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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28 21:25
[한국사]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당국군이다
 글쓴이 : 삼바
조회 : 4,102  

진서 모용희 재기에는

卷一百二十四 載記 第二十四

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

때마침 고구려가 연군을 침범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위 내용 관련한 기존의 주장과 반론을 간단히 살펴보면

1. 주장- 연군은 조양(朝陽)의 동쪽이다. 신당서 구당서를 보면 연군(燕郡) 연군성(燕郡城)이 나오는데, 가탐도리기에 영주 동 180리에 연군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대릉하(大凌河) 하류 방면이다.

 반론-신당서 구당서에 연군 연군성이 나오지만 그 이전 시기 북위 동위 북제는 그런 군을 설치한 적이 없다. 신당서 구당서의 지명 연주(燕州) 연군(燕郡) 연군성(燕郡城)은 당나라 때 설치된 것이 명확하다.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2. 주장연군은 북경(北京) 지역의 한나라 유주 광양군(廣陽郡)이고 진나라(晉) 때는 연국(燕國)이라 했고, 북위 때는 연군(燕郡)이라 했는데, 진서 모용희 재기에는 연군(燕郡)을 고구려가 공격했다 하고 모용황 재기에는 연국(燕國)이 나온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북경지역 연군이다.

반론-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나오는데, 모용희는 후연 마지막 왕. 제위 401년- 407년으로 이 시기 북경 지역은 397년부터 북위가 장악하고 있었다. 시기도 맞지 않고 모용희 재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가 모용희 시기 후연을 공격한 것이지 북위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3. 주장연군(燕郡)은 그냥 연나라()의 군()이라는 뜻이다.

반론-한자만 보면 그런 뜻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막연히 연나라 군이라고 기록할 의도라면 연군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필요가 없이  會高句驪寇 또는 會高句驪寇燕이라고 하면 되는데 뭐 하러 연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나. 문맥상 후연의 특정 군을 지칭한 것이다.


4.주장-연군은 후연이 북경지역을 상실하고 교치한 것이다. 모용희 때도 유주자사가 영지에 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용희의 유주자사가 관할하는 지역에 연군을 교치하였다.

반론-모용성 모용희의 자사 직은 관직명 작위(爵位)에 해당하고 유주자사 관할하에 상실된 유주의 속군을 교치하지 않았다. 모용희의 자사는 유주자사 -영지(令支)/ 청주자사- 신성(新城)/ 병주자사- 범성(凡城)/ 영주자사- 숙군(宿軍)/ 기주자사-비여(肥如)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자사가 있던 지명들은 다 모용희 시기 또는 그 이전부터 모용희 영역 안에 있던 지명이다. 상실된 주(州)의 지명으로 해당 자사가 있지만 상실된 주의 속군을 교치한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 그 이전 자사들도 마찬가지, 게다가 작위에서도 하간왕(河間王) 장락왕(長樂王) 고양왕(高陽王) 등이 보이지만 하간군 장락군 고양군 등을 모용희 영역에 교치하지 않았다.

당국군_변화.png


이런저런 주장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대략 위의 주장들이 많다.

저의 주장은 이렇다.

위서와 진서에 나오는 연국(燕國) 연군(燕郡) 후고(猴固)라는 군(郡) 명칭이 보이는데, 모두 모용선비의 당국군(唐國郡)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림으로 주장을 보면 이해하기 더 쉽다.

 

해당 사서에 연국 연군 후고는 각각 한 번씩 나온다.

연군 하나만 보고 그 성격을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유사하게 언급된 모두를 보고 판단하면 더 쉽다.

먼저 모용희 시대와 북연의 군을 알면 좋다.

10개군 체제는 후연의 모용성(慕容盛 398년~401년) 모용희(慕容熙, 401-407년) 시대에도  같다.


 북연(北燕, 407년-436년) 고운(高雲)이 건국 

북연 10군

군명

  시기

  중요 지명

 위서 지형지

  기타

 당국군(唐國郡)

 294년 수도로 삼음

 대극성(大棘城)

 요사(堯祠)

후 북위 창려군 광흥현(廣興縣)

 요순시대 요(堯)임금이 개국한 국가 이름(唐國)

또는 봉배된 지명

 성주군(成周郡)

 341년 모용황(慕容)이 용성(龍城)으로 천도

화룡성(龍城) 

용상불사(龍翔佛寺)

 북위 창려군 용성현(龍城縣)

 요순시대 동도(東都)의 이름(成周)

 기양군(冀陽郡)

 

 유성현(柳城縣)

 447년 기양군을 북위 창려군에 병합

 조양(朝陽)지역에 유성현이 나타나는 것은 북위가 447년 기양군을 북위의 창려군에 교치한 결과 

 창려군(昌黎郡)

 289년 도하현을 수도로 삼음

도하현(徒河縣)

청산(青山)

 북위의 창려군에 병합/도하현은 광흥현에 병합하고

북연의 창려군에는 북위의 요동군 설치

 북연의 창려와 북위의 창려는 다름

 낙랑군(樂浪郡)

 313년과 이전 병합

 

 조선현(朝鮮縣)-북평군 비여현에 교치

 

 대방군(帶方郡)

 313년 병합

 

 함자현(含資縣)-요서군 양락현에 교치

 

 영구군(營丘郡)

 

 

 

 

 건덕군(建徳郡)

 334년 병합

백랑(白狼) 

백랑산(白狼山)

 건덕군 광도현(廣都縣)

 백랑산과 백록산은 다른 산.

백록산은 북연의 서북에 있음(진서 모용희재기北登白鹿山,東過青嶺,南臨滄海)

수경주는 북위 광흥현 석성을 한나라 석성현으로 비정한후 백록산과 백랑산이 같은 산으로 위작.

 석성군(石城)

 

백록산사(白鹿山祠) 

백록산(白鹿山)

 건덕군 석성현(石城縣)

 건덕군에 있는 석성현 또는 석성군과 북위 창려군 광흥현에 있는 석성 구분 필요. 수경주는 북위 광흥현 석성를 한나라 석성(石成)현으로 잘못 비정.

 요서군(遼西郡)

 338년 병합

비여현(肥如縣)

양락현(陽樂縣)

대방군의 속현 함자현(含資縣)-요서군 양락현에 교치

 

모용희 시기와 북연의 시기는 10개군 체제로 파악이 되는데, 당국군 성주군은 잘 언급이 되고 있지 않으며,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을 주장하는 글에서도 언급이 없다. 당국군 성주군 존재를 안다면 저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위서 세조기에 언급된 후고부터 하나씩 보자.


후고(猴固)

魏書卷四上 世祖紀第四上 연화 원년(432) 8월 기사

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 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 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조서를 내려 평동장군 하다라는 문통(弘 북연 마지막왕 재위 430년~436년)의 대방태수 모용현을 후고(猴固)에서 공격하게 하고,무군대장군 영창왕 건은 건덕을 공격하게 하고,표지대장군 낙평왕 비는 기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의 문장을 보면 역사상 단 한번 언급된 후고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런데 후고가 군(郡)인지 현(縣)인지 성(城)인지 알 수는 없다.

같이 언급된 건덕과 기양은 둘 다 군(郡)이다.

이로 보아 후고도 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어서 건덕군 기양군 보다 결코 중요도가 덜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매우 중요한 지명이지만 피휘처럼 군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판단된다.

그러면 북연의 군 중에 북위가 다른 이름으로 기록할 군이 있는가?

있다. 당국군(唐國郡)

당국군은 요순시대 요임금이 개국했다는 기록과 봉배된 지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종주국이라는 의미도 있다. 당연히 모용선비도 이와 관련된 주장을 하는데,  진서 모용외 재기를 보면

其先有熊氏之苗裔世居北夷 그 선조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후예)로 대대로 북이(北夷) 땅에서 거주하였다.

유웅(有熊)은 신화에서 황제가 건설한 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나온다.

모용선비는 황제의 후예를 자처하였는데, 모용외 재기의 유웅씨에서도 알 수 있지만, 모용외가 만든 군에서도 당국군 성주군이 있다.

당국군(唐國郡)-요임금 건군 국가/봉배된 지역

성주군(成周郡)-요순시대 동도(東都) 이름

요사(堯祠)-요임금 제사 사당

북위의 입장에서는 모용선비의 종주국 개념이 들어간 당군군 군명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위서 지형지에서 찾아보면 당국군과 성주군만 없고 다른 군은 모두 기록되어 있다.

북연의 군은 여기 참조

猴固

唐國

위 두 지명을 보면 피휘법에 익숙한 사람이 당국이라는 인정하기 어려운 단어를 피하여 후고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생각된다.

북위의 사가의 입장에서 당국을 후고로 만든 과정을 생각해 보면

唐國---侯國---侯固---猴固


연국(燕國)

[진서] 권109 모용황(慕容皝) 재기

以勃海人爲興集縣, 河間人爲寧集縣, 廣平·魏郡人爲興平縣, 東萊·北海人爲育黎縣, 吳人爲吳縣, 悉隸燕國.

발해(勃海)(군郡의) 사람들로 흥집현(興集縣)을 세우고, 하간(河間) 사람들로 영집현(寧集縣)을 세우고, 광평(廣平)과 위군(魏郡) 사람들로 흥평현(興平縣)을 세우고 동래(東萊)와 북해(北海) 사람들로 육려현(育黎縣)을 세우고, 오(吳) 사람들로 오현(吳縣)을 세우고는 (이 현들을) 모두 연국(燕國)에 속하게 하였다.


모용황 시대에 북경 지역에 연국(燕國)이 있었는데, 모용황이 침입한 일은 있어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위 기사에 나오는 연국은 북경의 연국이 아니다.

그냥 보면 중국인의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역사 기술법이여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위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은 저 기사가 왜? 무엇을 위해 기록하였느냐를 생각해 보자. 모용외가 만든 군(당국군 성주군 건덕군 영구군) 속현은 기록된 것이 거의 없고 이 기사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다.

기사 작성 의도가 모용선비의 속현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런 기록이 남았을까?

북위의 기록을 당나라 시 차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북위의 관점은 오로지 북연의 역사를 북위의 아류로 폄하하고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흔한 중국식 기록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북위의 행정구역의 역사를 위작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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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16-10-28 21:28
   
글이 길어서 조금 짤렸네요.
원글 네이버 블로그 왕검성  http://blog.naver.com/joymug/220847934730
밥밥c 16-10-29 00:27
   
맨아래 모용황의 글에서 연국(燕國)이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용황 시대에 북경 지역에 연국(燕國)이 있었는데, 모용황이 침입한 일은 있어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위 기사에 나오는 연국은 북경의 연국이 아니다.

연국(燕國)
[진서] 권109 모용황(慕容皝) 재기
以勃海人爲興集縣, 河間人爲寧集縣, 廣平·魏郡人爲興平縣, 東萊·北海人爲育黎縣, 吳人爲吳縣, 悉隸燕國.
발해(勃海)(군郡의) 사람들로 흥집현(興集縣)을 세우고, 하간(河間) 사람들로 영집현(寧集縣)을 세우고, 광평(廣平)과 위군(魏郡) 사람들로 흥평현(興平縣)을 세우고 동래(東萊)와 북해(北海) 사람들로 육려현(育黎縣)을 세우고, 오(吳) 사람들로 오현(吳縣)을 세우고는 (이 현들을) 모두 연국(燕國)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 후한서군국지에서의 연국(燕國)은 황하이남인 하남성낙양에서 북쪽으로 200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하북성 북경이라면 3000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해야 가능한 거리죠.

 게다가 이곳이 이전의 발해군(勃海郡)에 속해있었습니다.

 즉, 발해(勃海)가 흔히말하는 오늘날의 바다는 아니죠. 

 대략 황하하류입니다.

 그리고 , 연국(國) 과 연군(郡)은 본래 같은단어라고 본문에도 적혀있습니다 .
 (딱히 고민할 거리조차 ;;;;;;;;;; )



  본문의 주장2 중에서,

2. 주장- 연군은 북경(北京) 지역의 한나라 유주 광양군(廣陽郡)이고 진나라(晉) 때는 연국(燕國)이라 했고, 북위 때는 연군(燕郡)이라 했는데, 진서 모용희 재기에는 연군(燕郡)을 고구려가 공격했다 하고 모용황 재기에는 연국(燕國)이 나온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북경지역 연군이다.

반론-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나오는데, 모용희는 후연 마지막 왕. 제위 401년- 407년으로 이 시기 북경 지역은 397년부터 북위가 장악하고 있었다. 시기도 맞지 않고 모용희 재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가 모용희 시기 후연을 공격한 것이지 북위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광양군(廣陽郡), 고제(髙帝)가 설치하여 연국(燕國)이 되었는데, 소제(昭帝) 가 이름을 군(郡)으로 바꾸었다.
안차현(安次縣), 전한(前漢)에서는 발해군(勃海郡)에 속했다.

② 광양군(廣陽郡)
廣陽郡, 髙帝置, 為燕國, 昭帝更名為郡. 世祖省并上谷, 永平八年復. 五城, 户四萬四千五百五十, 口二十八萬六百. 薊 本燕國, 刺史治.[1] 廣陽. 昌平, 故屬上谷. 軍都, 故屬上谷. 安次, 故屬勃海.
광양군(廣陽郡), 고제(髙帝)가 설치하여 연국(燕國)이 되었는데, 소제(昭帝) 가 이름을 군(郡)으로 바꾸었다. 세조(世祖) 가 상곡군(上谷郡)에 병합했는데, 영평(永平) 8년에 다시 군(郡)으로 하였다. 성은 5개이고 가구수는 4,4550이며 인구수는 28,0600명이다.
1) 계현(薊縣). 원래 연국(燕國)이며 자사(刺史)가 다스린다.[1]
2) 광양현(廣陽縣).
3) 창평현(昌平縣), 전한(前漢)에서는 상곡군(上谷郡)에 속했다.
4) 군도현(軍都縣), 전한(前漢)에서는 상곡군에 속했다.
5) 안차현(安次縣), 전한(前漢)에서는 발해군(勃海郡)에 속했다.
[1] 漢官曰雒陽東北二千里. 한관(漢官)이 말하기를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2000리라 하였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305 (후한서군국지 유주 2번 , 광양군 ,그리고 맨아래 기주 발해군)


 발해의 위치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근거는 , 기주 발해군입니다.

 낙양에서 고작 북쪽으로 1600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사실은 연국(燕國)보다도 남쪽이죠.


  기주(冀州)

① 발해군
勃海郡, 髙帝置. 雒陽北千六百里. 八城, 户十三萬二千三百八十九. 口百一十萬六千五百. 南皮. 髙城, 侯國. 重合, 侯國. 浮陽, 侯國. 東光[1] 章武. 陽信, 延光元年復. 修, 故屬信都.
발해군(勃海郡), 고제(髙帝)가 설치하였다. 락양(雒陽)에서 북쪽으로 1600리 떨어져 있다. 8개의 성이 있고 가구수는 13,2389이며 인구수는 110,6500명이다.
1) 남피현(南皮縣).
2) 고성현(髙城縣), 후국(侯國)이다.
3) 중합현(重合縣), 후국(侯國)이다.
4) 부양현(浮陽縣), 후국(侯國)이다.
5) 동광현(東光縣)[1]
6) 장무현(章武縣).
7) 양신현(陽信縣), 연광(延光) 원년에 되돌렸다.
8) 수현(修縣), 옛 신도(信都)에 속한다.
[1] 有胡蘇亭. 胡蘇河之名見爾雅. 호소정(胡蘇亭)이 있다. 호소하(胡蘇河)의 이름이 이아(爾雅)에 보인다.
밥밥c 16-10-29 00:38
   
후한서군국지 기준으로 본다면 연국은 황하이남의 낙양에서 북쪽으로 2000리 떨여져 있으며,

 고조선의 왕검성은 3260리 떨여져 있다고 적혀있기 때문에 전혀 겹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2000리 떨여져 있는 것이 마치 하북성 전체 또는 이를 넘어서 요녕성, 게다가 요녕성도 넘어서

 한반도 북부인것 처럼 설명하지만 기록에는 딸랑 2000리 입니다.( 상상력 대단한 분들이 많아요.)

 춘추필법으로 왜곡되어 절대로 믿지 못한다는 분도 많지만 , 실제 기록은 절대 그러하지도 않습니다 .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⑪ 요동속국(遼東屬國)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以為屬國都尉, 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1]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2] 房
료동속국(遼東屬國), 옛 감향(邯鄉)이며,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안제(安帝) 때에 속국(屬國)으로 도위(都尉)를 삼았으며 별도로 6개의 성을 다스린다.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1)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1]
2) 빈도현(賔徒, 빈종), 옛 요서(遼西)에 속했다.
3) 도하현(徒河), 옛 요서에 속했다.
4) 무려현(無慮),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5) 험독현(險瀆),[2]
6) 방현(房)
[1]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
[2]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밥밥c 16-10-29 01:38
   
그리고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수도를 위의 발해군 신도현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래는 '진서- 모용수 '인데 여기에서 2번째문단 6번째 줄에 신도(信都)현 분명히 적혀있습니다.

 맨위의 기주 발해군중 8번째현 신도현.

http://blog.naver.com/kyspert/110163993040  ( 정사 , 진서- 모용수 )


 이 신도현이 현재의 북한에 있는 벽화의 신도현(信都)이죠.

 그래서 유주자사 진을 모용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역사사기꾼들이 이 신도(信都)를 신도(新都)로 표기하는데 , 욕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
 

무덤의 전실 안쪽 벽 상단에서는 총 14행 154자의 무덤 주인 진(鎭)의 묵서(墨書)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무덤 주인공은 군 신도[현] 도향 감리(郡信都[縣] 都鄕 甘里) 출신의 진(鎭)이라는 사람으로, 유주자사(幽州刺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77세로 생을 마감하여 영락(永樂) 18년(408) 12월에 무덤 완성 후 영구(靈柩)를 옮겼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흥리 벽화무덤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2005. 1. 10., 솔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323&cid=42665&categoryId=42666


모용씨 일가가 요서지방, 또는 대릉하인근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단지 그(모용진)의 무덤을 고구려가 만들었던 것인데, 사실 모용씨는 요서지방출신이며

요서는 왕검성이 있던 곳입니다. 즉 , 왕검성출신이지 서로간에 요서에서 싸우던 것도 아니였죠.
     
비좀와라 16-10-29 02:49
   
현재의 북경 위치와 과거의 북경 위치는 아직 까지도 중국 동부 해안가가 계속 융기중이라 과거의 해안선과는 많이 달랐을 수 도 있다고 봅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동부 해안가의 급속한 변화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것 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요하는 황하의 지류고 황하는 남북을 가로 질러서 흐르는 강이어서 하남과 하북의 경계선이 되는 강으로 남과 북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하 만이 요동과 요서의 구분점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밑의 댓글에서 거란을 말하면서 셜단이라고 하였는데 거란은 발해에 동단국을 설치하죠. 그러니까 거란이란 말은 서단이라는 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요서는 지금의 산서지역 이고 요동은 산동지역이 아닐 까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것 이고 발해의 영토는 산동지역 까지 아니었나 하고 생각 합니다.
          
ㅓㅏ 16-10-29 15:08
   
'낙양(洛陽)' '한양(漢陽)'의 '양(陽)'은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의미로서 각각 '낙수의 북쪽' '한강의 북쪽'을 의미하는 지명이지요.
반면 '분음(汾陰)' '화음(華陰)'이라고할 때의 '음(陰)'은 산북수남(山北水南)의 의미로서 각각 '분수의 남쪽' '화산의 북쪽'을 가리킵니다.
'요양(遼陽)'은 '요하의 북쪽'을 의미하는데 현재의 '요하'가 과연 동서로 흐르는 강인가요?  현재의 '요양(遼陽)'이 과연 요하의 북쪽인가요? 
왕망이 '요양(遼陽)'을 '요음(遼陰)'으로 개명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당시 국경선인 요하의 위치에 불만을 품고 개명한 것인지는 몰라도, '요양(遼陽)'이나 '요음(遼陰)'이라는 이름 자체는 '요수(요하)'가 동서로 흐르는 강임을 나타내는 자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천착으로는, '요양(遼陽)'은 '어양(漁陽)'이고 '어양(漁陽)'의 최초위치는 산서성 남부로 보고 있습니다.
밥밥c 16-10-29 18:23
   
현재도 후한시절의 상곡군은 하북성에 있다고 설명하며, 나름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상곡군은 하남성 낙양에서 북쪽으로 3200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하는데, 연경(연국,燕國)은 고작

 2000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미 1200리나 차이나 나는데, 이 두 곳이 서로 인접한 장소라면 절대로 불가능하지요 ;;;;

 사마천사기같은 책에 나오는 '진개시절 연나라 강역이 1000리 늘었다'는 내용이 올바르다면, 이때 하북성까지

 연나라의 강역이 늘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절 대부분의 기간동안의 연경은 본래 그다지 멀지 않기에, 이렇게 적었을 것이죠.



상곡군(上谷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00리에 있다.

 ④ 상곡군(上谷郡)

上谷郡, 秦置. 雒陽東北三千二百里. 八城, 户萬三百五十二, 口五萬一千二百四. 沮陽. 潘, 永元十一年復. 甯. 廣甯. 居庸. 雊瞀. 涿鹿.[1] 下落.
상곡군(上谷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00리에 있다. 성은 8개이고, 가구수는 1,0352이며, 인구수는 5,1204명이다.

1) 저양현(沮陽縣).
2) 반현(潘縣), 영원(永元) 11년에 되돌렸다.
3) 녕현(甯縣).
4) 광녕현(廣甯縣).
5) 거용현(居庸縣).
6) 구무현(雊瞀縣).
7) 탁록현(涿鹿縣).[1]
 8) 하락현(下落縣).
삼바 16-10-29 23:15
   
밥밥c님 상곡군은 하남성 낙양에서 북쪽으로 3200리에 대하여 이 글을 참고하십시요.
서한의 거리 기록 http://blog.naver.com/joymug/220522717256
군국지의 상곡군 3200리/ 하간군 2500리/ 안평군 2000리/상당군 1500리는 서한 기준 거리입니다.
서한은 장안이 수도이고 동한은 낙양이 수도인데 거리가 950리로 나와 있으니 낙양과 함양이 천리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천리를 빼주면 동한 기준 거리가 됩니다.
상곡군 2200리/ 하간군 2500리/ 안평군 2000리/상당군 500리가 동한 기준 거리가 됩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북경 연군 2000리와 상곡군 2200리는 200리 거리에 있게 됩니다,
사서들을 다 확인하면 200리 차이 맞습니다.
     
밥밥c 16-10-30 00:39
   
일단 후한서군국지(후한서지리지)에서는 분명히 하남성 낙양에서의 거리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섬서성 서한의 경우를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산서성 태원, 안문같은 지역이나,

 하북성 북경의 경우는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지요.

 섬서성 서안이라고 해도 황하의 중부지방으로 넘어가면 되기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섬서성 장안에서 낙양으로 이동한 이후( 섬서성 장안에서 낙양까지가 약 1000리 이므로 ) '라는

 가정이 있지 않다면, 실제 거리는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이동거리 이므로 하북성 북경인근까지라면 3000리는 본래 나와야 합니다.

 한척기준 이론이 10리에 4킬로미터죠.

 실제로는 이것의 70프로는 절대로 넘지 못하구여.

 즉, 상곡군과 연군 둘다 하북성남부 또는 산서성북부 이상을 넘지 못하게 되겠죠.
          
삼바 16-10-30 01:26
   
서안에서 낙양까지가 약 1000리 가정이므로////
후한서에 장안-낙양=950리 기록이 있고 다른 사서에 장안 -함양이 50리 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함양(진나라 수도)--낙양=1000리가 됩니다. 가정 아닙니다.
또 후한서는 기록당시(남북조)까지 거리 기록을 모아서 기록한것이지 모두가 후한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거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니 정확히 자로잰 거리로 보면 안되고, 이전 시대부터 형성된 거리를 파악하셔야 합니다.
게다가 북경은 탁군 1800리 탁군에서 계현(북경서남)200리 계현에서 상곡 200리 기록 많습니다. 서한기록 상곡 3200리를 역으로 환산해서, 동한 낙양 기준 계현이 3000리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제가 제시한 링크에 가서서 다시 잘보십시요. 상당군이 1500리 거리에 있을만한 거리인가 보시면 이해가 빠를것 같습니다.
               
밥밥c 16-10-30 01:33
   
블러그 본인되시는 지요?

 예전에 그 블러그 본 적이 있습니다.
                    
삼바 16-10-30 01:37
   

제 블로그를 본적있으시다니 고맙습니다.
밥밥c 16-10-30 01:49
   
그렇다면 일단은 여기까지 하지요.

 최소한 그 블러그 저도 본적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글 쓰시면 되기 때문이죠 ^^;

 어짜피 여기서는 전부 발제글이기 때문에 계속 글이 올라오고 , 계속 글이 달립니다.

 본인이 올리셔도 되구여 ;;;;

 그런데 , 저는 최소한 신도(信都)는 제시한 것이죠 . 막무가내는 아니였죠 ;;;;
백랑수 21-02-13 22:06
   
삼바는 상곡군까지 3200 리라는 구절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군.
밥밥c 주장이 타당한데 뭔 시빈가?
그리고 뭔 쓸데없는 하간.상당군 리 수를 운운하나?
그리고 후한서 리 수 기록이 남북조 시기까지의 리 수 기록이라고?
정말 기본도 모르는 한심한 소리한다.
그리고 탁군.계현.상곡을 1800 리, 200 리, 200 리라한 기록이 많다고.
지롤한다.
많아서 뭐 어쩌라고?
또 뭐 낙양에서 계현까지 3000 리가 오류라고?
오류라 단정하는 근거가 대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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