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지식으로 문관과 무관을 총칭하는 그냥 관리를 양반이라 알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다르게 말하기에 혼동이 오네요.
근세조선은 관리가 과거에 의해 등용이 되었지 세습에 의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계급이 되는지도 궁금 하고요.
일단 고려 이전의 한국의 모든 국가들은 관리들이 세습에 의해 되었습니다. 특히 무관은 세습으로 이어져 왔고 근세조선 시기 모든 타국들의 무관은 세습직 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 무관이 보통 영주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문관은 세습직이 아니더라도 무관만은 세습직을 유지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세조선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관리직은 귀족으로 계급이 형성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세조선은 무관역시 과거로 등용해서 지금 현대사회와 같은 계급이 없는 사회로 알고 있거든요. 천민역시 세습이 아니고 노비는 보통 지은 죄에 대한 형량에 따라서 되는 경우 입니다. 형량을 끝내면 역시 본래의 신분으로 환원이 되고요. 이 또한 현재의 시스템과 특히 미국의 시스템과 같습니다.
그래서 양반이 계급으로 인정이 된다면...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가 싶어서 물어 볼려고 했지만 이 놈의 귀차니즘 때문에... 정말 적절하게 잘 물어 봐 주신것 입니다 제 입장 에서는...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자기의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었고 이성계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왕위를 얻어 정통성이 결여된 상태였잖아요. 게다가 2남도 3남도 아닌 5남이라 더더욱 그랫구요 그래서 자기 후손들이 힘든일 겪지 말라고 태어난 시점부터 차별을 하도록 장남빼고는 전부 깎아내리는 정책을 취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 생각입니다. 다른분들의 생각좀 듣고싶네요 ㅎㅎ
mymiky 님에 덧붙이자면 조선은 귀족사회가 아닌 관료사회입니다. 조선을 새운 이성계는 함경도 촌놈, 정도전은 서자(어머니가 노비), 무학대사는 평민 이렇듯 조선을 새운 사람들이 대부분 신분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이념 자체가 귀족사회가 아닌 관료주의 채택한 겁니다. 양반 개념은 서반(무신) 동반(문신) 나눠집니다. 양반은 15세기에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만 양반이라고 했습니다.[성취지위] 그러나 16세기부터 고위 공직자의 가족까지 포함되면서 [귀족지위]로 변화됩니다. 즉 철종 때 조선 인구 70%가 양반이었으므로 얼마나 양반이라는 지위가 격하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이성계 가문은 한미한 가문인 건 맞습니다. 이성계 가문이 동북면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계기는 혼인으로 인한 사돈 세력들의 지원 덕분이지 처음부터 동북면의 패자는 아니었습니다. 이성계의 증조 이안사가 원 제국에 항복하면서 이자춘, 이성계 또한 원에 벼슬을 받았지만 그렇게 높은 벼슬은 아니었고요. 또한 이성계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지는 문벌-권문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성계 집안이 군벌로 확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혼인으로 인한 사돈의 지원 덕분입니다.
2. 정도전 집안 또한 미천한 가문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려 시대 향리라는 직책이 조선시대보다는 낫다고는 하지만 권문세족에 비하면 미천한 가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줄곧 향리나 하다가 아버지 때에 겨우 개성에 정착한 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타는 어머니가 노비 출신.
3. 고려는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 자제들까지 승려가 되는 게 가문의 영광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무학대사 집안이 그 당시 평민 집안이었고 또한 부모가 얼굴이 못생기다는 이유로 버려져서 강제적으로 승려가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이 신분이 미천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권문세족이었던 조준, 권근 등... 많은 지배층들이 참여하긴 했으나 조선 건국에 주축이었던 이성계, 정도전, 무학,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당시 지배층이 아니었고 귀족사회에 대한 반감이 높았기 때문에 초기 조선의 건국 이념은 귀족주의가 아닌 관료주의(성취)를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만 성공했지만..
의레, 문신들을 무신들보다 높게 평가하지만, 따지고보면
이성계 집안도 호족에서 출발했고,
문벌, 권문세가가 아니라 해도, 이쪽은 무신으로 명문집안인데요?
제가 생각할때는, 한미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뿐입니다.
마치, 장희빈도 한미하네 어쩌네- 소리를 하지만, 당대 재벌집안 딸이였던 것처럼,,
다 상대적인겁니다.
이성계의 한미하다는? 그런 개념도
이와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드네요.
2. 정도전 집안도 미천한 가문은 아닙니다. 향리도 호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통 큰 아들은 출세해 개경으로 올라가면, 남은 아들들은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지방 양반처럼 사는게 향리였습니다.
중앙에서 못 논거 뿐이지. 지방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그 지방에선 터줒대감으로 제일 잘 먹고 잘 살던게 향리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노비출신이 아니예요.
정도전 집안은 제가 밑에 자세히 썼으니, 참고하세요.
3. 무학대사의 부모가 애 얼굴이 못 생겨서 버렸다느니 하는건 야사입니다;;
무학대사가 미남인지 추남인지 별로 중요하진 않아 보이네요.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스승이였지, 관료는 아니니까 넘어가고..
신진사대부들이 당시 지배층들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데;;
조선을 개국한 신진사대부들 자체가, 중앙 관료들 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회안에 야당입니다.
야당 정치인들이 한미하나요? -.-;;
야당 정치인들도, 공부 다 잘해서, 좋은 대학출신에, 재산내역보면
우리같은 서민들과는 차원이 다른데요 ㅋㅋㅋ 그분들도 억, 억소리나요..
각기 노선의 차이가 있을뿐,
그 물속에서, 노는 스타일이 다를뿐입니다.
노는물 자체가, 일반 백성들이 노는 물이 아니고요.
조선을 열었던 역성혁명 자체가 위로부터 혁명이지.
아래부터의 혁명이 아닙니다.
당시에, 민주주의 할것도 아니니까,
너무 현대개념을 들이밀면 곤란합니다.
사대부들은, 권문세가들아,,
좀 어지간히 백성들 등꼴 뽑아먹고, 지킬건 지키면서 다스리자
뭐 그런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1번의 견해를 부정하는 취지로 쓰신거 같습니다. 1000여명을 대동할 정도로 큰 영향을 가진 지방 토착세력이 부임해온 공무원과 문제를 일으키고 (기생 관련) 삼척으로 도망간 것도 말이 되지 않고, 그 공무원이 나중에 삼척으로 발령이 나자 또 한번 함경도로 도망간 것 자체가 모순이라 지금 현재 부정하고 있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한 고려는 권문세족의 사회였고, 이성계는 고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쌍성총관부를 공민왕 이후 탈환하고 고려에 무신이 된 케이스로 님 말대로 상대적으로 한미한 출신인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부분이죠.
우선 고려까지는 한반도는 일부 다처제 사회였어요... 일부 다처제 사회여서 어머니쪽의 가문이 빵빵하면 첫째 부인 아이던 둘째 부인 아이던 상관없이 목에 힘주고 살았어요...
하지만 처가아닌 신분이 낮은 여자에게 얻은 자식은 사생아 취급되고, 많이 힘들게 살았죠... 신돈의 경우에도 아버지는 경남 밀양의 지주계층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라서 절에서 성장했죠
정도전의 경우에는 어버지는 경북봉화쪽 중소 지주층의 지식인 계층이었고, 어머니쪽이 문제인데,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집안 출신 자제인데, 외할머니가 천민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그래서 정도전 참 많이 힘들었죠... 물론 조선건국이후 피의 복수를 하게되고...
조선은 쫌 달라져서 일부 일처제 사회가 된거죠... 그래서 처가 아닌 첩에서 난 아이는 어머니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서얼이 되는거죠...
서얼의 경우에 출사가 제한받기도 했는데, 이건 서출 1대에 한해서이고, 그다음 2대부터는 다시 관직에 등용될수 있었어요...
이렇게 한 이유가 그 아비가 잘못한것을 아들에게 죄를 묻는 형식이 되는것인데, 서얼출신은 잘못이 없어니 그 다음대는 관직에 나갈수 있는거죠... 이상한 제도이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아들 인생 힘들수 있어니 서얼 만들지 말라는 법같기도 하고...
제가 알기론 고려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는데요
예외적으로 왕족은 대를 위해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었습니다
소수 귀족들이 첩을 두긴했으니 적서차별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없지만 굉장히 소수여서 손에 꼽을정도였고 서자이더라도 아주 높은 벼슬에까지 오를정도가 아니라면 출신이 무의미한 정도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죠
몽골의 침입이후 남자가 부족해지게 되고 사회적으로 귀족층에서는 암암리에 일부다처제가 용인되게 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적서차별은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말 그대로 결혼한 부인 모두를 본처로 인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서자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조선초까지는 그대로 유지되어왔으나 태종이후로 적서차별이 명문화되고 성리학이념이 공고해지게 되었죠
이 후 여성의 지위가 떨어졌고 상류층에서 첩을 들이게 되는 현상이 만연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서얼들이 점점 증가하게 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은 일부일처제 국가였기 때문에 언제나 본처는 하나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권이 떨어지게 되고 신분층이 점점 공고해지면서 첩을 들이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죠 그 결과 서얼이 점점 증가 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입니다
조선은 생각보다 강력한 수직적 위계관계를 중요시한듯 보입니다
유교를 본고장이었던 중국보다도 오히려 강력하게 적서차별을 했었죠 중국은 아버지가 양반이면 자식이 서자라도 신분이 양반이었던 반면 조선은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무조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했으니까요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얼은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양반관료의 등용시험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다.
때로 제한된 범위에서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관직 높낮이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한계가 있었다.
이를 한품서용(限品敍用)이라고 하는데,
문, 무 2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3품,
천인 첩 자손은 정5품까지,
6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4품,
천인 첩 자손은 정6품까지,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인 첩 자손은 정5품,
천인 첩 자손은 정7품까지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조선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합격문서에 서얼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6세기 말에는 이이와 최명길(崔鳴吉) 등이 서얼 허통을 주장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777년 정조가 서얼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의 학식 있는 서얼 출신들을 임명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차별완화 조치가 시행되었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 보시다시피, 서얼은 문과 합격이 아주 제한되어 있었지만,
무과(武科)나 잡과(雜科)는 문과만큼 엄격하지 않았기에,
본인 욕심만 조금 낮추면 다른 방법으로 살길을 찾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허준(드라마에선 재미를 위해 엄마가 기생출신의 천첩이라 얼자로 나오지만;; )
실제론 양인 첩 소생이라, 법적으로 서자 신분의 중인이였고, 의술을 배워, 의원이 되어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궁궐에 불러가, 어의까지 된 사람이죠.
애초에 양반주류가 사림 유학자들... 이들은 상당수가 귀족이라고 하기 힘든 계층이었죠. 그래서 조선이 들어서면서 양천제를 하게 되는데... 조선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시간이 흐르자 이 양인의 양반이 귀족이 되어버리죠. 그래서 중후기가면 양천제는 말안하고 사농공상을 말하기 시작하죠. 사는 귀족 농공상은 평민이라고..
우리나라도 지금은 국회의원 재벌도 전부 똑같은 국민이라고 모두 평등하다고 하는데 이게 시간이 흐른후에는 뚜렷하게 신분차이로 벌어질수도 있다고 봅니다.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각성해서 자기 권리를 찾지않는 이상 시간이 흐르면 분명 그렇게 되겠죠.
조선초는 양천제(양인/천민)지만, 조선중기 이후로 갈수록 반상제(양반/그외 전부)죠.
이것은 중인(서얼도 여기에 포함) 계급도 원래는 양인으로 쳐야되지만, 이게 반상제로 가면 그냥 천민 수준이 되어버립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양반 숫자 증가와 함께, 유교 논리에 집착하는 사림파들이 개갞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