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 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북공정'을 통해서 고구려사와 발해사와 같은 한국사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여론을 확산시키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이 섰고, 이후 명칭이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바뀌어서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국가차원에서 하는 연구프로젝트, 곧 '중화문명탐원공정'이나 중국사 24사를 고치고 청나라 역사까지 연구하는 '국사수정공작'등을 모두 동북공정을 보던 시각으로만 보는 왜곡된 중국관이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고쳐야 한다.
대한민국은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한 조선문명을 계승한 나라인 만큼 역발상으로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중원(中原)의 역사 및 고고학의 발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학적 학문적 성과를 올바로 흡수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유교 경전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맥이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하는 발해만쪽의 바다 에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쭉 남서쪽으로 가게 되고, 그 흐르는 길이 다시 북쪽으로 같다가 다시 서쪽으로 꺽이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바꾸어 말하면 황하가 서쪽에서 흘러오다가 북쪽으로 흐르고 다시 동쪽으로 꺽여져셔 흐르다가 남류하고 그 남류 황하가 다시 북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남류 황하가 북동쪽으로 꺽여져서 흘러 북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역 서쪽에 위하(渭河)라고 하는 거대한 지류가 흘러서 황하로 합쳐 들어온다. 위하가 장안(長安), 곧 현재의 섬서성 시안(西安)인데 삼대의 주(周)나라의 발상지이다. 그리고 남류 황하가 꺽여져서 북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역의 남쪽에 낙양(洛陽)이 있다. 그리고 낙양의 동쪽에 개봉(開封)이 있다.
지리적인 맥락에서 '중원(中原)'을 잘 정의하면 좋다. 중원은 위하 하류와 남류 황하및 황하 하류 지역을 잇는 지역이다. 현재의 하남성의 거의 대부분지역이고, 섬서성의 동남부, 그리고 일부 산동성의 서부 및 안휘성의 북부에 해당하다. 이 중원이 황하문명의 발상지이다. 그리고 유학의 경전이나 중원의 역사서가 그리는 대부분의 고대사회가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유학을 중시하고 독자적으로 계승한 대한민국은 이 중원 고대사회에 대한 역사상을 올바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단군이 개국한 시기를 중원의 요(堯)임금의 재위를 기준으로 세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정해서 기원전 2333년으로 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와 문헌상 증거를 합치시키는 기년 연구들이 진행되어 요임금의 재위를 기원전 2222-2122년 정도로 잡는다. 110년에서 120년의 오차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이정도의 오차는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의 발달로 인해서 요임금 자체도 신석기후기-청동기 초기의 중원지역의 고대사회 군주로 보게 되었다. 더 이상 전설이나 신화상의 인물이 아닌 것이다. 중국의 고고학의 발전과 과학과 인문학의 습합적 연구결과는 이러한 변화를 가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단군의 존재도 만주-한반도의 어느 지역에서 실존 했던 인물로 볼 수가 있게 되었다. 단군신화를 벗겨내고 고고학과 인문학의 습합적 연구를 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학계는 아직도 이러한 문제에 절름발이식이 되어 있다. 국가적 자존심이니 중국문명을 끌어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둥의 바판은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다. 과학적 지식의 발전으로 인해서 역사상의 인물이 더 늘어나고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고대사회를 보는 시각을 단지 전설이나 신화로만 재단하는 인문학적인 역사학으로는 국제적 경쟁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도 아직도 한심하고 멍청한 짓거리로 농땡이나 치고 있다. 적어도 국제적 수준의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고대사를 보면서 이렇게 비웃고 있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중국의 고대 삼대의 연대기를 정하는 프로젝트를 국가차원에서 실시하였다. 영어로는 Xia-Shang-Zhou Chronology Project이다. 그리하여 우(禹)임금이 즉위하여 하(夏)나라를 시작한 시기를 기원전 2070년으로 오차범위내에서 확정하였다. 청동기 초기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동이족(東夷族)이라고 생각하는 은(殷)나라의 첫임금인 탕(湯)이 박( )에서 상나라를 시작한 연대를 기원전 1600년이라고 지정하였다. 은나라는 황하의 하류지역 곧 중원의 동쪽에 위치한 결과로 홍수의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보이는데 그래서 수도를 잘 옮겨다녔다. 은(殷)이라고 하는 현재의 하남성 안양으로 옮긴 이후에는 안정적인 국가운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은으로 수도를 옮긴 상나라 천자가 반경이다. 은으로의 천도시기도 기원전 1300년으로 지정하였다.
은나라의 말기에 주(紂)왕이 천하를 잘 못 다스리자 서쪽의 현재의 시안지역의 은나라 제후국인 주(周)나라의 무(武) 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는데 이 해를 기원전 1046년으로 오차범위내에서 지정하였다. 그래서 서주(西周)가 기원전 1046년에서 771년까지가 된다. 기원전 771년에 시안지역에서 뤄양(낙양)으로 천도하고 이 때 부터 동주(東周)가 시작된다.
대한민국의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중화문명탐원공정(中华文明探源工程)'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왜곡되어 있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의 후속 연구프로젝트로서 하나라와 그 이전의 요임금의 당(唐)나라나 순임금의 우(虞)나라 그리고 그 이전의 황제(黃帝) 헌원이 살았을 만한 6대 고고학적 유적 을 심층으로 발굴하는 프로젝트이다.
하나라를 위해서는 언사현의 이리두유적, 하남성 신채 유적, 왕성강 유적, 우나라의 수도로 보이는 산서성 임분현 도사유적, 황제의 활동지역으로 추정되는 하남성 서파유적 등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프로젝트이다.
산서성 임분은 남류 황하가 동쪽으로 꺽어지는 곳의 북부에 위치한다. 서경 혹은 상서의 '기주(冀州)'가 바로 황하의 북안지역이었다는 지리적 기준을 제공하기도 한다. 순임금의 신하였던 우(禹), 곧 하나라의 첫 임금이 '기주'에서 부터 치수(治水)를 시직했다는 유교경전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이 도사유적은 순임금의 도읍지로 추정되기 때문에 유학의 경전에서나 여러 중원 역사서에서 묘사하는 고대사회의 모습을 잘 이야기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고학적 결과나 연구결과들이 제대로 흡수하는 것이 중원고대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산서성 임분이 '기주'이면 그 북쪽인 산서성의 대부분 지역과 그 동쪽의 현재의 하북성 지역은 어떠한 천하(天下)였을까? 요임금 및 순임금 시대의 12주 중에서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는 우임금의 9주[기주(冀州), 예주(豫州), 청주(靑州),연주(兗州),양주(揚州), 형주(荊州), 옹주(雍州), 서주(徐州), 량주(梁州)]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하우씨의 9주는 모두 기주의 남쪽이나 동서쪽에 편재되어 있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는 9주가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주례나 이아 등에 나오는 유주, 병주 및 영주를 분석해 보면 병주는 기주의 정북 방향이고, 동북방향에 유주와 영주가 연주와 청주의 북쪽 및 기주의 동쪽 및 동북쪽에 위치한다. 보통 청주는 산동성 동부지역이고 연주는 산동성의 서쪽이다. 따라서 요순시대의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는 단군 조선의 지역과 오우버랩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 순임금의 도읍의 북쪽에 발(發), 식신(息愼)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단군 조선의 위치를 정해주는 데에 중요한 키를 제공한다. 사마천의 사기도 식신으로 표기하지만 죽서기년에도 식신으로 표기하고 있고, 순임금때에 식신이 내조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사마천이 식신으로 표기한 것이 이후 숙신(肅愼)이 되고 춘추시대 제환공의 발(發), 조선(朝鮮)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偰), 새와 연관된 설화를 간직한 이 사람과 후대가 유주에서 남하하였다는 문헌적 증거도 맞아 들어간다. 유명한 대만의 학자 부쓰넨의 '이하동서(夷夏東西)설'이 적용된다.
참고로 중원역사서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이 발조선이 같이 붙은 <관자>의 경중편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사기>의 순임금 시대의 북쪽에 위치한 발, 식신과의 연관성을 거의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블로그에서 처음 밝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