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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02 07:30
[세계사] 세계사를 바꾼 고구려의 등자 => 파르티안 화살 쏘는법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4,910  


◈8.17 방영 비정상회담에서 언급된 '등자'  

'글로벌 문화대전 다시 쓰는 세계사' 코너에서는 각 나라의 실제 역사와 영화 작품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가 들고 나온 영화는 고대 로마 시대 검투사의 복수에 대해 그린 '글래디에이터'.


알베르토는 "(영화에서)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말의 등자는 로마시대 당시에는 발명되지 않은 것"이라며 "로마 검투사의 헬멧은 7세기 영국에서 발명됐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에 나온 바티칸 광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영화 속 장면이 당시에는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혔다.  


◈ 세계사를 바꾼 고구려의 등자'에서 저자는 기마병의 발달을 크게 자극한 계기가 재갈, 안장, 등자의 발명인데 고구려에서 만든 등자는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도 다수 출토됐다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식 등자 또는 극동식 등자라는 학술용어로 불리는데 등자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는 말을 탄 용사가 앞으로 사격을 하지만 몸을 뒤로 돌리고 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말 안장 밑에 다는 발 받침인 ‘등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등자는 유럽에서 8세기경에나 보편화되었다. 등자가 있으므로 기병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자세로도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유럽에서는 파르티아사법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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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 스키타이 부족(우리나라와 관련있는 금장식 부족)과 국경이 붙어 있음
            고구려 백제와 시대적으로 비슷하게 파르티안 샷을 구사함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

 

배사(背射)법이라고도 한다.

말을 탄 기수가 이동중 몸을 뒤로 돌려

뒤에서 추격해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기술이다.

말 좀 탈줄 안다고 어설프게 따라했다간

낙마해서 저세상 가기 딱 좋은 기술이기때문에

말과 생활을 함께했던 몇 안되는

유목계 기마민족들에게만 전해진다.

 

이 기술은 고대 이란계 왕조인 파르티아(parthia) 왕조에서 먼저 나왔다 하여

파르티안 샷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파르티안 샷을 구사했던 나라들-

 

 

파르티안 샷의 원조 - 파르티아

 

 

 

로마의 천적 - 훈족

 

 

 

대륙의 지배자 - 몽골

 

 

 

한민족 최강의 나라 - 고구려

 

 

출신을 잊지않은 기마민족의 후예 - 백제

 

 

그리고...

 

 

조선까지...

조선시대에는 숭문천무 사상이 사회를 지배했던 때임에도

대대로 내려온 기마술을 무과시험에 채택함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말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를 통해

말과 한몸이 됨은 물론

전쟁터에 죽은 척하여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딸수 있는

무인들을 육성하였다.

 

파르티안 샷을 비롯한 여러 사료들과 문헌들을 통해

우리민족은 세계 기마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우수한 기마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결론짓겠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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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헤 전투
로마군이 파르티안 샷으로 개피(?) 본 전투

1. 개요[편집]

카르헤(현재 터키 남동부의 하란)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전투. 칸나이 전투토이토부르크 전투와 함께 로마 사상 최악의 패배로 손꼽히는 전투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Battle of Carrhae라고 쓰고, '카리'라고 읽는다. 고전 라틴어로 하자면, '카르하에' 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선 카레, 카라이, 카르하이, 카르헤 등 다양한 표기가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2. 전투 배경[편집]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c/Marcus_Licinius_Crassus_Louvre.jpg/225px-Marcus_Licinius_Crassus_Louvre.jpg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두상. 

기원전 1세기, 크라수스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로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점점 흔들리는 입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력으로 대중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입지를 다졌지만, 당대 로마 시민들이 가장 열광하던 군사적 업적이란 측면에서 경쟁자들에게 현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의 해적을 일소하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시 알렉산더 대왕을 의미하는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천재 장군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면서 막대한 인기와 부를 거머쥐었다.[2] 반면에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공적은, 노예 반란 자체를 쉬쉬하던 로마의 당대 분위기에서 은근슬쩍 묻히게 된다. 당시 원로원은 스페인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에겐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면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크라수스는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다.[3] 무엇보다도 오로지 정복을 통해서 성장한 정복국가 로마에서 대중들이 크라수스의 노예반란 진압보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외 정복에 더욱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크라수스는 새로운 군공(軍功)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었고, 그 목표물로 선택한 것이 동방의 떠오르는 강국 파르티아였다. 그때까지 파르티아는 로마에 특별히 적대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에서도 선제공격에 대한 반발이 심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의 군사 원정을 지지하면서 원로원의 허가가 떨어졌다.

크라수스가 군단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해 본격적인 침공 준비를 하자 깜짝 놀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로마에 전쟁 자제를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파르티아는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데다가, 강대국 로마와의 대결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결심한 크라수스와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사신의 태도 때문에 회담은 별 효과 없이 '오가는 욕설 속에 싹트는 험악한' 분위기만 조성되고 말았다. 플루타르크의 기록에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며, 파르티아 사신이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것이면 샤힌샤[4]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때문에 온것이라면 샤힌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것이다." 라는 서신을 가져와서 크라수스 앞에서 읽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좋게 말할때 침략을 중단하고 돌아가라는 것. 화가 난 크라수스는 서신을 무시한다.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6000명에 달하는 기병 지원을 약속하면서, 크라수스에게 평지 대신 파르티아 기병들이 활약하기 어려운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해 이동하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사막 지대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이는 최단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의 중심 도시 셀레우키아를 노리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것이 크라수스의 최대 오판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크라수스가 진군해 오자 파르티아 측도 대응에 착수, 국왕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 공격에 나서는 한편 장군 수레나스를 파견해 크라수스의 침공군에 대응하도록 했다. 아르메니아 본토가 공격받아 아르메니아의 기병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로마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격파한후에 곧바로 지원해주러 가겠다면서 이 문제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파르티아를 향해 진군해 들어갔다.

당시 부관이자 이후 ‘카이사르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지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거부당했고, 현지 아랍 부족장인 아리암네스의 안내에 따라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아리암네스는 과거 폼페이우스의 원정에 협력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크라수스는 그를 신뢰했지만, 아리암네스는 이미 파르티아 측의 사주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크라수스의 군대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최적 지형인 ‘사방이 뻥 뚫린 평탄한 사막지대’에서 수레나스와 조우하게 되었다. 로마군 장교 대부분은 물가에 캠프를 치고 하룻밤 쉰 다음 공격할 것을 원했으나,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는 지체하지 말고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크라수스는 아들의 주장을 따랐고, 양군의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되었다.

3. 전투[편집]

3.1. 양군의 전력[편집]

로마군은 7개 군단, 총 2만 8천~3만 5천 명 정도의 로마 군단병과 4천 명의 경보병으로 총 3~4만 명 정도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보병의 대다수는 궁병으로 추정되며, 로마 군단병들은 모두 로리카 하마타(로리카 항목 참조), 글라디우스커다란 방패를 갖춘 중장보병대였다. 기병 전력으로는 3천 명 정도 되는 아랍 및 소아시아 경기병들, 그리고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던 푸블리우스가 데려온 용맹한 갈리아 귀족 중무장 기병[5] 1천 명으로 총 4천 명[6]이 있었다.



파르티아군은 9천 명 정도의 경무장한 궁기병과 1천 명의 4미터 이상의 장창과 철퇴, 장검으로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은 전혀 없었으며, 낙타 1천 마리와 짐수레 200여 대로 구성된 화살 보급 부대가 있었다.[7]

3.2. 배치 및 진행 과정[편집]

크라수스의 의견에 따라, 로마군은 거대한 네모꼴 진형으로 배치되었다. 보병들이 바깥쪽에 줄지어 배치되고, 그 안에 보급품 수송대와 기병대가 위치했다. 이는 파르티아의 대규모 기병대에게 측면을 잡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배치였으나, 기동성의 현저한 저하를 가져왔다.

수레나스는 처음에는 카타프락토이를 이용한 공격을 시도했다. 로마군의 시야 범위에 접근한 카타프락토이들이 위장용으로 입고 있던 겉옷들을 벗어던지고[8] 번쩍이는 갑옷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정면 돌격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숫자가 1천 명 밖에 안 되는 데다 로마군이 한치의 동요도 없이 굳건하자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토이들을 뒤로 물리고 궁기병들을 내보냈다.

넓게 퍼진 궁기병들은 순식간에 로마군의 사방을 에워싸고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로마군 측의 경기병과 경보병들이 맞서 싸웠으나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군단병들이 근접 전투를 위해 전진했지만 역시 뾰족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군단병들은 큰 방패와 갑옷을 입어 화살은 잘 막아낼 수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궁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때 등 뒤로 활을 쏘면서 도망가는 파르티아 기병들 때문에 '파르티안 샷'이라는 말이 생겼다. 게다가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한 팔,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병들이 속출했다. 귀갑 진형(테스투도)을 갖추면 화살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기동성과 근접 전투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바람에 카타프락토이들의 돌격에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람들은 3만 5천 명이나 되는 로마 중무장 보병을 1천 명이나 1천 명을 약간 상회하는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어떻게 큰 타격을 줬냐고 의문을 제기 할텐데 그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군 조직은 대대, 중대, 소대로 이루어진 조직인데, 한낮의 사막의 고열에다 탈진하니까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강력한 장창 돌격 공격을 받은 소대는 우왕좌왕 했고 그것이 중대와 대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쳐서 조직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것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4미터 이상의 장창이 로마군 중무장 보병 2명을 한꺼번에 꿰뚫었다는 말도 있으며 자주 있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일격에 로마군 보병 군단이 전부 박살난건 절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사막과 갈리아, 에스파냐 기병을 능가하는 카타프락토이를 처음 접한 병사들의 공포를 느끼는 등 여러 복합적 요소가 로마군에 안 좋은 결과를 다수 발생시켰다. 그리고 사실 기병은 경무장을 해도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당연하게 말의 무게만 해도...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돌격해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금방 물러났다. 뒤이어서 다시 파르티아 궁기병대의 중장거리 합성궁 사격이 계속되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으나, 수레나스는 낙타와 짐마차들을 이용해 기병들에게 화살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크라수스는 별동대를 조직했고, 푸블리우스가 1천 명의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을 포함한 별동대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카타프락토이들의 정면 돌격을 당했고, 곧이어 궁기병들이 측면과 후면을 둘러싸 퇴로를 차단했다.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은 기마전이나 낙마한 상황에도 카타프락토이의 마갑(馬甲)이 미처 가려주지 못하는 말의 배를 창으로 찌르는 등 투혼을 발휘하며 끝까지 싸우려했지만 전력의 열세로 1천 명 모두가 전멸을 면치 못했다. 푸플리우스도 이때 전사했다. 일설에는 갈리아 중무장 기병의 전멸 직후에 xx했다고 한다.



아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파악한 크라수스는 전진을 명령했지만, 화살을 보급받은 궁기병들의 역습으로 오히려 진형이 흐트러지고, 여기에 카타프락토이들이 다시 장창 돌격을 가하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창대에 매달린 아들의 잘린 머리를 보게 된 크라수스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는 서둘러 남은 군대를 이끌고 근처의 고지대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냈다. 이때 수천 명의 부상병들을 전장에 버려 두고 퇴각했으며, 이들은 모두 파르티아군에게 죽임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음 날 양군은 교착 상태에 놓였고,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로마 병사들이 크라수스가 회담을 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여 억지로 회담에 응한다. 크라수스가 눈치챈 그대로 이 회담은 로마군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한 수레나스의 유인책이었다. 결국 크라수스는 협상장에서 장교들과 함께 살해당했고, 파르티아인들은 그의 탐욕을 조롱하기 위해 그의 목구멍에 녹인 금을 들이부었다.[9]

남은 로마군은 도주를 감행했지만 이미 사막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화살 과녁 신세가 되면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많은 수가 죽거나 붙잡혔다. 거의 4만에 달하던 로마군 중 2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파르티아의 피해는 미미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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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적성해 17-01-02 11:06
   
동시대 그 지역의 로마군 이전과 이후의 발전 과정을 보게 되면 유럽은 중앙 아시아 유목 민족으로 대표되는 스키타이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여러 유목 민족으로 부터 마장 기술과 도구등 기술을 전래 받고 습득 발전해 갔다고 보는게 정설입니다.

그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나 유목민족들이 금을 숭상해 무덤을 발굴만 하면 여기저기에서 금으로 만든 조형물이 쏟아지고 있고 그 당시 골드로드의 고리는 중앙 아시아에서 한반도에 황금의 나라  신라로 이어지는게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연구중인 것으로 압니다.  우리민족이 북방 유목민족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그리고 중세 기사도라고 불리던 소위 기사들의 기원도 유목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유목 민족들과 싸우던 사람들이 마장 싸움기술과 도구들을 습득하게 되고 그게 신분 상승으로 이어져  기사도로 자리 잡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긴창으로 결투하는 전통도 생겨 납니다.
타샤 17-01-02 22:58
   
등자가 뭐냐 하면, 보통은 안장에 매어져 발을 거는 고리 혹은 받침대를 등자라고 합니다.
이 등자가 없으면 칼로 내리칠때도 엉덩이로(말등) 받쳐져 힘이 덜가해지고
등자가 있으면 발로 발디딤을 하며 칼을 내리칠 수 있어서 파괴력이 더 해지지요.
특히 말의 속도까지 그 힘이 더해지는 도구 입니다.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로마의 등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등자를 유럽에서 8세기경에 만들어진 발명품이라고 했었죠.

이미 무용총의 벽화에는 등자가 나오는데 말이죠.
어차피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빠라서 모든건 로마가 다했다고 믿는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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