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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03 22:21
[한국사] 조선에게 인정받기 위해 전력했던 일본의 몸부림
 글쓴이 : eo987
조회 : 5,317  

weeabo분들이나 역갤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몇건의 사례들 즉 조선통신사의 일본에 대해 기록의 근거가 된 좋은목격은 당시 일본 막부가 철저히 2~3년간 준비해서 이루어진 결과물인데 과연 당시의 일본인들이 
조선을 어떤식으로 생각했는지 간단히 논문들에서 발췌해 보아용 ^^

(1).일본에서 임진왜란을 통한? 자신들이 조선보다는 무력에서는 우위에 있다라는 인식이 문화까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은 18c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 그리고 그 근거가 조선에서는
없는 안경을 우리가 수출한다라는 인식(과연 그게 연간 몇개나 되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현재로서는)
즉 우리는 조선에 비해서 더이상 문화적 후진국이 아닐수도 있다라는 자각현상이 보임 

144.jpg

                                                                 (서강대/허지은)


(2).다음은 과연 일본인들은 그렇다면 왜 저렇게 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했나를 알수있는 논문인데용 
제목은
"문명의 가격" 17~19세기 조선의 일본으로의 사절과 역할과 비용 "이고 작성자는 
옥스포드 동양학 연구소 교수이자 일본사학자로 제임스 르위스 입니다


과연 일본인들의 무의식속에 조선이라는 국가는 무슨 의미인가를 탐구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결론은 더 문명화된 국가에 대한 선망이라는 분석
8.jpg

8_00000.jpg


일본 최고의 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었으며 동시에 국학의 거두인 아라이 하쿠세키의
인생의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일개 조선통신사에게 인정을 받았다라는 것
8_00003.jpg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왜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본질
8.jpg

대마도와 비슷한 규모의 섬인 이키에서 2~3일동안 통신사를 대접하기 위해 사용된 물품
8_000000.jpg

이런 일들이 수십군데에서 반년정도 행해지고 심지어 모든 인프라도 다시 정비하며 동시에 
민들을 철저히 통제하여 초라한 구역은 아예 폐쇄 조치를 함

2번째 사례
8_00001.jpg



3번째 사례 비정상적일 정도 이제는..8_00003.jpg

그래서 400명을 접대하는데 6개월동안 총 들어간 비용은 당시 전체 GDP의
8_00004.jpg

결국 이러한 엄청난 국가적 사업에 의해 선택된 것들을 본 조선통신사의 입장에서는 
별세계에 온 느낌이 들고도 남았겠죠 ^^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요구들은 결국 일반 백성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한 것인데 당시 일반백성들의 삶을 기록한 것을 보면
8_00005.jpg

(키토 히로시/일본의 역사인구학)




이렇게 단편적으로 대응하면 되는 것인가요? 저도 WEEABOO분들처럼 ? 

아니면 캠브릿대학교 교수의 이런 신문기사를 인용하던가?


“日이 임진왜란때 약탈해간 조선책… 北에 인터넷 전해진 것과 같은 충격”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40424/63001477/1#csidx63cd78020666e08b374192d63bf9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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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987 17-02-03 22:26
   
저도 참다못해 한번 단순한 방법을 사용해 보았네요 처음으로  ^^
     
eo987 17-02-03 22:27
   
헉 어느새 주황색 레벨ㅋ
그리고 이상한 몇 분 때문에 안좋은 모습 보여드린 것 도 죄송하공....

묘하게 조선-일본의 관계가 오늘날의 한국-대만 관계같죠 오버랩되면서 ~
     
대쥬신1054 17-02-05 09:16
   
천조국 중국아래  중국에조공잘바친 한국 그리고 중국에게  조공도못바친미개한쪽본.
역사는  이게정의죠.
햄돌 17-02-03 22:59
   
이런 교수들이 쓴 자료 보여줘도

안 믿을 사람들은 안 믿음

조선통신사한테 잘 보일려고

재정비하고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는 건 새삼스럽네
     
eo987 17-02-03 23:02
   
언제나 느끼지만 구제불능 혹은 정신병 같다라는 생각을 매번해용...
이제는 과연 일일히 대응을 하는게 맞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공 ㅠ.ㅠ
햄돌 17-02-03 23:10
   
국력은 그렇다 쳐도

문화수준은 이미 고려후기때 일본이 앞질렀다고

망상시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질렀는데 왜 근대이전 발명품이 하나도 없음?
     
eo987 17-02-03 23:16
   
국력이요? 대체 누가 그런주장을 헉~
     
섬나라호빗 17-02-04 00:19
   
일뽕들은 이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더군요 ㅋ
          
eo987 17-02-04 01:20
   
아랫분 처럼요? ^^
촐라롱콘 17-02-04 01:01
   
아라이 하쿠세키가 조선통신사 접대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사절들은 오직 성리학밖에 모르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상반된 내용은 왜 무시하시는지....^^

성리학이야 조선의 간판종목이니....
에도시기 막부의 권위와 막번체제의 주종관계를 정립하는데 있어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이용했던 당시 일본이 조선에게 꿀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성리학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같은 유학계통인 양명학에 대해서도, 불교에 대해서도
서양학문에 대해서 조선이 과연 일본의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을 수 있었을지.....

그리고 조선통신사는 18세기 후반시기부터는 이용가치가 떨어져, 결국 19세기 초의
마지막 사행에서는 일본본토에는 발도 못붙이고 역지빙례를 빙자해 대마도에서 사행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는데.....

그나마 조선통신사는 어찌되었건 조선의 중앙에서 파견한 공식사절이니
에도막부가 성대하게 접대할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조선은 임란이후 시기에도 고작 일본에서는 깡촌중의 깡촌인 대마도에도 쩔쩔매서
초량왜관 건설비용을 죄다 부담하여 당시 경상도의 재정을 휘청이게 만들지를 않나,
심지어 조선통신사가 막부장군에게만 시연했던 마상재를 대마도주의 요구로 인해
일개 도주에게도 시연해야 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는지...... ^^ 

그리고 조선은 대마도주도 아니고 대마도주의 가신에 불과한 일본사절단을 그들의 강력한 요구로
상경하게 하여 조선국왕이 직접 알현하는 수고까지 겪어야 했는지.....
     
eo987 17-02-04 01:13
   
정신승리는 하여튼
말도 안되는 망상으로 지겹네...2ch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 그대로 가지고 오면서
존재 자체가 비정상인데  weeaboo부들 정말 에공
어째서 이런 인간이 존재할수 있는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게 올바른 순서인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죠?
일본인을 상경하게 했다고요 조선이?
마상재 발언의 근거는 무엇이고?
지금까지는 무의미하다고 넘어 갔는데 이번에는 좀 확실히 혼내드릴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이미 게시판분들도 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실히 아시고 계실테니
한 마디로 계속 깐죽거리시니 ㅋ ^^
          
eo987 17-02-04 01:46
   
또 대답이 없네 망상만 잔뜩하고...

기본적으로 경북 영천의 주요 축제중에 하나가 조선시대 마상재인데
그 연원은 조선통신사가 국내에서 이동할때 주요 경로가 영천이었고
당시 군현감이 전별연을 펼치면 그 답례로 당시 동행했던 마상재인이
일반 백성들 앞에서 시연을 한 것이 기원인데 대체 무슨 관백앞에만
시연했다라는 망상을...심지어 일본에서도 일본백성들 앞에서 공연한 것인데

더군다나 일본의 마상재 요청은 인조대에 집중되고 당시
조선 조정에서 마상재를 파견하면서 목적했던 바는  호혜를 베풀어
이미 40년이나 되었지만 자국 백성을 하나라도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음을 알수 있는 것이고

"전일 우리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에 본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포로들의 사정이 불쌍했기 때문에 전후로 그들을 쇄환(刷還)하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번 관백이 마상재(馬上才)를 보내 달라고 청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니, 약간의 사람들을 쇄환하는데 반드시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본국에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적당히 잘 말하여 일시에 데리고 돌아오게 하소서."

특히 1811년에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사행 방식은 역지빙례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이해도 전무하고 특히나 대마도에서 거행은 재정의 간소화 즉 '성폐'를 목적으로  했음에도 당시 막대한 비용이 어느정도 들었는지에 대한 이해도 안되어 있고 무슨
산더미같네요 바보같은

그밖에 해석이 모두 weeaboo스럽게 자의적이라 에고 한숨만 나오는데 진정으로..
대체 왜 계속해서 금방 들통날 자위행위를 하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드네용
같은 인간으로서는 아니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고
나의 일본의 과거가 그럴리 없어 하면서...
               
촐라롱콘 17-02-05 01:22
   
이 분 사학과 출신이 맞기는 맞나.....????
만약 사학과 출신이 아니라 그냥 취미로 역사를 접하는 수준이라면 봐줄만 한데....
만의 하나 사학과 출신이라면 정말 그 수준이... ㅋㅋㅋㅋ

포로송환을 목적으로 한 쇄환사는 이미 1624년에 파견된 3회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이미 쫑났는데.... ??? 따라서 3회까지의 명칭은 엄밀히 통신사가 아니라
회답 겸 쇄환사인 것이고..(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에 대해 조선이 답한다고 해서
회답사라는 명칭도 겸했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대마도의 사기극에 놀아난 것이고...)

님이 서술한 [[더군다나 일본의 마상재 요청은 인조대에 집중되고 당시
조선 조정에서 마상재를 파견하면서 목적했던 바는  호혜를 베풀어
이미 40년이나 되었지만 자국 백성을 하나라도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음을 알수 있는 것이고]]

에서 40년이나 되었지만.... 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1636년에 파견된
4차 통신사(이 시기부터 엄밀하게 통신사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첫 사절단입니다)
를 염두한 것 같은데.... 임란이 쫑난지 4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무슨 포로송환이란
말인지......???

그나마 1~3차에서 송환한 포로들도 제대로 고향에 정착시키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송환된 상당수의 포로들을 지방관과 지방의 별장들의 부정부패와 월권으로 자신들의
노비나 첩으로 삼거나 팔아넘기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키키도 했는데

그리고 님이 마지막에 언급한 부분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나....???
18세기까지 에도막부가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접대한 것은 그만큼 지네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고.....

18세기 후반부터는 에도막부 입장에서 조선통신사의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막대한 접대비에 제번들이 반발하고 또한 이시기부터 막부의 권위가 점점 약화되는
시점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라스트 통신사는 그냥 대마도에서 간략하게
쫑내고 이후부터 통신사행은 영원히 빠이빠이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특히 대마도주와 관련된 마상재 관련해서 잘 모르시겠으면
검색해 보시던지 주변에 물어보시던지 꼬~옥 알아보세요..... 괜히 시비걸지 말고...^^
                    
eo987 17-02-05 11:37
   
민망함이라는 게 없는건지 감정에...음
     
상식3 17-02-04 23:06
   
이분 확실히 일빠구만요.
일본의 군사력? 일본이 제국을 이론데에는 첫째가 운빨 지린 거고, 그 군사력이란 것도 엄청난 착취로 거의 모든 국력을 군사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죠.
민씨일파와 고종이 개판 치는 구한말에도 일본인이 조선인 보다 영양상태가 심각하게 나쁜 건 유명한 사실이죠. 머리하나 차이가 나 보일정도였다니,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심각한 수탈을 당했는지나 알고와서 군사력 드립이나 치시죠.
일제시대 일본 군사력 찬양하는 인간들 보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나 상대가 질수없는 걸 극도의 삽질로 진거고,
당시에도 무슨 쌀생산량이니 상업이니 따져도 딱히 일본이 압도적인 건 아닙니다. 비슷한 덩치의 국가를 먹은 거지.
상업이 발달한 건 인정하지만 조선자체가 상업을 경시했다고 해도, 시장활동이 잦은 편입니다.
쌀과 직물을 화폐의 용도를 사용한 걸 가지고 멍청하게 이게 물물교환으로 생각하는 무식한 인간들도 있는데 당시 조선정부가 구리동전을 유통시키는데 실패한 이유가 이를 보증한 금과 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기축통화가 될 수 있던 것도 막대한 금 보유량 때문인 건 아시죠?
여튼 촐라롱콘님도 딱히 객관적이지 않고 일본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은 경향이 심각하네요.
상업이 발달했던 에도시대 님 말대로 일본인들이 그렇게 자국 문화에 자부심있다는 인간들이 왜 물건 광고에 조선에서 유행한다는 문구를 쓰는 거요?
일본이 인구와 쌀 생산력이 조선을 넘어선건 사실이지만
문화적으로 님이 말하는대로 넘어선 것도 아니고 그건 일본이 조선을 먹기 직전까지도 님의 망상같이 그렇게 차이나는 국력은 아닙니다. 일본의 군사력은 아주 혹독한 착취와 탄압으로 가능했던 거요. 세금을 내려고 딸을 유곽에 팔아제끼는 게 흔했던 게 일본이요.
          
상식3 17-02-04 23:14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썩었고 막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고 해도, 조선이 일본 수준으로 착취하고 무기사고 군사력 늘리는데만 몰빵했으면 일본이 조선을 점령 못 했을 거요.
당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판타지는 이건 뭐 일본우익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수준인데?
               
eo987 17-02-05 00:58
   
우선 게시물에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용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크게 이의는 없는데용..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전후라면 1900년대이고 그 당시면
일본은 이미 산업혁명(1차~2차가 동시에 이루어지는)의 완연한 단계라서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그로인해 수출의 액수나 등을 비교하면 꽤 차이가 커서..
물론 메이지 초기를 보면 매우 영세함이 보이지만요...동시에 이미 청일과 러일
두차례를 거치면서 기존 열강들만큼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 위치한 국가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공

그리고 일본의 상업의 발달 이유는 단순히 금은본위제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당시 엄청난 양의 은을 흡수해서 은본위제를 기축했던 중국의 사례를 보면 잘 설명이
안되거든요 중국은 삼국중에서 현재는 가장 화폐제도가 미발달했던 국가로
연구되는데(동전의 사용도 매우 뒤쳐진 조선에 비해서도)
 애초 전근대의 한계상 경제는 정치의 연장이고 곧 정치권력의 강권아래
강력히 통제되는 상황으로서 곧 그 사회의 경제구조는 정치가 만들어 내는 형태라
더 근본적인 원인을 따진다면 역시 각 국가가 지향하고 추구하면서 동시에 놓여있던
정치현실이 가장 우선일것 같아요.

예를들어 일본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통적 구조인 율령제이면서 동시에 느슨한 중앙집권제가 10~11c에 붕괴되면서
각 지역별로 장원이 설립되고 지배층의 전통적 수취구조및 대민지배력이 약화되어
생필품의 원활한 수취및 공급이 무너져가며 발달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이보다 한층 강화게 이루어진 구조가 에도시대이고

현물(미곡)으로 각 번들의 영민들이 세금을 납부하면 대명은 가신들에게 역시 현물로
녹봉을 지급하고 남은 쌀을 번에 종속한 상인에게 매매를 일임하며 오사카는 은본위
에도는 금본위로서 성하시내에서 사용하는 양상으로 원격지적 유통이 발달할수 밖에 없는 여러 구조적 원인들이 있는데..너무 길어질것 같아서 ㅋ 생략 ^^.
               
촐라롱콘 17-02-05 02:06
   
군사력이라는게 신식무기만 잔뜩 가져다 놓고, 병사들 신식훈련만 시킨다고
비약적으로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서...... -.-

특히 고종이 삽질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지요... 더구나 광무개혁시기(경운궁환궁~
러일전쟁 이전까지) 정부예산의 무려 40%를 군사비에 투자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지만

대한제국해군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석탄운반선을 개조한 말 그대로 이름뿐인
근대적 군함이나마 갖출수 있었고(그런데 핵심승무원들이 죄다 일본인이네요...)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전인 1860년대에 이미 사쓰마, 조슈 등의 일개 번 단위에서도
마련했던 근대적 군함을....
이에 반해 아무리 막장분위기가 나고 수취체제가 느슨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구 1,000만 단위를 훨씬 넘기는 나라 전체에서 일본보다도 수 십년 후인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허접한 군함 한 척 마련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개항전후부터 국권침탈까지 조선이 일본의 하물며 1개 사단 규모(1~2만)
이상의 일본군 병력에게 열세였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겠지만...
1개 중대~1개 대대 규모의 일본군에게도 (기껏해야 수 백명 규모) 어쩌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냉 맥없이 발려버렸던 적이 비일비재했던지라...
(그것도 동학농민군 같은 비정규군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정예병이라 할
조선의 신식 중앙군까지도....)

상식3님이 당시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으신 경향은 이해는 가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어도 군사력만큼은 넘사벽의 차이라는 판단을 접을 수는 없네요~
                    
eo987 17-02-05 02:18
   
정신차리시구요 weeaboo님 망상에서 제발 벗어나세요 이제는..
거짓말도 적당히 하고 대체 정신구조가 어떻게 되면 바로 위에서
거짓된 발언을 하는게 바로 드러나도 다시 댓글을 다는지 역시 상식 결여는  확실하고
                    
국산아몬드 17-02-05 15:08
   
조선의 신식 중앙군과 일본군은 맞붙어 싸운적이 없습니다
                         
촐라롱콘 17-02-05 17:03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시
일본군 1개 대대와 왕실호위 조선군과 교전하여 불과 30분만에
조선군이 무력화되고 교전이 종료되어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에도 일본군 수비대 1개 대대와 왕실 시위대가 교전하여
아시다시피 광화문 근처와 경회루 근처에서 2차례 교전하여 2차례 모두 불과 10분
정도밖에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습니다.

왕실호위군들이라면 신식중앙군 아닌가요.....???
그것도 그나마 나라안에서 최정예군 반열에 들어갈 것 같은데요....!!!
                         
국산아몬드 17-02-05 21:53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6198745&qb=7J2E66+47IKs67OAIOqyve2YuOuMgOyepSDrgrTthrU=&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T5NP0dpVuEGsscsspHVsssssss4-026605&sid=cRIwrZ0z8w%2BAfsHoXcc5hQ%3D%3D

[이규태 역사이야기] 외세따라 바뀐 특수부대'별기군'
명성황후를 시 해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이 대원군을 가마에 태우고 서대문에 들 었을때 한국군 장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일본과 내통한 우범선 이 대대장으로 있는 훈련 제2대대 병력이었다. 이들이 대원군 가마를 호송하였고 우범선은 대궐 깊숙이 들어가 시해 최일선에서 활약한다.

정말 너무 왜곡이 심하네요. 을미사건 사건은 정식으로 맞붙은 게 아니라 우범선이 일본과 합작하여 민비를 죽였습니다. 이런데 무슨 교전이 있어요?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7&nNewsNumb=20170122839&nidx=22840

7월 23일, 대청선전포고(8월 1일) 수일 전 일본군 1개 연대는 4대문을 장악하고 경복궁을 포위하여 조선 궁성수비대를 무장 해제시킨 가운데 친일 세력을 앞세워 조정을 장악했다.

촐라시 이런 경우는 대등한 입장에서 싸운게 아니죠. 누가 봐도 절대 열세인데
북명 17-02-04 14:09
   
뭐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대단한 분이시네요...ㅎㅎㅎ
zzag 17-02-05 03:16
   
제일 마지막 글귀의 다음 내용이 궁금하네요. 그랬던 상황이 어떤일을 계기로 급격한 인구팽창과 경제부흥으로 연결됐을까요? 혹은 우리나라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결혼해서 아이도 많이 낳고 인구도 늘어나게 될까요..?
     
eo987 17-02-05 11:50
   
균제경제상태인 오늘날과 비교하기는 좀 어려운 문제라서용...
단순히 인구가 많다는 것이 보여줄수 있는 상대적 지표라는게
그것을 부양할수 있는 농업생산량이 확대되었다인데 기본적으로 산업혁명의
전 단계가 농업혁명이고 그렇다면 당시 과연 농업혁명이 특존하게 있었냐부터..
시작하면 존재하지 않았고 등등 따져야 할게 산재해서리..
트라이던스 17-02-08 08:29
   
촐라롱콘 ㅋㅋㅋ
팩트없이 개나리짓하다 팩트폭행에 중환자실에서 엉엉울겠네 ㅋㅋ
     
4번째정지 17-02-08 18:46
   
그냥 밑바닦 드러난 왜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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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3 [한국사] 고려의 국경 동계는 잠수함 감시용 해안초소인가? (3) 금성신라 08-22 1126
19752 [한국사] 강화도에 10만 인구가 38년간 거주한 흔적이 있능가? (4) 금성신라 08-21 1287
19751 [한국사] 노걸대 실로 놀라운 발음기록 ㄷㄷ (1) 금성신라 08-21 1035
19750 [한국사] 붓다 사카무니의 씨족명, 국명 금성신라 08-21 933
19749 [한국사] 금나라는 신라다 (2) 금성신라 08-21 1248
19748 [기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증조부의 비석을 파헤친 후손 관심병자 08-18 964
19747 [기타] 북한군이 촬영한 한국전쟁 관심병자 08-17 1449
19746 [기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삶 관심병자 08-16 1119
19745 [기타] 세금 1억 들어간 춘향이 그림..여러분의 의견은 (4) 관심병자 08-03 2682
19744 [한국사] 미국 옥션에 나온 신라금관 Korisent 07-30 3414
19743 [기타] 무능했던 제국 그리고 시작된 관동군의 폭주(황고둔… (1) 관심병자 07-27 1637
19742 [기타] 칭기즈칸의 마음을 홀랑 빼앗은 고려 여인은 누구일… (7) 관심병자 07-27 2268
19741 [기타] 옛날 사람들도 봉급을 받았을까? 관심병자 07-24 1182
19740 [한국사] 동아게가 주의하고 싸워야할 점 (3) 하이시윤 07-18 1189
19739 [한국사] 서악 華山 이동과 馬邑山 즉 평양성 (2) 구르뫼 07-18 1439
19738 [한국사] 윤내현교수의 기자신고 요약 (9) 하이시윤 07-13 1506
19737 [기타] 한국사는 미스테리한 점이 많지요 (20) 관심병자 07-11 2389
19736 [기타] 잡설) 청동거울은 일반적인 거울이라고 보기는 힘들… (2) 관심병자 07-11 1345
19735 [한국사] 5백년전 명나라 지도, 明과 高麗 등 지명 분석 #대명… (5) 레종 07-09 2310
19734 [한국사] 정읍 시의원 - 중국 본토에서 삼국사기 백제의 정… (2) 조지아나 07-0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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