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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11 04:11
[한국사] (전쟁 정리글)고조선에 전쟁기록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글쓴이 : GleamKim
조회 : 3,019  






* 이글은 각종 글들을 정리한것.



1. 고조선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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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 요서로 확산된 고조선 문화
대부분의 학자들이 요동반도 일대에 세워진게 고조선 문명이라고 하고 요서지방은 고조선이 침공에서 정복하여 고조선의 문화(비파형동검, 가락바퀴)가 넘어간거라고 하던데 (사실상 요서세력은 고조선과 관계없는 독자세력이였다고함)

* 기원전 11세기~10세기 주나라 예기들이 요서에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요서지방에 주나라 관련 무덤이 없으므로, 주나라 예기는 요서집단(고조선에게 지배받던 요서민족)이 약탈한것으로 추정한다는 글도 있다.


고조선의 비파형동검과 청동단추가 중국 동북쪽으로 확산된 시기가 기원전 7~5세기쯤이라고 하던데
이당시 중국기록 역시도 조선이 왕이라는 국호(실제 왕이라는 명칭보단, 그만큼 권력이 세졌다는것을 상징한다고 추측함.) 


조선이 연나라를 선제 공격하려 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조선인들은 교만하고 사납다는 둥의 기록, 
남방의 제와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 연나라 명도전이 고조선의 범위와 유사하게 분포된 점을 보아 
고조선의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증거도됨.





2. 기원전 3세기 연 VS 고조선 (2000리 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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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이 연나라에게 2000리를 빼았겼다는 기록(이 기록에 신빙성을 놓고 논쟁이 많음)
고고학적으론 고조선에게 지배받던 요서지방 애들이 짧은시간동안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에서 
연나라식 무덤과 연나라식 동검, 예기 문화로 빠르게 전환됨. (고조선은 예기 문화가 없었다는 의견이 많음)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2000리라는 광활한 영토를 빼앗음에도 진개를 칭송하는 문헌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진개가 실존인물이 아니며 2000리를 강탈 당했다는것 조차 믿기 힘들다는 주장이 많지만 
실제로 단기간내에 대릉하~요서~요동지방에 이르른 지역의 범위에서 고조선의 문화가 사라지고 
연나라식 문화로 바뀐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전쟁 빼고 이런 양상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고 추측한다고 
주장을 많이 한다고함.. (대릉하~요서지방의 군락 우두머리들이 연나라식 문화를 사용)
그러므로 고조선의 문화는 오늘날 요동지방 천산일대를 사이로 축소되었다 추측한다 한다.



3.  연 VS 고조선 (2000리 회복?)

난하갈석설을 믿는 사람들은 고조선이 상실한 3000리에 범위가 대릉하 요서가 아닌 요동지방이라 주장하며
진시황의 만리장성 범위가 오늘날 난하를 경계로 끊킨다고 주장하며 진시황 본기 만리장성의 축조 기록에서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서 끝난다. 임조에서 시작해서 요동에서 끝난다라고 기록되있는 것으로 보아 요동=난하라는 공식을 성립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2000리를 빼앗겼지만,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중원에 혼란을 가져왔고 상대적으로 적은 힘으로 고조선이 옛 영역 2000리를 회복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문화범위가 요서지방과 대릉하유역에서 기원전 300년을 전후로 발견되지 않는하는 현 학계 주장이 있으므로 고조선이 연나라의 2000리를 다시 되찾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4. 고조선 VS 진나라 (진나라 군대 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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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쌓고 조선을 위협하여 조선왕에게 입조하기를 강요하나 조선은 이를 거부한다. 진나라는 대군을 꾸려 조선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그 이후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나라가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침공에서 큰 성과를 못이루었다는것을 감히 추측해볼수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자기내들의 분리한 기록을 서술하지 않는 습성이 있고 이런 습성은 상고시대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진나라의 군사가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이상 조선에게 패배했을것으로 감히 추측 해본다.






5. 고조선 VS 한나라 (박살난 한나라, 그리고 조선의 분열)



중원은 다시 혼란기에 빠져 한나라가 통일하고 한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 흉노를 격파하여 대승을 거둔다. 
그러자 동방에 유일세력이였던 고조선이 한나라의 부유함을 알고 거짓항복하고 원조를 해주면 동방세력으로 부터 한나라를 지켜주겟다는 조건하에 외교가 펼쳐진다. (고조선식 한나라 삥뜯기?)

하지만 고조선은 한나라의 원조로 사방의 세력을 평정하고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제국이 되자, 한나라는 수륙공격을 펼치나 수군은 괘멸되고 한나라군도 고조선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며 숲으로 달아난다, 한나라 군은 재정비 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한황제는 10만이라는 대군을 다시 보내주어 전쟁을 이어나가지만 성과는 없었다, 사실상 고조선은 내부분열로 멸망했고 고조선의 백성들이 뿔뿔히 흩어져 삼국시대를 이룬다.



6.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글.

사실상 기자조선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서 한중 양역사 사학에서 폐기되었던 학설임.
기자조선을 뒷받침 해줄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기준과 같은 예기들은 과장된 해석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설이 현 학계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고로, 기자의 후예라고 중국사서에 기록된 조선후나 준왕, 부왕역시 기자의 후손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과연 기자의 후예라는 중국의 고서들이 믿을만한 것들인가 의심된다.


위만을 둘러싸고 과거나 현재나 다양한 의견이 많다,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사람들의 의견은
위만은 원래 만이며 연나라에서 중국성씨 위를 하사하여 위만이 되었다는 주장을 시작으로
위만은 원래 대릉하나 요서지방에 살던 유이민 집단 이였으나, (독자적인 세력이었으나 조선에게 지배. 조선인이 됨)

연나라의 침공으로 위만가문은 대대로 연나라에서 살아야 했고 연나라에서 공적을 많이 세우자 장수가 되었고 자신의 상관이 흉노에게 망명하자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중원 혼란기를 틈타 조선에 입조하여 조선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위만의 복장이나 위만조선 개국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이어썼다는점, 그리고 조선의 법과 유이민 사이에서 공존하는 새로운 왕국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외지인이였다면 조선의 문화를 계승하여 이어 나갈 필요가 없다는 주장.


또 다른 위만에 대한 증거는 위만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기록외에 위만이 실존인물이라는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사실상 중국에서 기록한 위만이 실존인물이 아닐수도 있고 만약 실존했다 하더래도 의도적으로 조선을 깎아내리기 위해 위만을 중국인으로 둔갑시켰다는 주장도 있다고 함. 




+ 이 외에도 더 많은 기록들이 있다면 많은 의견들 부탁드립니다 (환단고기 빼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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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7-02-11 10:34
   
기자와 기자조선 이야기는 중국의 고대 문헌인 <상서대전>과 <죽서기년> <회남자> <사기> 등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갑골문에서도 나오고요.
이러한 사료들을 전부 부정하고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그에대한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위만조선은 고조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위만조선 = 단군조선 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사서들을 종합하여 볼 때,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하였다는..한사군의 위치가 요서지역으로 비정됩니다.
즉 위만조선 역시 요서지역에 위치하였다는 것이고
단군조선은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위만조선이 있었던 요서지역 외에도 요동지방과 한반도 지방에 존속해 있었으므로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일부일 뿐 고조선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내쫒았다는 조선왕 ..은 단군조선 전체의 왕이라고 볼 수 없으며
사마천에 사기와 여러 사서에 나오듯 이 조선왕 혹은 조선후는 기자의 후예로 보이므로
위만조선이 차지했던 지역은 기자조선이 차지했던 지역으로
기자조선의 위치 또한 요서지역으로 비정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위만조선 = 단군조선이 아니듯 기자조선 = 단군조선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GleamKim 17-02-11 10:39
   
근데 사실상 기자조선을 입증할만한 유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있다면 유적 명칭을 알려주셧으면 좋겟습니다.

기자나 위만조선이 고조선 서쪽에 존재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를 뒷받침 할만한 다른 정치체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랑 연나라 유적을 반박할만한 유적자료를 가져오셨으면 합니다.
     
GleamKim 17-02-11 10:44
   
1. 기자동래설

기자동래설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 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상서 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며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기, 송미자세가 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서 와 삼국지에서 계속해서 기자동래설을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성립되자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의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를 존숭하는 서적까지 편찬되었다.

개항기 이후에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은 계속되었으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자가 무왕에 의해 조선의 군주로 책봉된 것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고 난 후에 무왕이 책봉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 되었다.
     
GleamKim 17-02-11 10:47
   
2.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시각

기자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본 결과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없고,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킬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과 상나라·주나라의 문화가 명백하게 차이를 보이는 점도 중요한 근거이다.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유적들이 존재하는데, 실제 고고학적으로 평양의 유적들은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기자동래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는 보통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이 지적된다.
고대 중국은 주변 이민족들에 대하여 기록할 때 항상 중국의 고대 인물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조선의 시조를 기자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중국 측 시각에 편승하여 주변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중국의 고대 인물이라 주장하는 모화(慕華) 의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삼국시대 이후로 나타난 기자 존숭 의식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기자동래설에 대하여 일부분 긍정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중국 허베이 성 동부 및 랴오닝 성 서부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에는 기(箕)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많이 발견된다.

 고고학적으로 이들을 기자와 관련된 종족으로 보는데 이들이 점차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고조선의 지배계층을 대체하거나 합쳐졌다는 견해이다.

기자 혹은 기자족이 동쪽으로 이동한 사실을 긍정하면서 기자에 의해 기자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후에 기자와 관련된 인물이 조선의 지배층이 되면서 기자조선 전설로 발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GleamKim 17-02-11 10:54
   
지금 발견되는 요서, 대릉하 지역의 유물들은 고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말해주며
이는 곧 고조선이 막강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요동 -> 요서로 확장되었다는 근거는 고조선의 지배자의 무덤이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밀집되어 있으며 요서지방과 난하에 나오지 않는다는 지점으로 고조선의 막강한 권력들은 요동반도 만주, 한반도에 주축이였고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 동검 가락바퀴는 당시 고조선의 지배층들이 변방의 핵심지방층들에게 하사한것으로 추정합니다. 요서, 대릉하 더 멀리 따지자면 난하를 넘어서 까지 출토되는데 이것은 고조선이 이들에게 어느정도 영향이 미쳤단는 사실이 반증되는거 아닌가요?
     
GleamKim 17-02-11 11:08
   
유적적으로나 유물적으로나 고조선의 번성시기 중국 하북성,난하,대릉하,요서,요북, 만주, 한반도에는 고조선이 영향권이 미쳤던 지역이고 요서~대릉하 유역의 집단들의 주나라 예기 유물들이 약탈로 훔쳐온것으로 보는 이유는 예기 빼고 중화권의 유적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기자조선의 존재를 입증시킬만한 유적은 제가 알기로 만리장성 밖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꼬마러브 17-02-11 11:22
   
최근 랴오닝성 카줘현 구산에서 기자, 혹은 기, 기후 라는 명문이 쓰여진 청동기 유적이 대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기자의 존재는 중국 갑골문에도 등장하므로 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유적은 둘째치더라도 저 사서 전부를 부정하는 근거가 뭔지 궁금하군요.

또한 서기전 300년부터 서기 300년 까지는 고조선이 붕괴되어 형성된 열국시대까지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였습니다.
               
GleamKim 17-02-11 11:25
   
위에서 설명했듯 요동~요서~대릉하 시절의 예기들은 고조선 영향권에 미쳤던 요서, 난하, 대릉하인들이 약탈해온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기자동래설처럼 꾀 큰 무리집단이 이주를 했다고 하면 예기들 뿐만 아니라 각종 주나라 시대의 문명과 유물들이 나와야 하고 또한 그들이 고조선과 동화되어 기자조선으로 문화가 바뀌고 번창했다는 흔적이 나와야 하는데 이또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기들도 주나라와 관련된 유적이 나온것도 아니고 그냥 예기들만 땅에 묻혀있던거라고 하더라구요
                    
꼬마러브 17-02-11 11:32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조그마한 소국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님이 말씀하시는 커다란 주나라 문명? 같은 유적들을 기대하며, 제시한 유물들을 전부 부정하며.. '기자관련 유물들이 아예 없다'라고 한다면
근거 위에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장 위에 근거를 취사선택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또한 '저 많은 사서들을 부정하는 그 근거'를 저느 첫댓글부터 물어보았는데 아직 대답이 없으시군요.
유적은 둘째로 치더라도 사서들을 부정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GleamKim 17-02-11 11:36
   
아뇨 최대한 왕실집단이라면 소규모래도 상당수의 유적과 흔적 그들의 습성을 쉽사리 버리진 못했겠지요 그들이 왔다면 적어도 발가벗고 다 버리고 오지않는이상 흔적이 나와야 합니다.
밥밥c 17-02-11 10:56
   
아래 '고조선에 대해 이해가지 않은 점'의 댓글로 달은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021738135&code=210000

 위의 금석문은 일명 '선우황비문'입니다.

 이 비문의 주인공이 선우황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비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한시대입니다. (제작년 165년, 2세기)

 즉, 한나라시절에 만들어진 비문입니다. 광개토대왕 이전이죠.

 거의 이천년가까이 지난 비문에도 '기자(기자조선)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죠.

 기록이 적은 것과 없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http://gahuon.blog.me/220769931559

 위 비문에 대한 자세한 해석.

 http://sky_drum.blog.me/80133171333

선우황비 원문.

  諱璜,字伯謙,其先祖出於殷箕子之苗裔

[출처] 선우황비(鮮于璜碑)|작성자 sky_drum
밥밥c 17-02-11 10:57
   
본관은 태원(太原:중국 山西省) 단본이다. 시조는 《태원선우씨 세보》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선우 정(鮮于靖)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우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행주 기씨(幸州奇氏)와 함께 기자(箕子)에 연원을 두고 있다.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기자의 제48대손에 우량(友諒)·우성(友誠)·우평(友平)의 3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 선우씨·기씨·한씨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선우씨의 선대세계(先代世系)는 기자조선(箕子朝鮮) 48대 왕위와 마한(馬韓) 9대 왕위로 되어 있는데, 마한 9대 원왕(元王)은 곧 기자의 48대왕으로 선우씨의 세보와 한씨의 세보가 서로 부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우 [鮮于] (두산백과)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선우씨의 '기자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 당대의 기록( 2세기 금석문)으로

 완벽하게 검증되는 부분이죠.

 본관이 산서성 태원이며, 실제 금석문의 기록도 산서성 안문태수입니다. (태원군과 안문군은 바로 인근지역)

 비문의 발결장소는 하북성 천진입니다.

현재 주류사학에서는 검증가능한 기자의 기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죠.

 게다가 현재 본문의 설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단순 주장일 뿐입니다.
     
GleamKim 17-02-11 11:15
   
1. 그럼 한나라 시절 이전까지인 춘추전국시대, 진제국 시절에는 왜? 기자동래설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는지 에 대한 궁금한점이 있고요

2. 한나라 시절부터 탄생된 기자동래설이 단순한 기자가 동쪽으로 갔다는것에서 시작된 기자동래설이 왜? 조선으로 갔다는 구절로 바뀌었고 심지어 조선의 왕이 되었다라는 글로 변형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국산아몬드 17-02-11 11:15
   
기자의 후손이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네요. 기자는 왕이 아니더라도 후손이 왕이 될 수 있잖아요
          
GleamKim 17-02-11 11:18
   
제가 알기로 만리장성 밖에서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을 사실이라고 입증할만한 유적은 존재하지 않았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밥밥c 17-02-11 11:18
   
그리고 역사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면 최소한 원문이 어떠한가를 확인해 봐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요.

 최소한 한나라의 기록에 어떻게 쓰여져 있는가 확인해봐야죠.

 아래는 정사 후한서의 지리지 원문입니다.

 여기에 왕검성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⑪ 요동속국(遼東屬國)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以為屬國都尉, 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1]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2] 房
료동속국(遼東屬國), 옛 감향(邯鄉)이며,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안제(安帝) 때에 속국(屬國)으로 도위(都尉)를 삼았으며 별도로 6개의 성을 다스린다.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1)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1]
2) 빈도현(賔徒, 빈종), 옛 요서(遼西)에 속했다.
3) 도하현(徒河), 옛 요서에 속했다.
4) 무려현(無慮),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5) 험독현(險瀆),[2]
6) 방현(房)
[1]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
[2]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305  (후한서군국지 , 요동속국)
     
GleamKim 17-02-11 11:20
   
그러니깐 기자조선이 사실로 입증이 될려면 최소한 요서나 대릉하 난하유역에 주나라 시대와 동시대의 유적군들이 많이 나와야 사실로 입증이 되잖아요

글 내용이 어쨌던 그들이 주나라 시절과 동시대 혹 그 후대에라도 주나라 후손들이 건너와 번성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고조선과 연나라 충돌 이전까지도 만리장성 밖은 고조선과 관련있는 유물만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밥밥c 17-02-11 11:27
   
본래 가장 확실한 유물은 비석입니다.

금석문이 유물중 가장 귀한데 , 이중에서도 비석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 때문에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지요.
그리고 요서지방에는 아주 오래된 유적이  많습니다.

게다가 분량이 적은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GleamKim 17-02-11 11:32
   
1. 기자동래설이 성립될려면 최소한 한나라 시절 이전에 다른 역사서에 등장을 해야하며 이것이 외 변형되었는지 입증이 되야하는게 첫번째입니다.

2. 요서~대릉하~난하 유역의 예기들 빼고 거대한 중국식 유적들이 나오지 않나온다 하던데 기자동래설이 성립될려면 최소한 주나라 시절과 동시대의 유적군이 이주해서 요서 인근에 정착했다던 흔적이 되어야 되지 않나요?

3. 요서~대릉하~난하까지 뻗어있었던 고조선의 유물(잔무늬 거울,비파형동검,가락바퀴) 등이 고조선에 지배를 받던 지방유력세력들이 존재했다는것을 반증한다는데 기자조선이 이들이라고 입증이 될려면 최소한 주나라의 흔적이있어야 될꺼같습니다.
                    
꼬마러브 17-02-11 11:35
   
<상서대전>과 <죽서기년> <회남자> <사기> 전부 한나라 이전의 문헌들입니다만
                         
GleamKim 17-02-11 11:37
   
꼬마러브님 위에 제글 안보셨네요 ㅎㅎ;
기자동래설의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이긴 하나 상서대전 이전까지는 기자동래설과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GleamKim 17-02-11 11:38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조선과 상나라·주나라의 문화가 명백하게 차이를 보입니다.
기자조선의 세력이 만리장성 안에 존재하지 않는이상 만리장성 밖에서는 예기빼고는 별다른 문명이 없다고 합니다.
밥밥c 17-02-11 11:38
   
당대의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정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본래 한나라 당대, 또는 당대로 추정(후한서)되는 것이죠.

 다른 유물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검,거울따위에 제작국가가 적혀있지도 않기 때문이죠.
     
GleamKim 17-02-11 11:40
   
그렇죠 근데 주왕실이 발가벗고 머리 밀고 다 버리고 오지 않는 이상 그들의 흔적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 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소규모래도 자신들이 생활에 쓰던 문화 양식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버릇(습관)을 가진것이 사람입니다.
          
밥밥c 17-02-11 11:48
   
그들이 , 그들 손으로 만든 기록입니다.

댱연히 가장 강력한 흔적이죠.

상식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떤 계약서에 본인 인감, 본이싸인 들어있으면 당연하게 본인것임이 증명됩니다.

무슨 옆집 아저씨,아줌마의 이야기따위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요.
               
GleamKim 17-02-11 11:52
   
신기하군요 그들의 넘어왔다는 구체적인 흔적조차없는데 비석하나만 있으면 그들의 땅으로 인정이 되는군요 왜놈들오 임나일본부 주장할때 말도안되는 일본서기를 가져와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을 하는데요

근데 임나일본부는 말이 안되는게 유적적으로 유물적으로 고대 일본이 한국보다 유적적으로나 유물적으로나 뒤쳐졌는데 기록으로 하나로 인정해줘야 되는말이랑 같습니다. 인감이라고요?

사실상 상고시대 만리장성 영역 밖에는 고조선(단군조선) 세력이 유일했다고 생각됩니다.
                    
꼬마러브 17-02-11 11:54
   
맞습니다. 만리장성 영역 밖에는 고조선 세력이 유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자국은 전국시대말기에 난하 동부 연안..즉 만리장성 동쪽, 고조선 서부 변경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천이 기자를 자신의 역사서에 등장시키는 때가 이 무렵이고요.
그 이전에는 북경근처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임나일본부의 근거사료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서기는 오히려 임나일본부의 반박사료로도 이용되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GleamKim 17-02-11 13:23
   
그쵸 사실 저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믿지는 않지만 만약 그들이 존재를 했다고 하면
요서와 난하 대릉하와 같이 만리장성 밖에서 그들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흔적이 존재하질 않는것으로 알고잇습니다.
                         
GleamKim 17-02-11 13:30
   
저는 예전에 유튜브에서 윤내현 교수님과 박선희 학자님의 고조선 연구 책을 감명깊게 읽어 고조선 문화권(가생이에서 예전에 두부국님이 올리셧던 글) 영상을 올렸던 사람이였으나  (고조선 문화권 영상은 제가 삭제해서 아마 안뜰꺼임.)

윤내현 박선희 교수님의 주장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분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그들논리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동북아재단의 주장을 본따 "동북아시아 역사" 라는 영상을 만들었으나 이역시 논쟁이 많더라구요..

이번에는 속칭 강단사학, 재야사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중 긍정적인 측면들만 모아모아서 고조선관련 퀄리티 높은 영상을 만들어 볼까 싶어서 가생이넷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혹, 고조선과 관련된 많은 지식이 있으시면 조언과 자료 공유 부탁드립니다.
                         
꼬마러브 17-02-11 13:48
   
기자조선과 관련하여..대표적인 논문 중 하나인
<기자신고> 를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윤내현 교수가 쓴 논문인데, 제가 알기로 현재까지 이 논문에 대하여 비판이나 반박을 한 사람은..없습니다.
즉 이 논문은 엄정하게 고증된 학문적 사실이라고..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사학과도 아니고 그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고고학적 지식은 부족하나
적어도 문헌사료를 고증하는데 있어서는 윤내현 교수의 고증이 가장 치밀하고 정확하지 않나..생각합니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을 포함하여 주류사학계 논증의 문제점은
고증을 할 때.. 예를 들어

철수는 영희를 좋아한다.
일각에서는 철수가 영희를 안좋아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철수는 영희를 좋아한다.

- 철수가 영희를 안좋아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근거가 무엇인지..언급하지 않고
결론으로 가는 행태가 많습니다.
즉 근거를 조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이 있고 결론에 맞는 근거를 조합하는 것입니다
     
GleamKim 17-02-11 11:43
   
그리고 중국식 동검이나 조선식동검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주나라 문화나 조선의 문화는 다르며, 청동조차도 청동제조과정에서 어떤 재료를 썼냐에 따라서 청동의 색상과 강도가 다릅니다.

참고로 고조선의 청동은 구리와 아연이 섞인 동검인데 이 비율자체가 중국과 달라 중국식 예기가 금색빛을 띄지만 조선식 비파형 동검과 잔무늬 거울은 은색빛이 돈다고 하더라구요
          
밥밥c 17-02-11 12:12
   
그 ' 뭐라고 합니다'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확실하진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현히 동검,거울을 아무리 본다 하더라도 그 제작국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알수 없는 것을 가지고 무슨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GleamKim 17-02-11 13:23
   
1. 사실상 하문화, 주나라 문화가 난하를 경계로 발견됩니다.

2. 기자가 왔다면 예기를 포함한 더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3. 기준을 비롯한 주나라 토기들 의외에 다른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요서유역)
          
도배시러 17-07-11 23:05
   
청동= 구리+주석, 황동= 구리+아연 입니다.
금색빛을 띈다면 아연 함량이 높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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