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박희봉 지음)를 보면
임진왜란때 사망한 일본군은 17.5만~ 23.5만명입니다(명량,노량 해전/울산성전투등은 제가 추가)
계산식은 총 투입병력 - 2차 진주성 전투 전에 파악된 잔여병력 + 2차 진주성+명량/노량해전/울산성전투 추가 전사자입니다
총 투입병력은 28.5만명입니다
총 준비병력이 28.5만명(본대 15만 , 예비대 9만 , 기타(수군,특수부대) 4.5만)이고 일본전사 조선역(구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발행)에서 확인된 투입병력만 22.5만명인데 전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준비병력이 모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각 부대에 병력이 지속적으로 충원되었으므로 기록에는 없지만 예비대 병력이 투입되었을 겁니다
2차 진주성 전투 이전1593년 5월까지 남은 병력은12만명입니다
추가 전사자는 2차 진주성 전투 4만명, 명량/노량해전/울산성전투 3~4만명입니다
따라서
최소 전사자 17.5만 = 총 투입병력(22.5만) - 남은 병력(12만) + 2차진주성 전투(4만) + 명량/노량해전/울산성전투(3만)
최대 전사자 23.5만 = 총 투입병력(28.5만) - 남은 병력(12만) + 2차진주성 전투(4만) + 명량/노량해전/울산성전투(4만)
28만 침략군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보면 됩니다
왜 이렇게 사망자가 많은지 의아히실 지 모르겠지만 임진왜란 때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전투에서 왜군이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조선군은 200년간 소규모 여진족, 해적만 주로 상대했기 때문에 1만명 이하의 소규모 전투에 강했습니다
실례로 평양의 고니시 부대는 평양성 전투 사망자가 겨우 2000명인데도 전체 전사자가 1만 1천입니다
물론 전투에 단기간 익숙해 지면서 진주성 대첩, 행주대첩같은 대규모 전투에도 이기기 시작합니다
왜군을 이기기 위해 보급로 차단이 중요합니다
왜군의 보급로는 좌로, 우로, 중로 총 3개가 있었는데
우로 보급로는 1592년 8월 고경명, 조헌에 의한 청주함락으로 차단합니다
좌로 보급로는 1592년 10월까지 곽제우,김면,정인홍,김시민, 박진등에 의해 경상도 지역 대부분을 회복하여 차단합니다
중로 보급로는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 승전으로 차단합니다
개전 6개월만에 왜군 보급로가 완전 차단됨에 따라 1593년 2월까지 한양과 부산에 집결합니다.
즉 이여송 부대가 아니더라도 평양의 고니시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고니시는 병력이 1만 9천명에서 만명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3개월간 식량과 무기가 보급되지 않아 빈사상태에서 평양성 전투가 1593년 1월에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왜군은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패전하여 부산까지 패주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워낙 많이 전사하여 결국 철군합니다.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총 잔여병력이 8만인데 3~4만을 점령지역 수비대로 남겨두면 운영할 수 있는 병력이 겨우 5만이므로 사실상 조선 정벌은 끝장난 겁니다
혹자는 고니시가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것이 미스터리라고 하던데 실상은 이미 고니시군이 빈사상태였고 조선군은 수시로 몇만명을 모아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 팩트입니다.
고니시는 방어에 급급한 상태이고 선조 추격은 꿈도 못꿀 처지였습니다
왜군은 주요 거점도시만 겨우 확보했기 때문에 이같은 보급로 차단은 엄청난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92년 6월 평양성 함락이후로 종전까지 왜군이 승리한 유일한 전투가 벽제관 전투입니다
즉 개전 2개월만에 일방적으로 털리기 시작한 겁니다
조헌의 700의총 전투나 고경명의 금산성 전투, 2차 진주성 전투등에서 왜군이 승리했다고 하나 조선군보다 피해가 몇배나 극심했던 실제 패전입니다.
명군은 벽제관 패전이후 왜군이 무서워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정유재란 때 조선군을 선봉에 세워 찔끔 참여하죠
백년간 전투만 했던 일본의 프로 군인들이 200년 평화에 전쟁을 모르던 조선농민군에게 개전 3개월만에 털려서
많게는 10배의 교환비로 죽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진은 실제 왜군의 최대 점령지역입니다. 알고 있던 것보다는 많이 적죠
아래는 왜군 편제 및 병력 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