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
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
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
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
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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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편찬한 우리역사가 단지 '일본' 이 정리했다는 이유로 배척하는게 아님.
일본 군부가 추천한 학자들만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제국을 위해 연구한 단체.
그 연구가 제대로된 연구일까요.
그 단체가 연구한 내용을 그대로 후손에게 가르친다는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