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시 부산 상황이라는 글이 올라와서 적어봅니다.
자고로 학살이 이뤄진 전쟁은 흔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도 마찬가집니다.
노예로 끌려가거나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크지 않습니다.
이는 왜군이 평화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자비로와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게 일반적인 상황인겁니다.
몽골의 학살 표본인 호라이즘...
칭기즈칸의 전기를 보면 호라이즘이 대단히 오만하고 사신도 죽이고 뭐... 암튼 학살당할만 하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실제 그런것은 명분일 뿐입니다. 칭기즈칸은 이슬람 연맹국들의 첫 공격대상이 호라이즘이었고, 호라이즘의 저항에 대해서 나름 생각해 낸것이 대학살입니다.
호라이즘 점령 직후, 약한 연맹체를 공격했고 손쉽게 점령하자 그들에겐 엄청난 자비를 베풀었죠.
왜?
"저항하면 몰살하고, 항복하면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
이런 교훈을 만든겁니다. 그리하여 남은 이슬람 연맹체는 아주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그 이후 그런 학살은 존재하지 않았구요.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저항을 한 중국(송나라죠?)에서는 학살이 없었습니다.
그냥 첫빠따 였던거고 시범케이스였던 겁니다.
이런 전략을 쓴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전쟁났다고 학살 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왜군이 왜 학살하거나 함부로 노예로 끌고가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위에서도 적었지만 왜군이 자비롭거나 평화 주의자 여서는 아닙니다.
칭기즈칸처럼 원대한 야망이 있다면 모를까...
당시 왜군은 그저 조선을 점령하기만 하면 되는거였죠.
명을 치러 간다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명나라 치는게 어디 한두해로 될거라고 판단한 사람은 없었을거구요. 조선을 먼저 점령하고 조선을 교두보로 (조선의 병력까지 끌고 가서) 명나라를 칠거다 라는 좀 큰 그림을 그렸을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주요 목표는 선조의 항복을 받아 속국을 만드는겁니다.
그래야 조선인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사용하죠.
신속한 진군을 원하는 왜병에게 있어 각 고을의 저항은 크면 클수록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고을의 저항을 줄이는 방법은 어떤게 있을까요? 두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호라이즘처럼 대학살.. 둘째는 다른 이슬람 연맹체 처럼 자비...
그런데요. 조선에서 어느 한고을을 작살낸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결국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데, 한 고을을 작살낸다는것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킵니다.
왜군이 오면 죽는다... 라는 소문이 퍼지면 처음 몇개의 마을은 피난을 갈테지만, 피난가봐야 별수 없다는걸 금새 깨닫게 될겁니다. 고로 목숨걸고 지키는걸로 바뀌죠.
상대는 우릴 살려두지 않는다.. 고로 목숨 걸고 싸우는 겁니다.
살려줄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항복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최후의 일인까지 전부 죽을때까지 싸울겁니다.
군대와 민간인, 조총과 곡갱이의 싸움이겠지만, 목숨걸고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왜군의 진격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왠만하면 살려두는게 좋습니다.
심지어 어느 왜장의 말처럼, 조선의 농토에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라는걸 실행하여 그 소문이 퍼질수록 병사도 아닌 조선의 농민들은 왜군의 점령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려 두는거죠.
약탈에 대해 말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탈은 쌈에 지친 병사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나라 군대나 약탈을 허용하죠. 이례적으로 전략적인 가치에 따라 약탈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약탈을 허용합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시에도 프랑스군 전체가 모스크바를 약탈했죠. 물론 도망치면서 챙긴 문화재급 보물들은 결국 그대로 두고 나오긴 했지만, 점령 초기에 반출된 보물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반출된 문화재들도, 그들이 계획적으로 빼간게 아니라, 그저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행해진 약탈의 결과 입니다. 크게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닌거죠.
그런데, 임란 초기에는 왜군의 이런 약탈도 크게 없었습니다. 위에 전술한데로 왜군의 목표는 얼른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항을 최소화 하려는 전략이었죠.
몇년이나 계속된 전쟁이지만, 왜군의 약탈은 일본에서 제법 인기 있는 품목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의 약탈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죠. 이미 점령한 곳이기에 자신의 영지와 같다고나 할까... 오히려 자신의 영지 주민보다는 더 우대되었을것이란 것이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자신의 영지 주민은 어마어마한 전비를 대느라 등골이 휘었을거고, 점령지 조선의 주민들은 고작해야 "원래는 지주에게 소작료로 주었어야 할" 쌀을 주거나, 혹은 성(왜성)을 쌓을때 가서 건설하거나 하는게 전부였을테니까요. 그런데 왜성 쌓는일 같은 부역은 평상시에도 일반적인거라 딱히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큰 저항감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그 많은 코무덤 귀무덤과 끌려간 백성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걸까요?
이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점령하고 있을땐 그냥 평화로웠지만 퇴각하면서 끌고 가거나 죽인거다...
가까운 예로 625가 있습니다.
인민군이 들어왔다고 해서 크게 약탈이 시행된것도 아니었고,(기껏해야 도망간 부자의 집, 혹은 관공서 점령 정도) 사람들을 학살하지도 않았습니다. 뭐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인민재판으로 몇몇을 죽인경우는 있지만요.
왜 학살을 안했을까요?
이미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주민이라고 생각했을거구요.
또 전쟁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총알을 맞아줄 병사와.. 그 뒤에서 진지를 파헤칠 작업인부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고요.
(이건 이쪽도 마찬가지죠?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이 끌려갔습니다.)
이성적으로 만약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난 군대로 가서(예비군이니까) 총을 받아 싸우는게 더 안전할거다 라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누가 죽을게 뻔한 전쟁터로 나가고 싶겠습니까?
의용군이나 학도병이나 끌려나간건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겁니다.
어쨌거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은 전선으로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뒤에서 농사 짓거나(어쨌거나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진지를 구축하거나 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세가 역전됩니다.
이제껏 의용군으로 젊은이들을 끌고가서 썼지만, 전세가 역전되었으니 적군에게 끌려가서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 잠재적인 군인인 젊은이들을 죽이는게 낫습니다. 총 들기 전에 말이죠.
그리하여 학살이 시행되는겁니다. 도망가면서 죽이는 거죠.
또 약탈도 시행되구요. 실제로 장개석은 엄청난 문화재를 약탈해서 대만에 옮겨놨습니다. 옮길수 없는 건물만 빼고 다 갖고 갔다는 말도 있죠. 중국을 점령하고 있을땐 약탈할 필요가 없었지만, 쫓겨가게 되니까 약탈을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겁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납북되었습니다. 왜군에게 있어 쓸모가 있던 사람들 역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도공이죠. 도공 뿐아니라 여러가지 기술이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끌고 갔습니다.
요약하면 임진왜란 7년간 왜군 점령지의 일상은 그렇지 않은곳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겁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관청에 가면 같은 말을 하는 조선 관리를 볼 수 있느냐, 일본어를 하는 왜군 관리를 볼 수 있느냐의 차이 만 있었을거에요.
약탈이나 학살도 없거나 거의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후퇴할 가능성이 높은 말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약탈도 시행되었을거구요. 조선이나 명나라 군이 점령할지도 모르는 지역에서는 학살도 이뤄졌을겁니다. 살려두면 적(조선이나 명)을 위한 군량을 생산하거나(농사짓거나) 혹은 창들고 자신들과 싸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일본으로 데려갔을겁니다.
실제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은 노예로 살진 않았습니다. 특히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었어요. 물론 우리나라 기록물에는 노예로 기록되긴 합니다만, 봉건 일본시대에 있어서 영지 사람들은 전부 영주의 노예였으니 노예라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그냥 그곳 주민과 비슷했습니다.
그외에 서양으로(포르투칼이나 네덜란드 상인들이 들어왔으니까요) 팔려간 노예도 있는데.. 이는 도쿠카와와 토요토미의 세력쟁탈전의 결과로 보시는게 합당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에 동원된 번주와 장수들은 전부 큐슈에서 나온 자들이고 그들은 토요토미측에 속합니다. 도쿠카와계가 토요토미계를 무너뜨리고 난 후에 그들 나름데로 전리품을 챙겼을거고, 거기엔 그쪽(큐슈)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을겁니다.(전리품으로서의 조선인이겠죠.)
다시한번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전쟁에서 학살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임진왜란때도 특별한 경우가 없었으니 학살은 이뤄지지 않았을거구요. 약탈은 전쟁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라, 얼마가 심했는지는 몰라도 딱히 거론할 만큼은 아닙니다.
당시 왜군에게는 속전 속결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도 않았을거고요. 마구잡이로 약탈하지도 않았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