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와,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동쪽으로는 금(金)과 접해 있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다. (…)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 동남쪽으로 480리에 있다.”
-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고려 국경까지 3,790리’.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고대평양위치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복기대 교수를 사로잡은 구절이다. 고고학자로 20년 넘게 중국 곳곳을 누빈 그지만, <선화봉사고려도경>(1)(이하 <고려도경>)의 이 구절에 끌려 답사팀을 꾸려 이 여정을 되짚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답사팀은 막중한 임무를 띤 서긍의 국신사 일행이 여덟 척 배로 저장성(浙江省) 연안 항구에서 떠났고, 황해를 건너 전남도 근해에 들어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이용해 고려에 들어간 사실에 주목했다. 요가 고려와 송 사이에 끼어있어, 육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국 영토였던 육로에 대한 서긍의 기록은 간략하다. 송의 수도에서 고려 국경에 이르는 3,790리가 육로라는 것과 지명 정도. 답사팀은 기록된 지명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복기할 방안을 고민해야 했고, <고려도경>이 쓰인 2년 후인 1125년에 기록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2)(이하 <봉사행정록>)을 대조하기에 이른다.
답사팀은 카이펑(开封)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변화하는 지형과 기후를 국신사 일행이 경험한 대로 체화하기로 했다. 3,159리 중 선양(沈阳)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계획했다. 왜 선양까지인가. <봉사행정록>의 허항종(許亢宗) 일행은 선양까지 와서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금의 수도가 지금의 하얼빈 쪽이었기 때문이다. <봉사행정록>에도 선양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통저우(同州) 근처의 큰 산을 신뤄산(新羅山)이라 부르고 이 산이 고려와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봉사행정록>의 노선을 따라가며 답사팀은 송나라부터 고려 국경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 고증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사실 고려 국경 문제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검토나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교과서도 고려 국경이 압록강에 미치지 못한다고 못 박은 주류학계 의견을 토대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는 새로운 국경 관련 문헌자료가 있어도 검토하지 않던 학계의 풍토에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이의를 제기한 모양새다. 즉 인문지리적·역사문헌학적 고증에 나선 실험적 시도인 셈이다. 복 교수는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나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가 만주 어딘가에 있다면 고려시대 국경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고려시대 국경을 지금의 압록강에서 원산만이라고 볼 때, 서경은 반드시 지금 평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기록에 서경은 평양에 설치했다고 돼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얘기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고려시대 국경 문제에 대한 가장 적확한 기록이 서긍의 <고려도경>이고, 여기에 3,790리라고 명시돼 있다면, 지금처럼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 번 검토는 해봐야죠.”
그는 <봉사행정록>에 금나라 ‘상경’으로 가는 노선과 고려로 갈라지는 기점인 ‘신민’까지 따라가다 보면 고려 국경선이 어디인지 잡힌다며, 고려 국경선 안에서 다시 평양 논의를 하면 고구려 평양을 이야기할 때 상당히 유연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국 전날까지 이어진 회의로 지친 몸을 이끌고 8명의 답사팀이 지난 4월 16일 새벽 인천공항에 모였다. 목적지는 허난성(河南省) 정저우시(郑州市). 3시간 남짓, 짧은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해 대절한 미니버스를 탔다. 복 교수가 카이펑이 아닌 정저우에서 일정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