島夷) 즉 왜(倭)를 군사로 사용한 구태백제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에 나온 소(牛)는 소마리(牛頭.牛首:일명 소시모리. 소의 머리를 한 농사의 신을

숭배한 송화강유역 등 요하 동쪽 농경지방 지칭)에서 이주한 구태백제를 가리키고, 말(馬)은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국된 온조백제를

가리킨다. 그리고 소(牛)가 말(馬)을 낳았다는 것은 구태백제가 부모(종주국)이고 온조백제가 자식(복속국)이라는 뜻이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붙어 있다는 뜻으로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이라는 뜻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담덕이

8월에 온조백제를 공격하였다가 10월 달에 구태백제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은 후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는 내용이다. [註 삼국사기 본기에서 도이(桃李)가 나오는 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양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문자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에,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3년조(冬十月 雷 桃李華)에,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 23년조(冬十月

桃李華), 내해이사금 8년조(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경덕왕 22년조(二十二年 八月 桃李再花)에 각 나온다. 이는 이 무렵 도이

(桃李)로 지칭되는 세력과 어떤 접촉이 있었음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으로, 도이는 상대국을 비하하여 적은 것이다. 또 도이(桃李)가

나오는 시기는 대부분 10월인데, 이는 당시 10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10월이 상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달인

10월에 도이(桃李)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군사적 접촉이 아니라 외교적 접촉으로 추정된다. 이 중 고국양왕 3년조와 문자왕 3년조에

나오는 도이는 구태백제를 가리키는데, 고국양왕 3년은 고구려가 구태백제의 후국인 온조백제를 공격할 때이고, 문자왕 3년은

고구려가 구태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빼앗으려고 꾀 할 때이다. 그리고 온조왕 3년조에 나오는 도이는 홍성 금마 마한을

가리키는데, 이때는 온조백제가 마한 북쪽에 터를 잡고 영역을 확장해 나갈 때이다. 또 파사이사금 23년조와 내해이사금 8년조에

나오는 도이는 익산 금마 마한을 각 가리키는데, 파사이사금 8년은 신라가 신라 주변국 중 가장 강국인 음집벌국, 실직곡국, 압독국을

정벌하고 급속히 세력확장을 해 나갈 때이고, 내해이사금 8년은 강원도 방면으로 세력확장을 해 나갈 때이다. 그러나 경덕왕 22년

8월조(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는 자연현상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게 된 담덕은 백제(百濟)에 대한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즉 여태까지 백제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외교실패로 서쪽 방면의 후연(後燕) 및 남쪽 방면의 백제와 모두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군사력이

서쪽과 남쪽으로 분산된 점,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인 점, 제해권(制海權)을 구태백제가 장악하고 있는 점 등을 깨닫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하였다.

-수군(水軍)을 강화하였다. 이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상륙전술을 펼치기 위해서 였다. 이 정책으로 고구려는 백제보다 월등히 강한

수군(水軍)을 보유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수군은 그 뒤 A.D 392년에 수만 명이 동원된 한강하류 방면 상륙작전과 A.D 396년에 역시

수만 명이 동원된 금강하류 방면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외교적으로 백제를 고립시켰다. 이를 위하여 담덕은 그 전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후연(後燕)에 조공(朝貢)하여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백제(百濟)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또 미해(美海)를 구태백제(仇台百濟)에 인질로 보내고 구태백제에

복속하는 신라를 위협하여 실성을 인질로 받아, 신라와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고, 신라와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註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대왕 9년(A.D 400년: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원년이 비문과 다르게 A.D 392년으로 적혀 있다.)에

고구려가 후연(後燕)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연서(燕書)에 광개토대왕과 후연이 함께 광개토왕 즉위 초년(A.D

392년)에 온조백제로부터 인질을 받았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麗王談德在位初年冬十月南伐濟數十城之入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

子一人), 고구려가 후연에 조공하기 시작한 해는 A.D 392년보다 이전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서에는 백제와 후연이 왜 적대관계로

변했는지 그 사유가 나오지 않으나, 당시 백제가 영유하고 있던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에서 백제와 후연간에 불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후연과의 불화를 놓치지 않고 후연에게 백제를 정벌한 후 백제가 영유하고 있는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을 후연이 영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하여 백제와 후연을 이간시키고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후 광개토왕 9년(400년)에 후연이 거만하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이 후연에게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을 후연이 영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요서지방의 백제장군들을 귀복시키고 그곳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또 후연의 유주자사와 태수들을 귀복시켜 후연의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담덕의 이러한 정책은 온조백제, 구태백제를 불문하고 백제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즉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백제

는 고구려와의 국경 외에 신라와의 국경에도 군사를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 군사의 신라 국경 배치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산

을 가져와 서해안(西海岸) 방면의 방위력이 약화되었으며,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 약화는 고구려 수군이 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후연과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후연 방면에 배치한 군사를 백제 방면에 집중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온조백제에 일부러 져주어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진사왕 5년(A.D 389년)가을 9월 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변을 침략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진사왕 6년(A.D 390년) 가을 9월 왕은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를 쳐 도곤성을 빼앗고 2백 명을 사로 잡으니 왕은 진가모에게

병관좌평을 제수하였다.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온조백제는 A.D 387년 9월에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였고, A.D 391년 4월에는

말갈에게 북변의 적현성을 빼앗겼다.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말갈은 고국양왕이 보낸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아니고 당시 고구려에 복속한 강원도 지방의 토착거수들이 보낸 기마부대로 추정된다. 당시 온조백제는 말갈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 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공격에 도곤성 등을 빼앗기었다. 이는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어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를 이간시키려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온조백제에 일부러 져주어 온조백제 진사왕을 극도로 교만하게 만든 다음 이간전술을 사용하여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켰다.

담덕이 일부러 져준 것도 모른 채 연이어 이긴 것에 고무되어 극도로 교만해진 온조백제 진사왕은 이번에는 담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의 도움 없이도 온조백제만으로 고구려를 상대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의 불화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열을 가져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진사왕 7년 가을 7월 서울 서쪽에 있는 큰 섬에서 사냥하면서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았다. 8월 다시 횡악(橫岳:삼각산)의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又獵橫岳之西」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당시 온조백제의 수도는 북한성이었는데,

삼국유사에는 북한성이 양주로 적혀 있으나, 사학자들은 북한산 방면으로 보고 있다.]

 

위 문구에 나오는 사냥은 같은 동족끼리 싸운 사실을 은유법으로 적을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직접

강화도로 출동하여 강화도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공격하였다는 것과, 다음달 8월에 구태백제 군사가 온조백제 진사왕을

응징하기 위하여 횡악(삼각산)의 서쪽 방면 즉 온조백제 수도의 서쪽 방면으로 출동하였을 때 진사왕이 친히 출정하여 구태백제

군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광개토대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난 온조백제 진사왕이 온조백제 서쪽 섬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점령하여 구태백제 수군을

강화도에서 쫓아버림으로써, 온조백제의 서해(西海) 방면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되었다. 이는 다음해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서해를

통하여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A.D 386년부터 A.D 392년 사이 어느 해부터 후연에 조공하면서 후연과 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광개토대왕은 A.D 392년 7월부터 백제를 공격하였다.

A.D 392년 7월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보내어 온조백제와 신라와의 접경인 구원(狗原) 방면에서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作戰)을 펼쳐

온조백제 군사가 구원 방면으로 몰림으로써 온조백제의 서해안 방면 방위가 허술해졌을 때, 수군(水軍)을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시켜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 성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었다. [註 온조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이 있기 전

도성을 북한성(양주나 북한산 방면)에서 남한성(송파구 풍납토성이나 하남시 방면)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미성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던 성으로 한강하류나 강화도, 교동도 방면에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진사왕기(辰斯王紀) 8년조에는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광개토왕 원년(392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註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원년이 A.D 392년으로 적혀 있으나, 광개토왕비문에는 A.D 391년으로 적혀 있다.]

「진사왕 8년(392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와 북변을 공격하여 석현 등 10여성을 함락하였다. 왕은 담덕(談德)이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서 항거하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왕은 구원(狗原)에서 사냥하고 열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秋七月 高句麗王

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 있었는 시기가 10월부터 11월까지로 적혀 있으나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수도와 가까운 한강하류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 10여 성을 점령하였을 때 온조백제가 전혀 항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성동격서 작전을 펼친 7월에 이미 주력부대를 이끌고 구원 방면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위 구원은 신라와의

접경 방면이나 그 위치는 불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A.D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구태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웅진(공주), 임천(부여 임천), 와산(보은), 괴구(괴산), 복사매(영동), 우술산(대덕), 진을례(금산), 노사지(유성)

등지를 점령한 후 속리산에서 제천행사를 치르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 지역인 구원은 구태백제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괴산, 수안보, 충주 방면이거나(조령을 넘어갈 경우), 단양, 제천 방면(죽령을 넘어갈 경우)으로 추정된다]

 

진사왕(辰斯王)이 광개토대왕(廣開土王)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에 쉽게 말려든 것은 청목령(靑木嶺:개성 부근)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설치한 관방(關防:방어진지)과 한강하류 방면에 있는 관미성(關彌城)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진사왕은

고구려 군사가 온조백제의 관방이 있는 전방이나, 관미성이 있는 한강하류 방면을 피하여 신라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믿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가 신라와 온조백제와의 접경 지역인 구원(狗原) 방면에서 성동격서 작전을 벌이자 그 전에 광개토대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진사왕 7년 11월에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태백제 수군(水軍)을 쫓아버림으로써 서해(西海)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져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동쪽인 구원(狗原) 방면으로 갔다가 고구려 수군(水軍)에게 서해(西海)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진 허를 찔렸다.

같은 해 10월 고구려 군사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던 관미성을 점령하자 온조백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였다. 연서(燕書)에 의하면 이때 연나라도 백제공격에 참가하였다.

 

「광개토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진사왕 8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三國史記 百濟本紀

「고구려왕 담덕은 재위 초년 10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수십성을 빼앗고, 담덕과 연나라는 백제의 태자와 왕친자 1인을 인질로

받았다. 麗王談德 在位初年 冬十月 南伐濟數十城之入 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人」燕書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해 인질을

바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왕비문에는 영락 6년에 인질을 받았다고 적혀 있는데, 연서에는 영락 1년에 인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아마 연서 내용이 맞을 것이다. 당시 온조백제는 수도 방어의 요지인 관미성이 함락당한 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는데,

고구려가 온조백제 수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 것은 온조백제가 인질을 바치고 고구려에 항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A.D 392년 전쟁에서 온조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한 것은 외교실패로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는 연나라가 적대관계로 변한 점 및

광개토대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의 공격 때 구태백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3년조에는 진사왕(辰斯王)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우회적으로 적혀 있고,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자 다음달 11월에 기각숙니 장군 등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우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이로서 온조백제는 10월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가 11월에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註 온조백제)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 등은 아화(阿花:註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 羽田矢代宿? 石川宿? 木?宿? ?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等便立阿花爲王而歸.」日本書紀

[註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온조백제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한 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이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백잔(百殘:온조백제)과 이잔(伊殘:구태백제)이 있었다고 적혀 있고, 백잔(百殘)과 왜(倭)는 (구태)백제의 보좌(補佐) 또는 신민(臣民)

이었다고 적혀 있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광개토대왕은 구태백제를 괴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괴멸시켰고, 이어서

보기병을 남진시켜 아리수(한강)를 건너 도성을 공격하여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광개토대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屬國)이어서 조공(朝貢)을 바쳐 왔는데 왜(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넜다.(주어생략:고구려가) 백잔.왜.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伊殘國)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都城:註 남한성. 진사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A.D 392년 7월 이전에 수도를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을 핍박하니 백잔왕(百殘王)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0以辛卯年倭來渡破百殘00新羅以爲臣民以(永樂)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伊殘國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

出00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00000便國城百殘王困逼獻0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殘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

誠於是取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 왜(倭)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倭)로 적혀 있다.]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

(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應神天皇)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말하였다. 아화(阿花:아신왕)가 왕이

되어 귀국(貴國)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제주도?),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直支:전지)를 천조(天朝)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註 이때 광개토대왕이 가야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海上通路) 차단과 남해

(南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광개토대왕 즉위 후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한 원인

 

A.D 392년 이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평양성을 점령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는 광개토대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 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던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이전까지는 주 전술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대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과 수군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이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을 괴멸시킨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서 대마도(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3. 임나(任那:대마도)와 이(伊:대화왜), 왜(倭:구주왜) 정벌

 

영락(永樂) 9년(A.D 399년)에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와 가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왜를 물리치고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대마도)를 점령한 후 이어서 일본열도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광개토대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영락(永樂) 9년(A.D 399년) 기해년에 백잔(百殘:註 온조백제)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倭人:註 구태백제와 응신조왜 지칭)과 더불어

화통(和通)하였다. 대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대왕께 고하되 왜인(倭人:註

응신조왜 군사)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命)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密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0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

廣開土王碑文 永樂九年條

「영락(永樂)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新羅)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병(官兵: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註 응신조왜 군사 지칭)가 가득하였다. 관병(官兵)이 이르자 왜(倭)가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00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

(註 賴戶內海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註 兵庫縣의 북부)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註 대판)를 경유하여 무장

(註 那良의 春日野)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註 북구주)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0其中官軍方至倭賊退官兵跡而越來攻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被我攻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00

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諸賊謀00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

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0000朝貢」廣開土王碑文 永樂十年條 [註 파란색 글자는 계연수님이 지은

碑文徵實로 결락자를 보충한 것임.]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倭)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

(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百濟),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所至

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 (永樂)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

(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

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근국(根國)인 구태백제(일명 南夫餘.伊國)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西.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

열도(日本列島)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4. 유주,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

삼국사기 열전(列傳)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고구려, 백제 전성시대에는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었다고 적혀 있다. 유(幽), 연(燕),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은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이

있던 곳이다. 같은 곳을 고구려와 백제가 침범하고 흔들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백제로부터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을 모두 빼앗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고구려, 백제(百濟)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참고 : 연, 제, 노, 오, 월의 위치

 

[출처:동양문화사 상권 70쪽(을유문화사)]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유주(하북성 방면) 등지를 영유한 사실이 고분벽화에 암시되어 있다. 1976년에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에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이 주목을 끄는 것은 벽화와 600여자에 달하는 묵서(墨書)

때문이다. 그 중 고분 전실 북벽 상단에 적혀 있는 묘지명(墓誌銘) 14행 154자와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광개토대왕이 후연(後燕)의 유주자사와 13군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유주(幽州:하북성 방면) 등지를 영유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묘지명(전실 북벽 상단)

 

 

1행 00郡信都(註1)彰都鄕0甘里(00군 신도 창도향 0감리 출신), 2행 釋迦文佛弟子00氏鎭(註2)仕(불제자 00씨 진은 벼술길로 나가),

3행 位建威將軍國小大兄佐將軍(건위장군 소형 대형 좌장군), 4행 龍?將軍遼東太守使持(용양장군 요동태수), 5행 節東夷校尉幽州刺

使鎭(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 벼슬을 지냈다)(註3). 6행 年七七薨焉以永樂十八年(77세로 영락 18년에 돌아가시니), 7행 太歲在戊申

十二月辛酉朔卄五日(註4)(이 해는 무신년이었다. 12월 25일<을유>에) 8행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주공이 터를 잡고), 9행 孔子擇日

武王選時歲使一(공자가 날을 잡고, 무왕이 시를 뽑은 것과 같은 아주 극진한 예절과 정성으로 장지와 날과 시를 잡아 옥구를 장지로

옮겨), 10행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잘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부귀가 7세 자손까지 미치고) 11행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자손이

벼슬길에 나가 벼슬이 나날이 올라 후왕에 이르고). 12행 造藏萬功日煞牛羊酒0米桀(많은 공을 세우게 되리라.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좋은 쌀로 술을 빚어), 13행 不可盡掃旦食鹽養一記(아침 공양에 음식, 소금, 된장이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기록하여), 14행 之後世

寓寄無絶(후세에도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註1 신도(信都)는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로 귀화하기 몇년 전까지 후연의 모용수

(慕容垂)가 기주(冀州)의 치소로 사용한 곳이다(冀州..慕容垂治信都. 宋書). 註2 주인공의 성은 지워져 알 수 없으나, 이름은 진이다.

註3 유주자사진은 유주자사가 주재한 곳으로 유주자사는 북경 방면에서 행정권과 군권을 함께 장악한 벼슬 이름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은 영락 18년 이전 가장 가까운 시기에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을 둔 나라는 후연(後燕:A.D 384~)이다. 후연은 북위(北魏)와의 싸움

에 패하여 수도 중산(中山)을 빼앗기고 모용보(慕容寶) 때 수도를 동쪽 화룡(和龍:조양)으로 옮겼고, 그뒤 즉위한 모용희(慕容熙)는

자사진도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유주자사진(幽州刺史?)은 영지(令支)에, 청주자사진(?州刺史?)은 신성(新城)에, 병주자사진

(?州刺史?)은 범성(凡城)에, 영주자사진(營州刺史?)은 숙군(宿軍)에, 기주자사진(冀州刺史?)은 비여(肥如)로 각 옮겼다. 뒤에 나오는

13군 태수들 명칭으로 보아 위 문구에 나오는 유주자사진은 북경 방면에 있을 때이다. 註4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로

붙여 읽으면 무신년 12월 25일에 죽은 것으로 해석되고, 太歲在戊申과 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로 나눠 읽으면 그 전에 죽고

12월 25일에 장례치른 것으로 해석된다.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辛酉朔卄五日乙酉은 12월 1일이 신유이고 25일이 을유라는

뜻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을 무렵 중국왕조는 위(魏)의 경초(景初) 원년(A.D 237년)에 양위(楊偉)가 완성한 경초력(景初曆)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경초력은 정월을 세수로 하고 정월 초에 입춘이 있어 정월에 봄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역법은 양력 2월 초에

입춘이 있으므로, 무신년 12월 25일은 양력으로 다음해 1월 하순경이다.]

 

-위 묘지명 문구에 의하면 피장자는 00군 신도 창도향 0감리에 태어나 건위장군, 소형, 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 벼슬을 하였고, 영락 18년에 77세로 죽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고구려의 벼슬에 자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장자는 후연(後燕)에서 유주자사 벼슬을 하다가 광개토대왕에게 귀복한 후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은 귀복한 사람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 피장자가 죽은 해는 영락 18년(A.D 408년)이므로, 피장자가 후연(後燕)에서 유주자사를 지낸 시기는 A.D 408년 이전이다.

 

무덤의 주인공 진과 전에 후연의 13군 태수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범양태수(范陽太守:북경 서남쪽 탁 방면), 어양태수(漁陽太守:북경 동북쪽

방면), 연군태수(燕郡太守:북경 방면), 상곡태수(上谷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대군내사(代郡內史:북경 서쪽 방면), 광녕태수

(廣寧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북평태수(北平太守:북경 동쪽 방면), 요서태수(遼西太守:난하 서쪽 방면), 창려태수(昌黎太守:

대릉하중류 방면), 요동태수(遼東太守:요양 방면), 현도태수(玄?太守:심양 방면),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하류 방면), 대방태수

(帶方太守:대릉하하류 방면)이다.

-고구려와 후연간에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적대관계로 변한 해는 A.D 400년이므로,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이 광개토대왕에게

귀복하므로써 고구려가 후연의 유주를 차지한 해는 A.D 400년으로 보인다.

-13군 태수들이 관할한 지역 중 난하 동쪽은 유주자사진 관할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고구려에 귀복한 후 유주자사 진을

모셨다는 것은, 광개토대왕 특유의 통치술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이 고구려로 귀복하는데 유주자사 진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이 광개토대왕에게 귀복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광개토대왕 재위시기 중 A.D 400년까지는

고구려와 후연(後燕)이 동맹세력이었는데, A.D 395년에 후연(後燕)이 남진하는 북위(北魏)에 패하므로서, 후연(後燕)의 유주는

북위(北魏)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동맹국인 후연(後燕)의 유주를 지켜주다가 A.D 400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고구려에 귀복시키고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고구려와 후연(後燕)은 A.D 400년부터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변하였다(資治通鑑 晋紀 33年條 참조). 진서지리지(晋書地理志)에는 후연(後燕) 모용보(慕容寶:

A.D396-398년)가 수도를 중산(中山)에서 용성(조양)으로 옮길 때 유주(幽州) 방면이 북위(北魏)의 영토로 변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自幽州至子廬溥?以南地入於魏), 광개토대왕에게 복속한 후연의 13군 태수들 중에 범양태수(范陽太守), 어양태수(漁陽太守),

연군태수(燕郡太守), 상곡태수(上谷太守), 대군내사(代郡內史), 북평태수(北平太守), 요서태수(遼西太守) 등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도 유주는 계속 후연의 영토로 남아 있다가 A.D 400년에 고구려의 영토로 변하였다. 광개토대왕이 전쟁없이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든 것은 귀복한 이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광개토대왕 특유의 통치술 덕분이다.

 

A.D 400년경 고구려 영역

 


5. 후연 정벌

 

광개토대왕 재위 시 고구려 주변에 있는 나라 중 국력이 가장 강한 나라는 백제와 후연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후연 중 백제를

먼저 정벌한 후 후연을 정벌하였다.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정벌한 과정을 살펴본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는 후연에 조공하여 백제와 후연을 갈라놓고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후연 정벌에 대비하여 미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A.D 392년) 9월 북으로 거란(契丹)을 쳐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흩어진 인구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九月 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 而歸」

「영락 5년은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침략을 그치지 않으므로,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실 제, 부산(註 부여 지역인 장춘

방면)을 돌아 00에 이르러 염수(註 시라무렌하 방면) 가에서 비려(註 거란 지칭)의 3 부족 6, 7백 부락을 격파하고 소와 말, 양떼

등의 노획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수레를 돌려 0평도를 거쳐 동으로 0성, 역성, 북풍의 영토를 두루 살피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碑麗不貢00躬率往討過富山00至鹽水上破其三部族六七百營牛馬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0平道東

來0城力城北豊王備獵遊觀土境田獵以還」 廣開土王碑文 永樂五年條 [註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이 거란을 정벌한 해가 A.D

392년 9월로 적혀 있으나, 광개토왕비문에는 광개토왕이 비려(碑麗)를 정벌한 해가 A.D 395년으로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 백제

정벌 사실이 A.D 392년조와 396년조에 나누어 적혀 있지 않고 A.D 396년조에 함께 적혀 있는 것과 같이 거란 정벌 사실도 A.D 392년

조와 A.D 395년조에 나누어 적혀 있지 않고 A.D 395년조에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광개토왕이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한 것은 백제 정벌이 끝난 후 후연(後燕)을 정벌하기 위한 원대한 포석이었다.]

 

그후 영락 10년(A.D 400년)에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북평에서 유성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범양태수(范陽太守:북경 서남쪽 탁 방면), 어양태수(漁陽太守:북경 동북쪽 방면), 연군태수(燕郡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상곡태수

(上谷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대군내사(代郡內史:북경 서쪽 방면), 광녕태수(廣寧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북평태수(北平太守:북경

동쪽 방면), 요서태수(遼西太守:난하 서쪽 방면), 창려태수(昌黎太守:대릉하중류 방면),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하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하류 방면)를 귀복시켜 백제의 요서분국과 후연의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므로써, 후연을 동

(고구려), 서(유주), 남(북평에서 유성 사이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 북(거란) 4방에서 포위하였다.

그 2년 후인 A.D 402년에는 후연의 요동태수(요양 방면)와 현도태수(심양 방면)를 귀복시켜 북진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길림에서

무순으로 만주 중앙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산줄기) 사이 후연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이어서 군사를 보내어 후연의 숙군

(宿軍:북진)을 점령하여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혔다.

 

「광개토왕(廣開土王) 11년(A.D 402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宿軍:註 북진 방면)을 치니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註 이때 고구려 군사는 후연의

요동태수(요양방면), 현도태수(심양방면) 관할 지역에서 후연 군사와 싸우지 아니하고 바로 숙군(북진 방면)을 공격하였고, 유주자사

고분벽화에 현도태수와 요동태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은 이 공격 전에 미리 후연의 현도태수와 요동태수를 귀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A.D 402년경 고구려 영역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힌 광개토대왕은 A.D 407년에 4방에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4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노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000000000師四方合戰斬煞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廣開土王碑文 永樂十七年條

 

후연은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이 왕이 된 북연(北燕)이 세워졌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북연왕 고운에게 고씨 성을 하사하여 북연을 고구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6. 그 외 주변국 정벌

 

북부여

모두루(牟頭婁) 묘지(墓誌)에 의하면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북부여(장춘 방면)로 진출하였다.

 

「전략. 조부 대형 염모(牟:再牟?)..중략..조부00, 대형 자0, 대형 00를 거치기까지 대대로 관직의 은혜와 물품을 하사받아 왔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 성민과 곡민을 함께 다스렸다. 전왕들의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조부의 인연에 따라

노객인 모두루와 00모에게 북부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전략. 祖大兄(再?)牟壽盡00於彼喪亡사由祖父00大兄慈0大兄000世遭官恩恩賜

祖之0(出?)道城民谷民竝領前王0育如此還至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緣祖父0爾恩敎奴客牟頭婁00牟敎遣令北夫餘守事」

 

백신, 토욕

광개토대왕은 영락 8년(A.D 398년)에 백신(연해주 방면 숙신 지칭)과 토욕(감숙성.청해성 방면 토욕혼 지칭)을 정벌하였다.

 

「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0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0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

以來朝貢0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註 백신(帛愼)과 토욕(土谷)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서천왕(西川王)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達加)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이곳은 연해주 남부 지방이다. 그러나 영락 8년

(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중부지방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방면에 있었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A.D 398년에 토욕혼과 숙신 2방면으로 군사를

보냈다. 이때 광개토대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北魏)가 후연(後燕)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

(盛樂: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平城: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幽州)를 압박하자 북위(北魏)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숙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광개토대왕의 죽음이 몇 년만 더 늦었더라면 광개토대왕은 북위마저 정벌하여 북중국을 고구려의

세력권에 넣었을 것이다.]

 

A.D 398년 토욕 및 백신 정벌

 

 

광개토대왕은 영락 20년(A.D 410년)에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영락 20년은 경술년이었다. 동부여는 옛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대군이 부여성에 도착하자 동부여 전국이 두려워 하여 복종하고 000000을 바쳤다. 대왕의 은덕이 동부여에

넓게 미치게 됨에 이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후략. 二十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000000000

王恩普0於是旋還」 廣開土王碑文 永樂二十年條

 

7. 광개토대왕의 주변국 정벌순서

 

광개토대왕의 주변국 정복순서는 고단자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아주 교묘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러한 수순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복활동을 벌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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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째돌 11-04-24 23:24
   
고대시대 요동은 우리가흔히 알고잇는 랴오허강이 아닙니다.
발해만중심에 흐르는 요수를 기준으로 요서 요동으로 나눳습니다.
악마는구라 11-04-24 23:29
   
잘 보고 갑니다.
9975 11-04-24 23:30
   
회원번역란에 왜 이 글을...
^^ 11-04-24 23:30
   
항상 느끼지만...찢어죽일 흉노후손들...신라씹선비들을 일찍이 갈아마셨어야 하는데....
연해주 11-04-24 23:40
   
연해주 일대는 이미 고구려 초기에 복속

북옥저가 다름 아닌 연해주 일대.

그리고 연해 주 위의 읍루 지역은 이후 고구려  광개토 태왕때은 완전 복속되었다가 맞겠지.
라온하제 11-04-24 23:42
   
좋은 자료 잘보았어요
shantou 11-04-25 01:50
   
좋은 자료네요 !저도 고구려,백제왕조 실록 잃어 봤는데 , 그책에 있는 자료들이 그나마 좀 객관적이고 자료 정리가 잘 돼있더라구요 ..........박영규씨가 쓴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 왕조실록 권장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고려왕조실록이 제 의견과는 좀 다른게 불만이구요,신라왕조신록은 읽다가 던져 버렸습니다.
총통 11-04-25 23:13
   
흉노,부여, 모두 같은 북방계이죠..  고구려영토는 사실 계륵입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식량
은  신라.백제가 같은 면적에서 고구려보다 2~3배 소출량이 많았죠..
고구려가 저런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비례하는 경제력이 딸려 결국 수-당에 이르는 장기전
에서 버티지못한겁니다.

원래 만주,중국북부의 유목민족들이 성공한경우는 단기간에 결판을 낼때였읍니다.  몽골,청 모두
아자 짧은시간내에 집중된힘으로 중국정복에 성공한겁니다.  만약 장기전이 되었다면 성공하지 못
했을겁니다.  저당시엔 고구려땅 3단위가  신라,백제지역땅 1단위와 맞먹을 정도로 신라.백제의
땅은 사실상 좋은땅이었던거죠..

글구 강대한 고구려의 실패에선 자만심만 배우지만 가장 약한신라의 성공에서 배울게 많다는걸알
아야죠.  고구려.백제 그렇게 강성했으면서 왜 유지를 못했을까요?  신라는 그렇게 쭉정이었으면서
성공했을까요..  역사는 바로 그런걸 알라고 배우는겁니다. 과거의 영광만 자랑하며  최면에 걸리면
발전이 없죠.
     
굿잡스 11-04-28 19:27
   
천년 사직 고구려를 그렇게 허망하게 말하는 사람은 당신 뿐임. ㅋㅋ

짱개들 고작 30여년동안 위촉오로 싸우다 망하고 하는 건 뭐잉? ㅋㅋ
          
몽상연주가 11-04-29 07:18
   
그걸 대하소설로써

엄청나게 포장한것도 대단하지 않나요 ㅎㅎ

전 삼국지 영웅들이 3백년씩살았는줄 알았네요 ㅋㅋ
하두 길게 써놔서
     
ㅇㅅㅇ 11-04-29 12:42
   
고구려가 단지 식량때문에 망했으면

그전에 벌써 망했어야지.

고구려가 뭘로 먹고살았는지 모르나보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중계무역국가였음.

이미 영양태왕 시절 요양에는 서역과

거래하는 동아시아 최대시장이 있었고

그 지방을 고구려가 계속 차지하며 막대한 무역이득을

얻어먹었다는 건 아시는가?

수나라가 그거 때문에 전쟁일으킨거지

지들이 천자의 나라라고 하는데

고구려가 지들보다 엄청한 중계무역이득을 챙기고 있으니까.

그깟 쌀 한톨이 뭐가 우스워서 ㅋㅋ

식량 부족해서 약탈경제 했다는 건 고구려 영토가 제대로 확립되기

전 초기시절에나 얘기지.

요양지방을 차지하고 나서는 얼마나 많은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ㅡ,ㅡ

거기다 전통적으로 유목민족 후예답게

다리가 짧지만 운동량이 튼실한 고구려 전통 과하마(전투용 말) 등을 수출하며 엄청난

이득을 챙겼지. 아시지? 그 시대에는 말이 제1의 가보였다는거.

장수태왕 시절 그걸 송나라와 수천마리 해상교역까지 했던 고구려임

좀 제대로 알고 써주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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