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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01 07:55
[기타] 전쟁과 피난에 대해서...
 글쓴이 : 타샤
조회 : 1,706  

전쟁시 부산 상황이라는 글이 올라와서 적어봅니다.

자고로 학살이 이뤄진 전쟁은 흔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도 마찬가집니다.

노예로 끌려가거나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크지 않습니다.
이는 왜군이 평화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자비로와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게 일반적인 상황인겁니다.


몽골의 학살 표본인 호라이즘...
칭기즈칸의 전기를 보면 호라이즘이 대단히 오만하고 사신도 죽이고 뭐... 암튼 학살당할만 하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실제 그런것은 명분일 뿐입니다. 칭기즈칸은 이슬람 연맹국들의 첫 공격대상이 호라이즘이었고, 호라이즘의 저항에 대해서 나름 생각해 낸것이 대학살입니다.
호라이즘 점령 직후, 약한 연맹체를 공격했고 손쉽게 점령하자 그들에겐 엄청난 자비를 베풀었죠.

왜?
"저항하면 몰살하고, 항복하면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
이런 교훈을 만든겁니다. 그리하여 남은 이슬람 연맹체는 아주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그 이후 그런 학살은 존재하지 않았구요.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저항을 한 중국(송나라죠?)에서는 학살이 없었습니다.
그냥 첫빠따 였던거고 시범케이스였던 겁니다.



이런 전략을 쓴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전쟁났다고 학살 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왜군이 왜 학살하거나 함부로 노예로 끌고가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위에서도 적었지만 왜군이 자비롭거나 평화 주의자 여서는 아닙니다.
칭기즈칸처럼 원대한 야망이 있다면 모를까...
당시 왜군은 그저 조선을 점령하기만 하면 되는거였죠.
명을 치러 간다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명나라 치는게 어디 한두해로 될거라고 판단한 사람은 없었을거구요. 조선을 먼저 점령하고 조선을 교두보로 (조선의 병력까지 끌고 가서) 명나라를 칠거다 라는 좀 큰 그림을 그렸을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주요 목표는 선조의 항복을 받아 속국을 만드는겁니다.
그래야 조선인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사용하죠.



신속한 진군을 원하는 왜병에게 있어 각 고을의 저항은 크면 클수록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고을의 저항을 줄이는 방법은 어떤게 있을까요? 두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호라이즘처럼 대학살.. 둘째는 다른 이슬람 연맹체 처럼 자비...

그런데요. 조선에서 어느 한고을을 작살낸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결국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데, 한 고을을 작살낸다는것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킵니다.

왜군이 오면 죽는다... 라는 소문이 퍼지면 처음 몇개의 마을은 피난을 갈테지만, 피난가봐야 별수 없다는걸 금새 깨닫게 될겁니다. 고로 목숨걸고 지키는걸로 바뀌죠.
상대는 우릴 살려두지 않는다.. 고로 목숨 걸고 싸우는 겁니다.
살려줄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항복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최후의 일인까지 전부 죽을때까지 싸울겁니다.

군대와 민간인, 조총과 곡갱이의 싸움이겠지만, 목숨걸고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왜군의 진격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왠만하면 살려두는게 좋습니다.
심지어 어느 왜장의 말처럼, 조선의 농토에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라는걸 실행하여 그 소문이 퍼질수록 병사도 아닌 조선의 농민들은 왜군의 점령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려 두는거죠.

약탈에 대해 말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탈은 쌈에 지친 병사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나라 군대나 약탈을 허용하죠. 이례적으로 전략적인 가치에 따라 약탈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약탈을 허용합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시에도 프랑스군 전체가 모스크바를 약탈했죠. 물론 도망치면서 챙긴 문화재급 보물들은 결국 그대로 두고 나오긴 했지만, 점령 초기에 반출된 보물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반출된 문화재들도, 그들이 계획적으로 빼간게 아니라, 그저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행해진 약탈의 결과 입니다. 크게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닌거죠.


그런데, 임란 초기에는 왜군의 이런 약탈도 크게 없었습니다. 위에 전술한데로 왜군의 목표는 얼른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항을 최소화 하려는 전략이었죠.



몇년이나 계속된 전쟁이지만, 왜군의 약탈은 일본에서 제법 인기 있는 품목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의 약탈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죠. 이미 점령한 곳이기에 자신의 영지와 같다고나 할까... 오히려 자신의 영지 주민보다는 더 우대되었을것이란 것이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자신의 영지 주민은 어마어마한 전비를 대느라 등골이 휘었을거고, 점령지 조선의 주민들은 고작해야 "원래는 지주에게 소작료로 주었어야 할" 쌀을 주거나, 혹은 성(왜성)을 쌓을때 가서 건설하거나 하는게 전부였을테니까요. 그런데 왜성 쌓는일 같은 부역은 평상시에도 일반적인거라 딱히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큰 저항감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그 많은 코무덤 귀무덤과 끌려간 백성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걸까요?
이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점령하고 있을땐 그냥 평화로웠지만 퇴각하면서 끌고 가거나 죽인거다...


가까운 예로 625가 있습니다.
인민군이 들어왔다고 해서 크게 약탈이 시행된것도 아니었고,(기껏해야 도망간 부자의 집, 혹은 관공서 점령 정도) 사람들을 학살하지도 않았습니다. 뭐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인민재판으로 몇몇을 죽인경우는 있지만요.

왜 학살을 안했을까요?
이미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주민이라고 생각했을거구요.
또 전쟁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총알을 맞아줄 병사와.. 그 뒤에서 진지를 파헤칠 작업인부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고요.
(이건 이쪽도 마찬가지죠?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이 끌려갔습니다.)

이성적으로 만약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난 군대로 가서(예비군이니까) 총을 받아 싸우는게 더 안전할거다 라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누가 죽을게 뻔한 전쟁터로 나가고 싶겠습니까?
의용군이나 학도병이나 끌려나간건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겁니다.

어쨌거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은 전선으로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뒤에서 농사 짓거나(어쨌거나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진지를 구축하거나 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세가 역전됩니다.
이제껏 의용군으로 젊은이들을 끌고가서 썼지만, 전세가 역전되었으니 적군에게 끌려가서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 잠재적인 군인인 젊은이들을 죽이는게 낫습니다. 총 들기 전에 말이죠.
그리하여 학살이 시행되는겁니다. 도망가면서 죽이는 거죠.

또 약탈도 시행되구요. 실제로 장개석은 엄청난 문화재를 약탈해서 대만에 옮겨놨습니다. 옮길수 없는 건물만 빼고 다 갖고 갔다는 말도 있죠. 중국을 점령하고 있을땐 약탈할 필요가 없었지만, 쫓겨가게 되니까 약탈을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겁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납북되었습니다. 왜군에게 있어 쓸모가 있던 사람들 역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도공이죠. 도공 뿐아니라 여러가지 기술이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끌고 갔습니다.




요약하면 임진왜란 7년간 왜군 점령지의 일상은 그렇지 않은곳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겁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관청에 가면 같은 말을 하는 조선 관리를 볼 수 있느냐, 일본어를 하는 왜군 관리를 볼 수 있느냐의 차이 만 있었을거에요.
약탈이나 학살도 없거나 거의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후퇴할 가능성이 높은 말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약탈도 시행되었을거구요. 조선이나 명나라 군이 점령할지도 모르는 지역에서는 학살도 이뤄졌을겁니다. 살려두면 적(조선이나 명)을 위한 군량을 생산하거나(농사짓거나) 혹은 창들고 자신들과 싸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일본으로 데려갔을겁니다.

실제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은 노예로 살진 않았습니다. 특히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었어요. 물론 우리나라 기록물에는 노예로 기록되긴 합니다만, 봉건 일본시대에 있어서 영지 사람들은 전부 영주의 노예였으니 노예라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그냥 그곳 주민과 비슷했습니다.
그외에 서양으로(포르투칼이나 네덜란드 상인들이 들어왔으니까요) 팔려간 노예도 있는데.. 이는 도쿠카와와 토요토미의 세력쟁탈전의 결과로 보시는게 합당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에 동원된 번주와 장수들은 전부 큐슈에서 나온 자들이고 그들은 토요토미측에 속합니다. 도쿠카와계가 토요토미계를 무너뜨리고 난 후에 그들 나름데로 전리품을 챙겼을거고, 거기엔 그쪽(큐슈)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을겁니다.(전리품으로서의 조선인이겠죠.)




다시한번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전쟁에서 학살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임진왜란때도 특별한 경우가 없었으니 학살은 이뤄지지 않았을거구요. 약탈은 전쟁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라, 얼마가 심했는지는 몰라도 딱히 거론할 만큼은 아닙니다.
당시 왜군에게는 속전 속결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도 않았을거고요. 마구잡이로 약탈하지도 않았을겁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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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스 17-01-01 08:39
   
'일본은 조선 침공 전에 이미 군사편제를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이원화하여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3개의 편대로 나누어진 전투부대는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북진하여 점령지를 확대하였고, 특수부대는 후방에서 전투 병력과는 별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도서부, 금속부, 공예부, 포로부, 보물부, 축부으로 짜인 6개 특수부대는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는 것이 그 주된 임무였다.
도서부는 조선의 서적을, 공예부는 자기류를 비롯한 각종의 공예품을, 포로부는 조선의 학자 관리 및 목공, 직공, 토공 등 장인(匠人)과 노동력을 가진 젊은 남녀의 납치를, 금속부는 조선의 병기, 금속활자를,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기한 물품들을, 축부는 조선의 가축을 포획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피로인(被虜人)은 일본으로 끌려간 노예를 말한다.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규슈 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한 노예만 해도 3만 700여 명으로 기록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참전한 일본 규슈 안요지(安養寺) 주지 교낸(慶念)이 쓴 종군 일기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는 당시의 참상(慘狀)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종군승(從軍僧) 교낸은 당시 일본사람들에게 적국(赤國)이라 불리던 전라도에 속했던 진주와 하동, 전주 그리고 경상도 울산, 부산포 등 지역을 주로 다녔다.'

'일본인 승려 교낸의 기록,
지옥의 아방(阿防)이 사자(死者) 죄인을 다루는 것 같구나! 낮에 길에서 돌아다니는 젊은 조선남자는 무사들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목에 줄을 매어 노예상인에게 팔려갔다. 이들 노예들은 다시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연이어 매어 줄 끝을 말이나 소달구지 뒤에 연결하고 뒤따라가게 하였다. 이때 노예는 무거운 짐을 지거나 이고, 소달구지에는 봉래산(蓬萊山)과 같이 짐을 가득 실었다. 이들이 배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 내부 깊숙이 들어가 도착하면 소는 바로 죽여 가죽을 벗기고 잡아먹었다.'

'조선인 노예 급등, 국제 노예 값 폭락 가져와
조선인 노예는 1인당 2.4 scudo(스쿠도, 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쌀 두 가마 해당)로서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서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심지어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간 노예도 있었다. 이즈음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카를레티 신부는 일본 여행 중 단돈 1 스쿠도에 조선인 노예 5명을 샀다. 인도 고아로 데리고 갔다가 4명은 그곳에서 풀어주고 한 명만 피렌체로 데리고 갔다. 그 이름이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다. 화가 루벤스는 이 낯선 이국인을 그렸고 ‘한복을 입은 남자’라고 이름 지었다.
이 때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1인당 170 scudo인 것에 비하면 조선인 노예 값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당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 그 수는 6만으로 보고 있으며 덤핑 투매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흑인노예를 사고 팔 때는 여자는 처녀이어야 하고 젊은 남자는 거세되었다.'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日本史)>에 나오는 한국 여인의 언급 부분,
요새(要塞)에는 대략 300여개의 방이 있다. 일본 병사들로부터 겁탈을 피하기 위해 귀족 여인들 중 몇몇은 주전자와 냄비 밑에 붙어있는 숯검정으로 얼굴에 먹칠을 해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감추었다. 또 일부는 그들이 포위당했을 때 높은 하늘을 향해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족들의 자녀들은 모친의 교육에 따라 절름발이 행세를 하거나 입이 돌아간 척 했는데 마치 불구자인양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조선 여인들은 남장(男裝)을 하거나 노파(老婆)로 위장하여 자신들의 정절(貞節)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왜군에게 잡혀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수은(睡隱) 강항(姜沆 , 1567~1618)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곳(전남)에는 전선 600~700척이 수리에 걸쳐 가득 차있었고 그 배에는 조선 남녀와 왜병이 반반씩 있었다. 배마다 조선 포로들의 통곡과 절규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다.'

'남해안의 일본왜성을 축조할 때 조선 사람을 포로로 수용하여 동원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웅천왜성 축성에 동원된 조선 사람들 가운데 남녀 120명은 나중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 히라도죠(平戶城)의 코오라이마찌(高麗町)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코오라이마찌를 도오진죠(唐人町)라고 했다. 당인(唐人)은 조선인을 말하며 ‘마록야랑(馬鹿野郞)’, 즉 말과 사슴도 구별 못하는 ‘멍청한 놈’ ‘바보자식’이란 비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시 조선인 납치 매매실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일본과 마카오 관할 천주교 교구의 주재 신부였던 루이스 세르꾸에이라(Luis Cerqueira)가 1598년 9월 4일에 쓴 기록,
배가 들어오는 항구인 나가사키에 인접한 곳의 많은 일본인들은 포로를 사려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그들에게 팔기 위한 조선 사람들을 사려고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이미 잡혀 있는 지역에서 그들을 구매하는 한편 조선인들을 포획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포획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중국 배에서 이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았다.'
아름드리99 17-01-01 16:01
   
제가 볼때 글쓴 타샤님은 학살이라는 의미부터 다시 짚어봐야 할듯하네요.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학살이 아니라 의미상 민간인학살이겠죠?? 타샤님은 임진왜란때 왜군의 민간인학살이 거의 없었다는 식으로 글을 쓰셨는데 그부분을 수정드리고 싶네요.

왜군이 진격하던 1년간의 전투에서는 속도전이라 속도를 지체할 시간이 없었을거고 민간인학살이 드물었을것이다 유추해볼 수 있지만 명군이 오고 전쟁이 고착화 되면서 왜군은 조선을 거쳐 명을 쳐들어가는 처음의 계획과 달리 조선의 남쪽부근을 점령하고 버티기 전략으로 바꾸죠. 그러면서 조선에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걸 포획해 갑니다. 전쟁이 고착화됨에 따라 전쟁에 참여한 각 지방 영주들은 앞다투어 전리품 챙기는것에 혈안이 되었고 이건 역사서에 등장하는 도공을 포함한 수십만에 전쟁포로에 해당되는거죠.

그리고 그것에 반발하면 가차이없이 살육을 했고 특히나 왜군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부녀자와 아이 할 것이 없이 귀와 코를 잘라 자신들이 죽인 조선인의 쪽수를 계산해갔습니다.  그게 결국 본국으로 가면 자신들의 전쟁 중 업적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약탈하고 수많은 민간인을 노예로 데려가고 반항하면 코와 귀를 잘라 죽이는 이런 만행이 민간인학살이 아니라면.. 타샤님이 생각하는 학살은 도대체 어떤건지..

마지막으로 왜군이 점령을 용이하게 하고 자신들의 진격에 방해가 안되게 하기 위해서 민간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온건책을  했다는 의미로 글을 쓰셨는데 그렇다면 임진왜란 중 발생한 그 많은 민간군사와 심지어 승려까지 동원된 의병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났고 왜군을 상대로 격렬히 싸웠고 조선군대 못지 않은 전과도 남겼는데 타샤님 말씀처럼 왜군이 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격렬한 저항이 있었을까요?? 이건 님이 말씀하신 것과 정면으로 반목되는 부분이네요.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지 안으셨으면 하네요. 임진왜란 중 왜군은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전쟁포로를 데려가 노예로 삼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다는걸 역사적 사실들이 다 고증하고 있습니다. 그게 점령한 부산지역이었다고 다를 거라고 보시는지...
     
타샤 17-01-01 20:08
   
의병 활동 몇몇으로 격렬한 저항이라고 말하는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요?

의병활동에 대해 적자면 가장 활발한때는 구한말입니다.
구한말도 시기별로, 동학혁명 이후, 을미사변 이후, 그리고 을사조약 이후로 나뉘는데요.
을미 의병이 가장 활발했다고 하고 동학은 그 다음, 그리고 마지막이 을사 의병의 순입니다.
을사의병은 전국에 일본군이 퍼져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많이 줄었구요.

이중 을사 의병과 비교해도 임진왜란의 의병은 십분이 일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임진 의병과 을사의병의 결정적인 차이를 아세요?
임진 의병은 유림들이 중심이 되고(모두가 양반들입니다.) 을사 의병은 드디어 천민도 창을 들었다고 하죠. 유명한 의병장 신돌석(이돌석인가?)은 천민 출신입니다.

하지만 임진 의병장은 전부 양반 출신이죠. 왜... 양반 출신일까요?
전쟁이 나면 잃을게 가장 많은게 양반입니다.
그래서 의병을 거병하면서 제일먼저 한게 뭔지 아세요?
하인들(노비겠죠?)을 면천 시켜주고 그들에게 창을 쥐어 준 일입니다.

왜군이 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있었다면, 의병은 농민 위주로 일어났을겁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일반 평민을 학살하니 스스로라도 지켜야 했을테니까요.


또 동학 의병들은 초창기 고부의 몇십명에서 시작하여 몇만 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임진 의병들은 몇십명 정도가 고작이었죠. 더 늘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즉, 의병에 가담하는 농민들이 없었다는 증거죠.

조헌과 칠백의총 이라고 하죠? 7백명은 대단히 많은 사람이 몰린 경운데요.
조헌이 이끈 700명의 의병이 아닙니다.
그곳에 모인 여러 의병장이 데리고 온 의병들의 숫자고, 조헌은 그중에 한명일 뿐입니다.

평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데 왜 농민들은 의병에 가담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문은 안드시나요?
          
그노스 17-01-02 06:05
   
'평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데 왜 농민들은 의병에 가담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문은 안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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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듭니다. 그 농민들이 의병이 아니라 관군에 편입되어 관군으로서 왜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을지 모르므로 ㅋ

임진왜란 시기와 구한말 시기의 의병장들의 출신 계급을 비교 지적하시며, 임진왜란 시기의 양반들은 지킬 것이 많아서 의병에 나섰고, 별 잃을 것이 없는 농민들은 뒷짐진 듯이 말씀하시는데, 구한말 시기는 신분제가 사실상 많이 무너진 시기입니다.
신분제가 강하게 살아있던 임진왜란 시기에 일반 농민이 지도적인 의병장으로 나선다면 양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적게 받을 수 밖에 없지요.

더욱이 말씀하신 구한말 동학 운동 같은 경우는 서구나 일본 같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지 외에도 조선 내의 가진 자(?)들에 대한 반발의지도 강했으므로 임진왜란 시기의 농민들보다 이 시기 농민들의 의병 참여가 많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것을 왜 이상하다고 보시는지 의아하네요.

그리고 님의 학살의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보통 수십명 이상이 집단 살해된 것을 학살이라고 봅니다.
조선 측의 기록에도 시간이 갈수록 무능한 관에 실망한 민심 이반을 걱정하는 대목이 있고, 왜군의 기존 전략 목표가 조선인 멸종은 아니었으니 조선인을 보는 즉즉 다 죽이자는 아니었겠지만, 학살은 분명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서 인용한 증언에서 보듯이 조선인 노예 포획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 살육도 분명 학살의 범주에 들어가고, 왜군의 한성 철수시 조선 양인 남성들을 대량 살육한 것도 학살이며, 진주성에서의 포로 학살, 심지어 임진왜란 개전 이틀 만에 벌어진 동래성에서 벌어진 민간 여성들, 아기가 포함된 살육도 분명 학살입니다.
세계사에서 나오는 수십만에 이르는 양민 학살만이 학살이고, 또 왜군이 민간 여성들과 아기를 상당한 위협(?)으로 보아서 그들을 살해했다고 타샤님께서 정당화 해서 보신다면 어쩔수 없지만...

'조선판 킬링필드, 임진왜란 동래성...'
http://m.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3663

그리고 발제글에서 일반적인 학살에 대해 어떤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듯한 님의 해석에 대해 반론을 드리자면,

순치 2년에 청군은 강남의 요충지인 양주를 함락시키고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대학살극을 벌였는데 양주 민중 80만명이 살해되었습니다. 현장 증인인 왕수초도 그 학살극을 세세히 기록한 양주십일기를 남겼습니다. 7월에는 소도시 강음을 점령해서 9만 7천명을 학살하여 전체 인구 중 53인이 살아남았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위 학살의 시범 케이스가 부족해서 청군이 2달 사이에 연이어 학살극을? 아님 날조?)

20만명이 학살되었다는 일본군의 난징 학살은 중국에 대한 시범 케이스,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은 필리핀에 대한 시범 케이스, 독소 전쟁시 나치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에 대한 학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시범 케이스라고 봐야 하는지... 아님 모두 날조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평소에 타샤님께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시며 글을 올리시는지는 모르지만, 광인들의 광인 행각에 어떤 합리성을 부여하시며 '전쟁났다고 학살한 사람은 없다'는 님의 주장은 사실도 아니고 적절하지도 않네요.
평소 님의 주장에서 팩트를 무시한 오류를 자주 보지만, 이러한 주제에서의 오류는 치명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성폭행 피해자가 목숨걸고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으면 그건 성폭행이 아니다는 논리를 듣는 기분이랄까, 기분 더럽네요(...)
아름드리99 17-01-01 16:03
   
추가로 왜군이 점령한 부산지역은 당시 조선 전국에서 노획한 사람과 곡식 예술품 등을 일본으로 압송하는 창구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곳에서 조선인이 다른 지역 조선인과 차이없이 평상시처럼 생활하고 행동했다고요???
없습니다 17-01-02 01:28
   
임진왜란 초기 부산진,동래, 다대포에서 행한 학살은 조선시대 기록에 잘 나와있을뿐더러 최근의 발굴에서도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해가 발굴됨에 따라 다 증명되었는데 도대체 뭔 근거로 학살이 없었다고 확언하는 건지..
구름위하늘 17-01-02 13:42
   
타샤님의 의견은 이성적(?상상?)인 추측과 일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비교 해석으로 보임.
동의하기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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