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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24 17:21
[기타] 6.25 남침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781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했다. 서쪽 옹진반도부터 공격을 시작해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으로 확대됐다. 38선 전역에 걸쳐 30분 동안 먼저 포사격을 한 다음 공격해 들어왔다. 남침 루트는 옹진반도 외에 3방향이었다. 제1 접근로는 서부전선 개성∼문산∼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코스였다. 제2 접근로는 중부전선 철원∼포천을 거쳐 의정부로 들어오는 방향이었고, 제3 접근로는 춘천∼가평을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 서울로 들어오는 코스였다.

옹진반도는 국군 제17독립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가 방어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평소에도 가끔 교전이 있었던 곳이다. 24일 밤에도 2∼3시쯤 작은 포격이 있었는데 새벽 4시가 되자 북은 30여 분 동안 엄청난 양의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과도 같았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조용했다. 그러다가 5시가 되니 38선 전역에서 공격준비사격이 있고 30분쯤 지나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으로 쳐내려왔다.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옹진반도는 왜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이뤄졌을까? 우리는 이 점(남침시각)에 대해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남침유도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군의 정설은 ‘북한의 남침시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로 돼 있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오랜 세월 자료를 추적해 왔다. 그러나 새벽 04:00란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군의 공격시간은 작전명령에 따라 이뤄진다. 그러나 인민군의 전투명령 1호(각 사단 하달)에는 어디에도 공격시간이 명시된 바 없다. 다만 ①공격준비 완료는 6월 23일 24:00까지 ②포병 준비사격은 30분간 ③공격명령은 전화, 무선, 신호탄 등으로 한다 ④인민해방전쟁 암호는 ‘폭풍’이다 ⑤공병은 공격에 필요한 지뢰 및 장애물 제거를 25일 04:00까지 완료한다 등으로 돼 있을 뿐이다.



공격준비 완료- 4시, 공격 개시- 5시

그러나 공격 개시 시간이 ‘6월 25일 5시’라는 근거는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포로를 통해 획득한 기밀문서들 속에서 공격시간은 ‘5시’라고 기록한 메모 수첩이 여럿 발견된 것이다. 연대장으로부터 구두 명령을 받고 받아쓴 대대장·중대장의 수첩이었다. 적 2사단의 경우 공격 개시 시간을 05:00로 기록했고, 적 6사단의 경우 05:30으로 기록했다. 또 전투유공자 표창을 올리는 문서에도 ‘5시’로 돼 있다. 적 2사단 자주포대대 3중대 1소대장 박영희의 공적서는 ‘1950년 6월 25일 5시부터 상부의 명령에 따라 38도선 전투에서 성과는…(이하 생략)’으로 시작된다.

또한 인민군 병사 중에 시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수첩에서 여러 편의 ‘전쟁 시’가 발견됐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이하 생략)’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5시30분 이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이날 KBS 라디오는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리는 첫 방송(7시 뉴스)에서 ‘6월 25일 새벽 5시’라고 발표했고, 12시 뉴스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아침 5시부터 8시 사이에 남침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육군본부 상황실의 통보를 받고 국방부 정훈국장(이선근 대령)이 직접 보도 문안을 작성한 뉴스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침시각은 4시가 아니라 5시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지금까지 새벽 4시로 일관해 왔다. 아마 옹진반도의 포격 시간을 근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옹진은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받았을 뿐이다.

옹진에서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시작된 것은 ‘남침유도설’과 관련이 있다. 즉 옹진에서 17연대가 해주로 북침하도록 미끼를 던지기 위해 한 시간 전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7연대가 공격해오면 그를 빌미로 38선 전역에서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시나리오가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17연대는 초전에 와해돼 반격은커녕 사상자 추스르기에도 급급했다. 결국 2719명 중 750명의 사상자를 내고 25일 저녁 육군본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17연대는 해군 수송선 LST를 타고 26일 아침 인천으로 철수했다. 17연대가 해주를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북괴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불발됐다. 그러나 김일성은 25일 새벽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하고 ‘남쪽 이승만 군대가 북침해 와서 인민 군대에 반격 명령을 내렸으니 동의해 달라’고 언급했다.

6·25전쟁은 분명히 북에서 남으로 쳐내려온 남침전쟁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그동안 남쪽에서 ‘북침’했다고 계속 허위 선전을 해왔고, 해외에서는 남한이 먼저 공격을 가해와 북에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남침유도설’을 주장해왔다. 이 같은 주장을 가장 잘 받아들인 사람이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1981년 북침설로 정리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 좌파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됐으며 젊은이들이 세뇌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로 순조롭게 독재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1945년 12월 2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직하고, 이것이 중심이 돼 북한 정권수립 절차에 들어갔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결성하고 중앙주권기관으로서의 권력행사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여러 가지 법을 만들고 헌법기관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흑백선거를 통해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1948.8.25) 북한 헌법을 채택(1948.9.3)했으며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을 선포했다. 이 모든 과정은 소련의 비호 아래 소비에트 헌법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점은 공식적인 정권수립보다 인민군을 먼저 창설(1948.2.8)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일성의 ‘공산 통일’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인민군은 창설 초기부터 소련으로부터 탱크·자주포·고사포·곡사포 등을 지원받았고,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모든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두고 나감으로써 처음부터 현대적인 군비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인민군을 더 증강하고 장비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1948년 12월 조·중 합의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 6만여 명을 차례로 입북시켜 인민군 4개 사단을 추가로 증강했으며, 38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3개 경비대를 사단으로 개편함으로써 총 10개 사단 19만83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됐다. 특히 인민군을 고등중학교에 배치해 체력이 좋은 학생들을 대량 선발했고, 이들을 시베리아로 보내 탱크·고사포·통신장비·항공기 등 현대 장비를 다루는 훈련을 받게 하는 등 간부로 양성했다.

북한은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그들이 독·소전쟁에 사용한 장비를 물려받았다. 거기에 T-34 탱크 242대를 들여와 105전차 여단과 기계화연대를 창설했고, 독·소 전쟁 경험이 있는 고려인 병력 5000여 명을 입국시켜 105전차 여단에 배속시켰다. 이로써 북한은 처음부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됐다.

한편 해군은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전투함정 30여 척과 대소 수송선 80여 척을 확보했으며, 공군은 1949년 3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정찰기 20대, 야크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등 211대의 항공기를 확보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11일부터 기동훈련을 가장해 전 병력을 6월 23일까지 38선 앞으로 전진 배치하고, 남침 루트에 대한 지형정찰을 하고, 지뢰를 제거함으로써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1949년 3월부터 세 차례나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에게 ‘남침 허락’을 받았다. 또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참전 약속을 받아냈다. 이로써 남침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내고 공격명령만 작성하면 됐다. 남침계획은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와 그 참모들이 작성했다. 그리고 소련군 출신의 고려인으로 인민군 작전국장에 특채된 유성철이 번역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심야회의서 남한 북침에 대한 ‘반격’ 동의 요청, 측근에게도 ‘북침’이라고 속여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에 대한 포격명령(남침 1단계)을 내렸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25일 오전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당 중앙위 정치위원들도 참석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동지들, 매국 역적 이승만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화국에 1∼2㎞를 무력침공 해왔습니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 군대에 ‘반격명령’을 내렸습니다. 승인하는 결정을 채택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고 회의에서는 이를 전수가결(만장일치)로 채택했다.(전 내무성 차관 강상호의 증언)

그리고 오전 11시에 평양방송에서는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적 조치로 반격을 가해 전쟁이 시작됐다’고 허위 보도했다. 참으로 기막힌 계략과 연출이다. 각료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친 것이다.

그러면 김일성은 왜 남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이는 남침 당일, 민족 배반(반역)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김일성의 심리 상태가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생긴 결과라고 판단된다. 즉 전쟁준비와 ‘조국통일’에만 집착해 소련·중국으로부터 남침 허락과 협조를 받아내기까지 참으로 많은 피로와 정신적 압박이 쌓였을 것이다. 그 결과 6월 25일 밤, 극도의 긴장 속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우면서 불안 증세가 나타나 남침이 시작되기도 전인 새벽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수면과 정신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각료들에게조차 남침 사실을 속였으니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애당초 거짓말할 계획이었으므로 회의를 소집하더라도 남침이 시작된 5시 이후에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2시간이나 앞당겨 회의를 소집했다. 이는 ‘정신적 불안 증세’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의 남침 사실은 아무리 은폐해도 증거는 많다. 총사령부가 사단에 내린 정찰명령 1호(1950.6.18)와 전투명령 1호(1950.6.22)가 있으며, 특히 1990년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남침’ 사실이 밝혀졌고, 1992년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러시아 교과서에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고 명시했다. 또 흐루쇼프의 회고록, 유성철· 이상조의 증언 등 수없이 많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60512&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1155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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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e 17-02-24 20:26
   
관심병자님 아이다때문에 올린 글을 클릭해보지는 않지만
이런 글은 참 의외네요 ^^

한 십여년 전인가? 회사 경리여직원과 뉴스를 보다가
6.25에 관한 얘기가 나오길래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6.25에 대해서 아냐?

대답이 충격적이었는데
"모르는데요?"

난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일부러 모른다고 하거나?
얘가 맹한 타입이어서 좌삘은 나지 않았는데.

결론은 얘가 진짜 모르는 구나.  그 때 그 경리 여직원 나이가 거의 이십대 후반 정도 됐는데.

그리고 정말 한 동안 충격에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6.25를 모를 수가 있는걸까?

결국 내린 결론은 김대중 때 노조로 인정된 전교조의 폐해의 결과가 그렇게 등장하기 시작한 거라는 걸.

그리고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정말 그 한심한 일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거란 걸 느낍니다.

며칠 전 그 춘천 촛불 영상을 보니 전부 애들이더군요. 학생들.
대학생도 아니라 그냥 중고생들.

지 제자들을 데모로 내모는 자들.
 참 깝깝합니다 ^^
     
잘난놈 17-02-24 20:54
   
학생들은 미래의 주인이니 당연 미래를 향해 떨치고 일어나야죠...이번 시위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것에 근대시민으로서의 업그레이드를 보여준것이라 생각합니다 6.25 모른다고 나무랄수 없죠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가는 마음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과거에 적폐에 해어나오지 못한 청와대 박 모씨를 보면 알겁니다....
     
꼬마러브 17-02-24 22:16
   
한심..
     
볼텍스 17-02-24 23:10
   
6.25 모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벌써 67년 입니다.
하지만, 수업에 관심있는 학생이면 다 압니다. 그 여직원분이 특별히 심각한 분인거죠.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보면, 어린 청소년들은 확실히 미래가 보이는 훌륭한 싹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이든 세대중 무임승차로 권리를 취득한 사람들은 정말 뿌리끝까지 상한 자들이더군요.
다행인건 그들의 남은 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거죠.
     
Banff 17-02-25 07:41
   
그러기에 진작에 고교 대학 입학 비리로 청담고와 이대에 꽂아넣기를 하지 않았어야 중고생들이 시위에 몰려나오지는 않았겠지요.

지금이 전후 70여년 되어가는데, 6.25 전후 10년만에 시위중 고교생 사망으로 불붙어서 이승만 몰아내었던 4.19를 빨갱이 시위라 안하는게 오히려 더 신기하군요.

대한민국은 선거로 복종을 요구하는 국왕을 뽑는 나라가 아닙니다.
참 깝깝합니다 ^^
잘난놈 17-02-24 21:06
   
북한의 북침주장의 떡밥을 제공한것은 이승만아닐까요?? 전쟁개시날에 국군이 각 전전에서 궤멸되는 데도 국군이 용맹하게 북진반격을 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헛소리르 해댔으니 북한은 이것을 근거로 북침을 했다 주장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국전쟁은 분명 남침이였고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목적에서 전쟁을 일킨것입니다 여기까지
펙트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다소 여러 각도로 다면적 고찰아래 행해진 학자들의 의견은 다를수있죠
일제가 물러나자 이념적 공백상태가 되었고 이승만은 김일성의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김일성도 마찬가지였으며 언젠가 한쪽이든 일어난 전쟁이였다는 것이며 일제로부터 해방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이라는 것이죠 즉 애초 독립과 더불어 시작된 내전이였으며 한국 전쟁이전 소소한 게릴라전 이였으면 한국 전쟁은 대대적인 전쟁이였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즉 학문적인 연구로 통한 학자들의 견해가 싫다해도 그렇구나 해야죠...이것도 이해못한다면 학자들과 직접 그 학설을 논거로 논쟁을 해야죠 여기서 누가 한국 전쟁은 북침이였다 주장합니까..
볼텍스 17-02-24 23:11
   
남친론이 아니라 그냥 남침이죠. 이게 진실이니까요.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있나요?
멀요 17-02-25 02:29
   
남침일수밖에 없죠. 전쟁발발후 몇시간내에 남쪽에 북쪽의 탱크들이있다는 사실로 보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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