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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07 19:57
[기타] 누르하치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82  

누르하치[, 1559~1626]는 1559년에 건주여진의 군장이자 명의 ‘지휘사’ 벼슬을 하고 있는 타크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 왕조의 관점에서 여진에게 주는 작위는 그들이 중화에 복속했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작위를 받는 여진의 군장들에게는 부족민들에게 내세우는 권위의 상징임과 동시에 명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일종의 허가와 비슷한 것이었다.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토지를 구입하고 주변에서 노예를 구입하거나 잡아와서 장원을 일구어 더 큰 부를 이룩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누르하치는 상당히 유복하게 자라났다.

후금(청)의 창건주 아이신교로 누르하치 초상.

비록 명의 지휘사 직위가 여진 군장들의 통치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와 타크시는 명나라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다른 여진 부족에 비해서도 상당히 명나라에 협조적인 편이었다.

이들은 명군에게 쫓기다가 살해된 건주우위() 추장 왕고()의 아들인 아타이[]가 1582년에 예허[]부와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에 향도(전쟁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참전하였다.

 당시 명조의 진압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조선사람 이영()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성량(, 1526~1615)이었다.

아타이는 고륵산성에서 이성량에게 죽는데 이 과정에서 기오창가와 타크시가 명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던 또 다른 여진 군장인 니칸-와이란[]에게 죽는다.

이들의 죽음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기오창가와 타크시가 아타이와 친척간임을 들어 싸우지 않자 이들 부자()가 아타이편으로 붙은 것으로 잘못 안 이성량이 이들을 오살()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이들 부자()가 명 왕조와 가까우면서도 건주위에 대한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이 이성량과 명 관리들을 불안하게 했고, 이들이 후일 건주위를 통일할 경우 명나라에게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성량이 니칸-와이란을 사주하여 모살()하였다는 것이다.

(‘니칸-와이란’이 사실은 군장의 이름이 아니라 “한인()의 총독” 또는 “한인의 관리”를 뜻하는 여진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필자의 의견으로는 후자쪽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누르하치에게 있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은 일생을 바꾼 사건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무역 허가증 격인 칙서 30개와 말 30필을 보내면서 죽음을 애도하였지만 누르하치의 집안은 ‘갑옷 13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

이후 ‘칠대한()’에 포함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지만 누르하치는 표면적으로는 명조에 계속하여 충성하였다. 그는 일단 부조()의 원수를 명 왕조가 아니라 니칸-와이란으로 규정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1583년에 군을 일으킨다.

명조는 여진인들간의 일이라며 개입을 하지 않고 누르하치는 이를 기회로 삼아 건주위의 군소부락을 통합하고 1584년에는 니칸-와이란을 죽인다.

누르하치는 명 왕조로부터 도독()으로 임명되어그의 권리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녔던 지휘사로서의 지위도 계승하게 된다. 5년후 1589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하면서 이후 중원 정벌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그가 지닌 엄청난 야심을 마음속에 숨기며 명나라와의 현실적인 역량 차이를 인정한다. 1590년에 북경에 직접 가서 조공을 함으로서 명나라의 충실한 번신()임을 보여준다.

1592년에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를 정벌하여 은혜를 갚겠다며 참전을 요청한다. 비록 명나라와 조선이 거부하기는 하였으나 계속되는 충성의 표시덕택에 누르하치는 1593년에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의 칭호를 얻게 된다.

누르하치의 급성장은 다른 여진 군장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급기야 1593년에 예허부를 비롯한 9개의 부가 연합하여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한다.

명나라는 이에 개입하지 않았고 누르하치는 구레[]의 전투에서 9부의 연합군을 격파한다. 이로써 다른 여진 부()들은 그 세력이 심하게 약화되고 반대로 누르하치의 위상은 급상승하며 자신의 건주여진뿐만 아니라 해서(海西)여진 소속의 후룬[] 4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누르하치의 출신지이자 청의 발상지인 랴오닝[]성 푸순[]시 위치.

이러한 ‘양다리 걸치기’는 누르하치가 별다른 제재나 방해를 받지 않고 여진통일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601년에는 하다[]부를 통합하고 1607년에는 후이파[]부가 누르하치 예하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613년에는 우라[]부를 통합시키게 된다. 물론 명 왕조가 누르하치를 무작정 믿고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9부 연합군의 선두에 섰다가 패하기는 하였지만 예허부는 아직도 세력이 강했으며 후룬 4부의 장형()으로서 명조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명나라는 해서여진의 후룬 4부에게 건주여진에 대한 견제역할을 맏긴 것이다.

만주문으로 쓴 누르하치의 정식호칭. '만국을 이롭게 하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출처: (CC)Abstrakt at wikipedia.org>

다른 여진 부족의 군장과는 달리 누르하치는 단순히 자신이 속한 부()나 건주여진만 뿐만이 아니라 여진 전체의 차원에서 자신의 전략을 실행시켜 나갔다.

다른 부에 대한 통합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여진인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하였다. 1599년 2월, 누르하치는 2명의 신하에게 명하여 만주문자(滿)를 만들도록 지시한다.

사실 금나라 시절에 거란문자를 빌려서 만든 만주문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원래의 만주문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부로 향하는외교문서는 몽골문자로 써서 내보냈다.

이런 상황은 여진사회 내부의 통합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누르하치의 명을 받은 2명의 학자는 몽골문자의 자모()를 기본으로 하여 여진언어의 음()을 표현할 수있는 문자를 만들었고 이후 널리 쓰이면서 명나라/조선과의 외교, 그리고 누르하치의 명령이나 포고문, 그리고 한문으로 된 서적의 번역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군장으로서 명나라를 수없이 다녀왔으며 한인()들과의 접촉도 잦았던 누르하치는 문자를 통하여 여진인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일종의 민족적 자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는 그가 여진을 부족사회에서 국가체제로 발전시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몽일체(滿)

여진과 몽골은 그 거주지역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중원지역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명에게 서로 다를 바 없는 외이()였다.

사실 여진의 성장과정은 다른 관점에서 명나라의 몽골 견제에 따른 혜택을 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명 왕조의 북방전략은 주로 몽골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만주족에 대한 경계는 상대적으로 덜 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달리 몽골인들은 대원()의 멸망 이후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 체 북방의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각 부간의 내전이 심하여 명 왕조나 외부의 세력에 대한 군사력의 투사가 어려웠다.

토목보에서 불과 2만의 병력으로 영통제를 사로잡아 명 왕조의 위신을 추락시킨 에센-타이시의 죽음 이후 강력했던 오이라트부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며, 현재의 몽골 공화국 동부에서부터 중국 내몽골성 중부까지 예전 원조()를 구성하였던 다양한 집단이 난립하였다.

과거 칭기즈칸의 묘를 수호하였다고 전해지는 우량하를 비롯하여 칼카, 차하르[], 투메트, 욘세브, 카라친부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주변의 세력(즉 명 왕조)과 협력하기도 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난립한 몽골세력은 다얀 칸[, 1464~1524]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일되기도 하지만 다시 분열하였고, 이후 알탄 칸[, 1507~1582]에 의한 재통일이 이루어지며 명 왕조의 수도인 북경을 위협하였다.

비록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누르하치에게는 아직도 명 왕조가 주요 경계대상으로 삼을 만큼 강대한 세력을 가진 몽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아무리 누르하치가 건주위를 통일하였고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고 하여도 명나라와 여진 사이의기본적인 국력 차이는 엄청났다. 이는 당연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청나라 건국의 분수령이 되는 사르후 전투[, 싸얼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동원한 병력이 약 10만 3천 정도였던데 반해 여진은 2만에 불과했는데, 더구나 10만 3천이라는 숫자는 명 왕조가 지닌 병력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누르하치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기동력과 공격력을 겸비한 몽골의 기병은 누르하치의 대업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아울러 비록 멸망하였다고는 하지만 초원과 그외 유목민족들에게 있어 몽골과 원() 제국의 위명()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이 누르하치의 제국 건설에 동참하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대원 제국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과거 정치세력들간의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건국 직후의 후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귀족들과 몽골 유력 부()들간의 통혼을 적극 권장하였다. 몽골과의 통혼정책에 있어 누르하치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가문과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코르친부는 건주여진의 공격을 맞아 건주의 병력이 강력함을 알고 싸우기 보다는 사신을 보내 통혼의사를 누르하치에게 타진하였고 누르하치는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1612년,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밍간 바이러[, 부장()이라는 뜻]의 딸을 맞아들인다.

밍간은 보르지긴[]씨로서 몽골의 왕족이었고 몽골 왕족 중에서는 건주와 혼인을 맺은 첫 번째가 되었다.

3년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역시 보르지긴씨인 쿠르친 콩구르 바이러의 딸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후일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청의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 1592~1643] 역시 세 아내 역시 모두 보르지긴 가문의 몽골왕족이었다.

그 중 두번째 부인이 순치 말기와 강희 초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 다이산[, 1583~1648]역시 결혼한 뒤였지만 보르지긴 출신의 부인을 얻는다.

제 14자인 예친왕()이자 이후 순치제의 황부섭정왕()이 되는 도르곤[, 1612~1650]의 부인 열 명중 다섯명이 몽골인이었다.

누르하치의 15자 왕자인 예친왕() 도도[, 1614~1649]의 정부인 역시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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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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