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지성사’ 펴낸 한영우 교수
화랑 등 무사집단으로 진화
고려때부터 武보다 文중시
조선시대 들어 유학자 지칭
조선시대 유학자를 흔히 사대부(士大夫)라고 부른다. 그래서 ‘선비’라고 하면 가장 먼저 조선시대 유학자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한영우 이화학술원 석좌교수(사진)는 이 같은 통념에 반박하면서 여러 기록을 토대로 선비의 연원을 고조선으로 끌어올렸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비는 우리 고유의 언어로서 존재했으며 고조선에서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선비문화는 외래사상과 융합되면서 발전했다는 해석이다. 한 교수는 이런 해석을 담아 최근 ‘한국선비지성사’(지식산업사)를 펴냈다.한 교수는 “고대인들은 순수 우리말인 선비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선인(仙人) 또는 선인(
先人)으로 썼는데 삼국사기에 단군을 선인으로 지칭한 대목이 있다”고 말했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는 구절이다. 한 교수는 “왕검은 단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에 따르면 단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인, 즉 ‘선비’가 되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선비는 국가에서 양성한 무사적인 청소년집단으로 진화했다. 한 교수는 “신라의 국선이나 화랑, 고구려의 선인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이와 관련 있는 중국의 기록을 제시했다. 고구려의 선비를 중국의 삼국지와 당서(
唐書)에는 선인(
先人)으로, 주서(
周書)와 수서(
隋書)에서는 선인(
仙人)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자가 서로 다른 것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음역하면서 생긴 혼란이라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고려시대 들어 문(文)이 강조되면서 무예를 중시하던 삼국시대의 선비문화가 약해졌고, 조선시대 때 선비정신은 성리학과 융합해 한 단계 진화하면서 문사(文士)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선비를 조선시대 유학자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융합하려는 선비정신은 개화기에도 이어졌다. 한 교수는 ‘도덕적 가치는 우리 것을 지키고 기술문화는 서양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한 광무개혁을 예로 들었다.
한 교수의 저술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의 선비문화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단재 신채호의 생각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한 교수는 “이 책의 내용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면서 “선비를 유교와 함께 들어온 외래 개념으로 생각하는 통념에 맞서서 선비가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가 꼽는 선비정신의 핵심은 홍익인간, 공익정신, 민본 등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