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시대는 중국역사에서도 크게 비중이 있는 시대가 아닌지라 @.@
단지 삼국지연의란 소설땜시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시기죠.
실지 당시 3대 대전으로 불리는 대전들의 동원병력을 연의가 아닌 사서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보자면..
원소랑 조조가 붙은 관도같은 경우 10만 대 1만
유비랑 손권이 붙은 이릉같은 경우 유비군 4만 대 손권 기록없음
조조랑 손권이 붙은 적벽같은 경우 조조군 대략 20여만(오서의 기록에 따른 상대기록으로 적벽에 동원된 병력수가 아닌 위나라 땅떵어리에 있는 전체병력임) 대 손권 3만 . 유비 2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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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사당은 그럼 머냐? 하겠지만 것도 죄다 연의이후에 생겨난 사회현상입니다.
한마디로 연의가 역사를 망처놓은거죠.
그럼 왜 나관중은 딴시대도 아니고 규모나 이런저런것이 화려한 역사로도 비중이 큰 딴시대도 아니고 하필 위촉오 삼국시대냐? 라고 할수 있겠지만 이건 당시 시대상 때문이죠.
원말명초거든요. 한족최고를 내세워야 하는데 나관중도 찾아보니 없어요.. 한족들만의 스펙타클한게 @.@
가장 알맞은게 후한 펑 하고 난뒤 위촉오 삼국시대죠.
나같아도 원말명초의 그 암울한 기운을 북돋아줄 소설을 쓰기위해서
하-은-주-춘추-전국-진-한-삼국지시대-동진-오호십육국-남북조-수-당-원 에서 찾으라 하면
진-한 사이의 초한시대와 한-동진 사이의 삼국지시대 2시대 밖에 없을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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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후한부터 동진전까지 따져서 위 45년, 촉 42년, 오 58년 이죠.
삼국시대가 역사적으로는 괜히 비중이 없는게 아녀라.
첫째, 비전투병 포함한 100만 입니다.
비전투병은 연령의 폭이 넓습니다.
둘째, 수가 생기는 기간 동안 북쪽에서 많은 사람이 유입이 됩니다.
삼국지 시대만 해도 왕래를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1에서 출발하는 것과 계속해서 유입되는 경우는 많이 차이가 있겠죠?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기사
잘못아시네요
촉 전체를 보면 척박한 땅입니다만, 청두를 중심으로는 상당히 좋습니다.
단지, 교류가 매우 힘들죠. 출입구자체가 매우 좁으니까요.
고대부터 사천지역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사천의 성도죠.
유비가 촉에서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이릉에서 장정 대부분을 잃은데 있습니다.
생산력의 담당과 인구증가의 역활을 맡을 세대였죠.
일단 저시대 인구세는 방식이나 기술등등이 후져서.. 호구를 사람숫자로 생각하거나 누락되는 경우가 많을테고.. 장기간의 전란으로 외진곳에 숨고 떠도는 유민들 덕분에 아마도 인구는 급감했을겁니다. 10분의 1로 줄어든다는 말도 있을정도니.. 좀 안정되면 그 10분의 1이 자연증가+유입으로 곧 미친듯이 불어나죠.
조선의 경우도 참 인구통계가 말도 못하죠..ㅜㅜ 그거 생각하면 저것도 그거 비슷하게 봐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