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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08 03:17
[한국사] 거북선은 없어졌지만 조선소 유적은 남아 있다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2,771  



▲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의 모습 1795년(정조 19) 유득공 등이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려넣은 그림으로, 현재 전해지는 거북선 그림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거북선이 최초로 만들어진 때가 1413년(태종 13) 이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그림도 그에 비해 380년 이상 후대에 그렸다.
ⓒ 옥포대첩공원기념관
1592년 5월 4일 전라 좌수영 장졸들과 함께 경상도 바다로 나아갈 때 이순신은 판옥선 24척, 작은 협선 15척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외 포작선도 46척 있었지만 그것은 군량 등을 수송하는 고기잡이배이므로 전함에 포함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판옥선 24척은 이순신이 처음 여수에 왔을 때와 견주면 엄청나게 발전한 규모였다. 부임해서 전라 좌수영을 점검한 결과로는 쓸 만한 판옥선이 겨우 5척뿐이었다. 장부에는 30척을 보유한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나머지 배들은 거의가 폐선 수준이었다.

이는 전함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빚어진 사태였다. 배는 오랫동안 물에 떠 있으면 자연히 밑바닥에 해초가 달라붙고 조개와 굴껍질 등이 눌러 붙게 된다. 밑바닥이 형편없이 상하는 것이다. 부식을 막으려면 가끔 물 위로 끌어올려 밑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어야 한다.

건조한 지 5년이 경과하면 정성껏 관리를 해온 배도 밑바닥을 완전히 갈아주어야 한다. 10년이 지난 배는 수명을 다한 것으로 간주해서 아예 퇴역시킨다. 이순신이 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 좌수영 안에 쓸 만한 판옥선이 5척뿐이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이 장부상으로만 배가 많이 보유했지 실제 전함 출동 능력은 수준 이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수군에는 쓸 만한 전함이 별로 없었다

또 선조와 조정의 수군 철폐령이 전쟁 발발 직전에 떨어졌고, 이순신이 육군도 수군도 모두 유지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린 결과 전라도 수군만 온전히 살아남았다는 1592년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의 증언도 수군 장졸들이 전함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수군 자체가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전함도 운용하지 않게 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 무슨 애정이 남아 정성껏 배를 손질할 것인가.

▲ 여수 선소 유적 이순신이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던 조선소 유적이다. 당시 조선소는 여수시 선소마을길 33번지인 이곳 외에도 방답진(돌산읍 사무소 일원)과 본영(전라 좌수영)에 더 있었다. 방답진 선소 유적은 여수 선소 유적만큼 볼 만하지는 못하지만 돌산읍 군내리 987-6번지를 찾아가면 답사할 수 있다.

전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에는 수군 병사의 부족 문제도 겹쳐 있었다. 육군은 1년에 석 달을 복무하지만 수군은 그 두 배인 여섯 달을 복무시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군은 배를 타지 않을 때면 궁궐 수축, 축성 등 온갖 잡역에 동원했다. 군량미도 직접 생산해야 했으므로 둔전을 개발하고 쉼 없이 밭일을 했다.

수군 군역은 기피 대상이 되었고, 수군 병사로 동원되는 바닷가 백성들은 도망쳐서 떠돌이 생활도 서슴지 않았다. 재물이나 힘이 있는 자들은 뇌물을 쓰고 권세를 이용해 수군 징집 대상에서 빠져나가고, 가난한 백성들은 병역을 피해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녔다. 자연히 수사들은 배를 건조하고 관리할 수군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 조정의 수군 확보 대책

조정에서는 1594년 8월 23일 수군 충원 대책을 마련했다. 핵심은, 사변 발발 후 경상도 백성으로서 다른 지방으로 떠도는 자를 우선적으로 수군에 넣는다는 것과, 왜적에게 잡혔다가 도망한 자를 수군에 넣는다는 방침이었다. 그런 자들만 해도 몇천 명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책은 탁상공론이었을 뿐 시행되지 못했다.


▲ 배를 묶어 두는 데 썼던 기둥 여수 선소 유적 내에는 뭍의 선돌처럼 보이는 길쭉하고 큰 바위 하나가 쇠사슬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서 있다. 이 바위는 대체로 배를 묶어둔 계선주로 여겨지고 있다.

수군 부족 문제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에도 실려 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은 1594년 1월 21일 '병들어 죽은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었습니다'하고 이순신에게 보고한다. 바로 다음날인 1월 22일에도 '병들어 죽은 217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습니다'하고 보고한다. 줄곧 물에서 사는 까닭에 수군은 유난히 돌림병에 약했다. 
각 수영에서는 이곳저곳 읍을 다니며 사람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수군에 편입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이순신이 전라도의 병방 한 명을 참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관을 파견하여 수군을 모집하던 중 현(縣)의 군사 담당 아전이 징집 대상자를 빼돌렸다가 발각되었는데, 이순신이 일벌백계로 그의 목을 베어 성문에 내건 것이었다.  

병방 효수 사건은 수군 모집과 관련하여 조정과 이순신 사이에 빚어져 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사례였다. 처음부터 조정은 '각 고을에서 도망간 군사가 있어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으로 대신 충원하는 것은 일절 하지 말라'는 원칙을 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1592년 12월 10일 '친족을 대신 충원하지 말라는 명령을 중지하여 남쪽 변방 회복의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1594년 4월 10일에도 '지금은 나라를 회복할 시기'라면서 '대신 충원하는 폐단을 중지하는 것은 사변 평정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적의 침략을 막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장계를 올렸다. 수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사의 입장이 잘 드러난 장계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조선소 유적을 찾아보다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는 판옥선 24척과, 5월 29일 사천 해전 이래 일본 전함들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한 몫을 한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조선소, 즉 '여수 선소 유적'을 찾아간다. 도시 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온 포구 형태의 선소 유적은 여수시 선소마을길 33에 있으며, 사적 39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군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막만의 최북단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입구에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역할을 하고 뒤로는 망마산을 등지고 있어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원래 명칭은 순천부 선소이다. 거북선은 이곳과 함께 인근의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 좌수영 산하 순천부 수군 기지였던 것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주변의 마을은 예로부터 선소마을로 불리었고, 고려 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일종의 항만 시설인 굴강(掘江, 파서 만든 강)이 남아 있으나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으며,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판은 거북선 건조에 나대용의 공이 매우 컸다는 사실, 이곳의 본래 이름이 순천부 선소였다는 점, 여수 선소 외에도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사무소 일원) 선소와 본영(전라 좌수영) 선소가 더 있었다는 사실, 고려 시대에도 이곳에서 배를 건조했다는 사실, 지금도 배를 보관하고 또 드나들기 위해 만든 굴강 시설이 남아 있다는 사실, 일제 때 많이 훼손되었다는 사실, 근래 발굴을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다는 사실,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라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본문은 세 곳 선소 중 이곳 여수 선소가 가장 큰 규모와 뚜렷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 굴강 선소 유적 중에서도 '꽃'인 굴강이다. 거북선은 둥그렇게 판 강이라는 뜻의 굴강에서 제조되었다. 직경 42m가량의 굴강에는 거북선이 동시에 두 척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선소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여수 유적

선소 유적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운치가 있다. 왜적을 맞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수리하느라 구슬땀을 흘렸지만 420여 년 뒤에 찾아온 나그네는 너무나 유유자적하다. 물가를 따라 석축이 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바닷물이 남긴 검은 흔적과, 그 토양분과 수분을 먹고 자라난 풀들이 햇살과 바람을 받아 무성하게 흔들리면서 빛나고 있다. 142m 높이의 망마산이 길게 꼬리를 늘여 세검정(지휘소) 및 군기고(수군 무기고)까지 이어지는 풍경도 군사 유적답지 않게 평화롭기만 하다.

10분 가량 천천히 산책로를 걸으니 '굴강'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마중을 해준다. 안내판은 '굴강은 조선 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조그만 군사 항만 시설로서 선착장이자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배를 머물러 두었고, 고장 난 곳을 수리했고, 군사 물자를 싣고 내렸다. 굴강이라는 이름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작은 만처럼 둥그렇게 만든 데서 유래한 듯하다'라고 해설해준다.

이곳 여수 선소의 굴강은 면적 1338㎡, 직경 42m 안팎의 타원형으로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갈 만한 규모이다. 깊이는 돌벽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5~6m 정도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폭 9m 정도 되는 자연석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고, 남은 돌과 흙으로 뒤를 채운 것으로 보인다. 1980년과 1985년에 한 발굴 조사에서 나온 쇠로 된 화살촉, 못, 쇠붙이 같은 유물 565점은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사천 앞바다 거북선은 사천 전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순신이 처음 출동한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부터 합포, 적진포 해전에 이르는 1차 출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천 전투는 5월 29일에 치러졌다.

거북선 두 척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굴강

굴강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이순신과 나대용, 그리고 전라 좌수영 장졸들이 거북선을 만드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이곳 지휘소로 추정되는 세검정과 무기 창고였던 군기고 쪽으로 발을 옮긴다. 두 건물은 ㄱ자 모양을 이루고 있고, 대장간 터는 굴강과 군기고 사이 지점이다. 대장간 터는 빈 땅으로 두면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집 안에 단야로(쇠를 달구고 벼리는 아궁이) 시설을 갖춘 작은 건물 한 채를 지어놓아 단숨에 눈에 들어온다.

대장간 앞에도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은 '물을 모으는 집수구와 쇠를 불에 달구어 벼리는 단야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대장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면서 '집수구의 남쪽 면은 자연 암반층이지만 북쪽 면은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있다. 암반의 중심 부분에 직경 10∽20m의 자갈들이 있는데 여기서 물이 계속 솟아 나와 지속적으로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 단야로를 설치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대장간 옆에 세검정과 수군기가 있다. 굴강 쪽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세검정은 집무 및 지휘소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의 간격으로 보아 세검정은 정면의 크기가 최소 7칸에 길이 15.8m 정도였을 듯하다. 안내판에는 '옆면의 크기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건물은 1986년에 맞배지붕의 앞면 7칸, 옆면 1칸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군기고 또는 수군기라는 이름의 무기고는 1980년 선소 1차 발굴 때 세검정과 같이 조사한 뒤 복원한 건물이다. 발굴 조사 결과, 군기고는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 벽체를 토담으로 튼튼하게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건물을 무기 창고로 보는 것은 집터 앞에서 쇠로 된 화살촉, 배 못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복원한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서향이다.

실물 거북선을 타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거북선 제조창 유적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실물 거북선을 한번 타볼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북선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크기마저도 박문수가 영조에게 "충무공 이순신의 기록을 보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습니다(길이 34m, 너비 10m).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졌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아뢴 <영조실록> 1751년 2월 21일자 기사에 근거를 두고 길이 25.4m, 너비 7.6m로 추정할 뿐이다. 조금 전에 본 굴강의 안내판이 '굴강은 지름이 42m 안팎으로 거북선 2대 수용할 수 있었다'라고 해설한 것이 이제야 수긍이 된다.


▲ 물 위의 거북선 돌산공원 아래 유람선 선착장 옆에 떠 있는 '거북선 체험관'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22 유람선 선착장 옆에 '거북선 체험관'이 떠 있다. 체험관의 홍보물에는 '본 거북선은 각종 고증을 참고로 통제영 구선(거북선)과 똑 같은 실물 크기로 건조하였으며, 선내 구조는 2층으로, 단층은 당시 병사들이 전투하는 모습을 (인형) 130개로 재현했습니다. 전투 장비로는 천자포, 현자포 등 14문을 복제 배치하고, 하층은 24칸의 각 선실에 병사들의 생활상을 인형으로 재현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곳 외에 여수 진남관 앞 '이순신 광장', 경남 남해군 노량 포구, 통영 포구 등지에도 거북선 모형이 있다. 아쉬운 것은, 이들 거북선 모형들이 노군(櫓軍)에 의승군(義僧軍)을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3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보내어 '의승 수군들이 관군들보다 두 배 이상 고생하고 있다'면서 포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승 수군들의 피땀어린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무공의 장계는 말하고 있다.


▲ 거북선 당항포에 세워져 있는 거북선 모형. 안에 들어가 답사를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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