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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01 14:22
[기타] 군인 김석원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3,167  

1893년, 김석원은 탁지부(재무부) 회계과 관리인 부친의 둘째 아들로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1902년 제동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같은 동네에서 어울리던 변영태(1892~1969, 3대 외무장관)와 신태영(1891~1959, 4대 국방장관)은 한 학년 위였다.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소학교 대항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

훈련원(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한국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를 좋아했고 노백린 장군(일본 육사 11기, 후에 임정 국무총리)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 그 모습이 멋있게 보여 뒤를 따라다니며 군인의 꿈을 키웠다.

1907년(16세)에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9년말 일제는 학교 문을 닫고 재학생들을 모두 도쿄의 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김석원도 도쿄의 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일본육군사관학교(2년제)를 27기로 졸업했다.

동기로는 독립지사 이종혁 등 20여명이고, 26기 선배로 이응준(초대 참모총장), 홍사익(일본군 중장), 신태영(3대 참모총장), 지청천(광복군 총사령관, 국회의원) 등이 있었다.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와카야마 61연대에 배속되고 1917년 소위로 임관되었다.

김석원은 이때부터 뛰어난 군인으로서의 싹을 보였다.

부대의 중기관총 교관은 중위 계급으로 3개월의 훈련을 받은 자만 임명되었는데 김석원은 독학으로 중기관총의 분해조립을 마스터하여 소위 계급에 교관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920년 중위로 진급하고 용산의 78연대로 전속되었다.

용산 시절에는 군사령관의 소개로 박영효와 알게 되어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교제를 하였는데 박영효는 신임 조선군 사령관이 부임인사를 하러 올 때마다 김석원을 배석시키는 등 물심양면으로 김석원을 돌봐주었다.

당시 박영효는 친일파의 거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속마음만은 절대 일본에 주지 말라'는 박영효의 말을 새겨들었다고 한다.


1931년 만주사변 때 78연대 기관총대장으로 출정하여 마점산군(馬占山軍)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려 7백원의 포상금을 받았는데 이는 후에 원석학원 설립의 종자돈이 되었다.

김석원이 전쟁영웅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그래서 일제에게는 좋은 본보기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 때였다.

용산 주둔시 사단 검열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김석원 부대는 1937년 7월 사단의 최전위부대로 나서서 남원(南苑)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다시 1938년 2월의 동원(東苑) 전투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1937년 7월 25일 최정위 부대로 선발된 김석원 부대는 엄청 빠른 속도로 진격을 거듭하여 27일 하오 6시 30분 남원행궁을 완전히 점령했다.

당시 종군하다 전사한 아사히신문 기자가 손에 움켜쥐고 있던 피묻은 종군기록이 '김석원부대의 남원전투 5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즉, 1개 대대병력으로 1개 사단병력 격파하였다는것이다.


이에 대해 김석원은, 남원 전투의 승리는 대단한 천재적인 전술 덕분이 아니라 후방의 일본군 사단병력이 있다는 것을 중국군이 알고 기피한 덕이고 단지 임전무퇴의 각오로 용감하게 싸웠을 뿐인데 다행히도 그동안 잘 훈련된 부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회고했다.

다시 1938년 2월 21일의 동원전투, 이번에도 김석원부대는 진격이 너무 빨라 중공군 사단에 그만 포위되는 결과가 되었다.

혈투 끝에 탄환도 떨어져 돌까지 집어 던지는 상황이 되자,

이제 최후의 돌격을 하고 전사하자는 중대장들의 건의에 김석원은 연대로 몇번이나 무선 연락을 시도하다 연락이 없자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다. 뒷일을 부탁한다'라는 무전을 보내고 돌격을 준비하던 중 연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석원부대의 용전분투는 전사단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곧2개 중대의 증원군을 보낼 테니 끝까지 싸우라'라는 회신 이었다.

이에 김석원은 묘안을 떠올렸다.

적에게 들리게 큰 소리로 '이제 3천명의 증원부대가 도착할 것이니 현 위치를 사수사하라'고 외치고 다시 작은소리로 350여명의 부하들에게 '가진 담배를 손가락마다 끼워서 모두 피우며 군가를 높이 부르고 미친 듯이 춤을춰라. 이리저리 뛰며 만세를 불러라' 라고 지시하여 모두 그리 따르니 적은 겁을 집어먹고 마지막 총격을 가한 후 후퇴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적은 김석원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 후퇴하는 바람에 그 후 1년 동안 김석원부대는 수월하게 계속 황하지역까지 전진하였다.

이 두 전투로 김석원은 전쟁영웅이 되어 아동용 전쟁 동화의 주인공도 되었다.


해방후 이승만이 장개석(일본 육사 출신)을 만났을때, 이승만이 건군 초기 지휘관 부족 문제를 말하자, 장개석은 '아, 한국에는 김아무개라는 군인이 있질 않소'라고 할 정도로 그 이름은 한중일 3국에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김일성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간삼봉 전투가 1937년 6월 30일이었는데 이때 일본군 김석원 소좌가 패해 도망쳤다는 거짓 주장이 있다.

그 잘못된 주장은 계속 확대 복사되어 떠돈다.

김석원은 그 시기에 분명 용산에 있다가 7월 13일 천진으로 출발하였다.

사실은 70연대의 김인욱(육사 동기) 소좌 부대가 격파당하였던 것이다.

김소좌를 김석원 소좌로 바꾸어 선전 효과를 크게 한 것이다.

부르스 커밍스 또한 이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커밍스는 그밖에도 김석원을 북한 출신으로 잘못 알고 있을 뿐 아니라, 1949년 5월 4일에 일어난 김석원의 1사단과 북과의 송악산 전투를, 북한 노동신문의 일방적인 기사에 의거하여, 북침으로 서술하고 있다.


1939년 3월, 소좌 김석원은 개선장군이 되어 귀환하였다.

김석원 부대장을 찬양하는 노래를 들으며 귀환한 그에게는 이제 조선청년을 전장에 부르는 '전국순회강연'이라는 일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순회강연은 후에 '친일파99인'의 명단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과오로 남았다.

물론 그 자신도 후에 자신의 친일적인 발언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1948년 육해군동지회 결성시에 지원병 출신이 '김석원은 일제시 우리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은 사람이오'라며 만장일치로 김석원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일제 때 김석원이 지원병들 앞에서 '열심히 배워서 군에 대한 것을 익혀두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민족을 위해 꼭 유용하게 쓰여 질 것이다'는 말을 자주 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이는 친일파로 간주되는 최남선 등의 논리와 비슷한 것이다.

조선의 지도층 인사가 연단에 억지로 끌려 나와 청년에게 전장으로 나가라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도 최남선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학병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누차 회고한 바 있다.

김석원은 1940년 중좌로 승진하고 히로시마 후쿠야마 42연대 교육대장으로 전속되었다가 1944년 대좌(대령)로 승진하여 평양 병사부 과장으로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한국군 장교 김석원


해방후 일본군복을 벗고 월남한 김석원은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숙하는 자세로 건군(建軍)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석원은 어느 날 육사 동기생 10여명과 김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김구는 김석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김석원? 아 그렇지, 내 김동지 애기는 많이 들었소.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우리 힘을 합쳐서 한번 잘해봐야지. 하하하." 일제에게 당한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뼈저리게 남은 그 시절에 김구는 김석원을 일본군 출신 이라고 배격하지 않고 힘을 합해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제 심신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도 거의 다 사라진 지금, 김석원에 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많은 증언과 자료에는 눈을 감고, 그의 친일 기록 일편을 주목하여 목소리 크게 친일파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친일파 99인'에 나온 글 하나가 온인터넷에 복사되어 나돌고 있다.

해방 후 혼란기도 한국전쟁도 지났으니, 그리고 지금은 군사와 행정에 능력 있는 사람들 많으니 과거 인물 김석원은 이제 부관참시, 토사구팽을 당하는 것인가.


1947년 11월, 김석원은 7백여 명의 육해공군출신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취임하는 등의 활동은 하였지만 군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국방부는 거듭하여 입대를 권유하였다.

어느 날 육본에서 모임이 있다하여 나가보니 무조건 육사 입학원서를 쓰게 하여 1주일 교육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군에는 들어가지 않고 버티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그사람 왜 아직 군에 안 들어오고 있느냐'는 말이 흘러나오니 결국 1949년 1월 7일 입대하여 대령으로 제1사단장의 보직을 받았다.

김석원의 1사단은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육탄 10용사'가 박격포탄을 들고 적의 토치카(기관총진지)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 덕에 국군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곧 김석원은 '북어사건'을 둘러싸고 채병덕 참모총장(소장, 일본 육사49기, 일제 때 소좌)과 갈등을 빚어 1949년 10월 1일 둘다 동시에 예편당했다.


당시 남북간에 물자교역이 있었다.

북에서는 북어, 오징어, 카바이드, 인삼등이, 남에서는 의약품, 전기용품, 생고무, 자동차 부품들이 보내졌는데, 국군 내부 고위층이 관련되어 전략물자에 속하는 시멘트와 전선 등이 공공연하게 밀수출되고 있는 것을 포착한 김석원은 북에서 넘어온 20트럭의 북어를 압수하였다.

각종 권력 기관을 통한 압력과 회유에도 고집불통 김석원은 듣지 않고 북한과의 전투 때 사병의 부식으로 하거나 팔아서 탄환 운반 인부 삯 등으로 썼으나, 사복을 채웠다는 중상모략에 육본의 조사를 받게 되는 등 채병덕 참모총장과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 사건은 단지 두 사람간의 알력으로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이승만이 두 사람을 불러 "두 분 싸우지 말라'고 했지만 김석원은 두번씩이나 이승만 앞에서 '군내부에 군수물자를 적에게 밀수출하는 반역도배들이 있으니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강변하며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동시에 예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채병덕은 두 달 후 다시 복귀하였다.



나를 따르라! 한국전쟁의 호랑이 사단장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석원은 의병 모집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300여명을 모집하고 무기 교섭차 7월 3일 신성모 국방장관을 만났으나 그 자리에서 입대를 권유받고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석원은 수도사단으로 부임하는 길에 피난민 행렬과 마주쳤는데, 피난민 중에 국군과 경찰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걸 보고 지프를 내려 군도를 뽑아들고 큰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자 그들은 '만세'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별이 그려진 군모에 카이젤 수염을 하고 군도를 빼들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김석원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람들은 현대전에 보기 힘든 구식 장군이라고도 했지만, 많은 군인의 증언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전쟁에 임하며 부하를 사랑한 장군으로 각인되어 있다.

진천의 수도사단에 부임한 김석원은 맹공격을 당하고 있는 문안산 코앞에 사단 CP를 옮기고 엄명을 내렸다.

"누구든 사단장의 명령 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 나와 너희들이 죽어야 할 자리는 이 문안산 고지인줄 알아라"

CP근처에 포탄이 떨어지는데 미군사고문관은 겁먹은 표정으로 만류하였지만 '나를 죽일 포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물러나지 않자 어쩔 수없이 고문관도 같이 있었다.

마침내 7월 8일 문안산 고지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는데, 김석원은 부대의 맨앞에 서서 군도를 빼들고 "사단장 김석원이가 너희들 앞에서 여기 이렇게 서 있다. 만약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 너희와 내가 모두 함께 죽는 줄 알아라."하며 돌격을 외쳤다.

7시간 전투 끝에 고지 점령에 성공하였다.


진천전투는 6.25이후 계속 파죽지세로 전진해온 공산군들이 최초로 암초에 부딪혀 퇴각한 전투로 기록된다.

당시 공산군 제2사단장 최현에게 집을 빌려주었던 마을 사람은 최현이 "그 못된 놈 또 만났다"라고 전했다.

최현은 1949년의 송악산 전투때도 패했던 것.

또, 포항의 3사단장 때 월포철수작전(8월 16일~17일)에서는, 마치 증원부대가 해변을 상륙하는 것처럼 차량이 라이트를 끄고 해변에 내려갔다가 다시 라이트를 키고 올라오는 것을 반복시켜 적을 속이며 단 한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무사히 철수작전을 완수하였는데,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이 비행기로 공군대령 1명과 소령 1명을 보내 작전의 대성공을 격찬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8월 11일 김석원은 '저승에 가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가장 가슴 아픈 죽엄과 접촉하였는데' 그것은 김석원의 3사단을 따르던 학도의용군이 포항으로 우회하여 진격해온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다 산화한 48명의 죽음이었다.

그들은 처음 '가자, 김석원장군 휘하로'라는 벽보를 보고 수도사단에 들어왔다가 다시 김석원의 3사단으로 따라온 이들이었다.

김석원은 1955년 흑석동 한경변에 학도의용군현충비를 건립하였다.

1950년 9월초 피로에 지친 58세 노구의 김석원은 전시특명검열관으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전시특명검열관이라는 직책은 십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한직으로 본부로부터는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일을 찾아 부대를 찾아다니다가 다시 1951년 8월에는 육군본부부(付. 본부에 속한 그러나 직책은 없는)로 발령이 났지만 부관과 운전병 2명만있고 책상도 없는 무보직 장군이었다.

그렇게 한직으로 육본과 학교를 왕래하며 지내다가 1956년에 마침내 전역하였는데 아마 세계적으로도 최장기 무보직 장군 기록의 보유자가 아닐까 그 자신 회상했다.

전역이 늦은것은 김석원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어 예편원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제3대 민의원 선거가 끝나자 예편원이 처리되어 64세에 소장 계급으로 예편되었다.



병들어 죽지 말고 나라위해 죽어라 - 교육가 김석원


지금의 성남고를 세우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김석원은 1931년 78연대 기관총대장으로 만주사변에 출정하여 마점산군과의 전투에서 이겨 7백 원의 상금을 받았다.

귀환하여 연대의 중기대장(대위)이 되어 말을 타고 다녔는데, 어릴적에 노백린 장군이 말을 타고 다녔을 때 따라다니며 장군이 내게 말을 좀 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각나, 말을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한 아이도 없다는 사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태원에 보통학교도 없었다.

그가 생각한 것은 '강대국은 우매한 두뇌를 노린다. 만주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에게 당한 것은 우매하였기 때문이다. 세균의 번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독하듯 나라의 안녕을 위해 무지와 몽매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절감하여, 당시 사적으로 근근이 경영되던 조양학원의 구장 이홍순을 찾아가 보통학교 설립에 보태라며 5백 원을 헌금하고 대지 확보는 군대 용지를 얻어 보는 방향으로 적극 노력하겠다고 언질하였다.

그러자 동네유지들이 찾아와 모금결과 3천원 내놓았다.

김석원은 약속대로 군에 힘을 써 대여가 아닌 묵인 하에 8백 평의 군용지를 얻었고, 인천과 수원까지 원정을 다니며 5천원 모아 교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운영자금이 없어 광산 부호 원윤수의 1천원 헌금을 받아 1933년 4월 이태원보통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학교를 세우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

김석원은 일본 육사 시절, 해군성 견학을 간 적이 있다.

해군성의 현관에 큰 닻이 걸려 있었는데 안내자가 이것을 가리키며 '적장 이순신의 배에 달렸던 것'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이 장군의 유물을 대하고 남몰래 울었다.

민족의 영웅을 적장으로 대하는 우리의 기구한 운명에 한없이 슬퍼서 우리 민족 학생을 기르는 학교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였다는 것이다.

1937년에는 중등학교의 설립을 시도하자 원윤수는 곡산의 백령광산을 기꺼이 팔아서 자금을 댔다.

그때 광산을 인수한 고바야시가 20만원의 사례금을 주는 것을 거절하자, 고바야시는 뜻에 감동하여 학교에 50만원을 기부하였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당시 민족사상을 고취한다는 염려가 있어 7년 전부터 허가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김석원이 출정을 하게되자, 떠나기 전에 미나미 총독을 만나 출정 전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허가를 요청하였다.

1938년 마침내 재단법인 원석학원의 성남고등보통학교의 허가가 나왔다.

원은 원윤수의 원, 석은 김석원의 석이다.

그 2명은 종신이사가 되고, 고바야시도 이사로 참여하였다.

단 교장은 경성재향군인회 회장인 아베가 교장이 되는 조건이었다.

4월부터 교육령 개정으로 성남중학교로 개교하였다.

사학으로서는 배재, 중앙, 휘문, 중동, 양정, 보성에 이어 7번째였다.


김석원은 1960년 무소속으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으나 5.16때 해산되어 다시 선거가 있을 때 당선이 확실했지만 정치에 회의를 느껴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1972년에는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교육공로훈장 모란장을 받고, 하시는 일에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하자, 내 걱정이랑 마시고 나라 일에 전력을 다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였다.

다음해 1973년 7월에는 전재산 4,425만원을 재단에 기증하였다.

1959년에는 남산 안중근의사 동상 건립추진위원장을 지냈다.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 묘소와 송악산 전투의 '육탄10용사 기념탑'등에 해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청소 및 참배하였다.

학교의 삼각꼴 배지는 육해공군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훈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였다.

조회 때마다 애국가 다음으로 순국선열과 설립자 원윤수에 대한 묵념을 하였고, 항상 나라를 위해 일할 기둥을 만들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며 매번 마지막으로 '병들어 죽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 죽으라'고 끝을 맺었다고 한다.

많은 학생들에게 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하였는데 2002년 9월 16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육군 장성의 출신고교는 광주고(23명)에 이어 성남고가 2번째(15명)였고, 전 육군참모총장 임충빈도 성남고(26회. 1968년 졸업. 육사 29기, 2009.9 이임 및 전역)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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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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