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을 반대하는 감정을 토대로 중국의 완안부에 있던 아골타는 요에 대해 군사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영강주를 함락시키고 이 곳에 살고 있던 숙여진과 발해인들을 항복시킨 후에 여진족을 통합한 왕국을
세우는데 국호를 대금이라 칭하였습니다. 아골타는 당시 계획을 모든 여진의 통합과 이에대한 거란의
인정을 받아내는데 주력하고 있었기에 거란과의 화평교섭을 추진하였으며 국내 부족세력을 정리하는
내치에 전념하게 되는데요. 이 당시에는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인 보긴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
에 박차를 가하고자 그 세력의 고하에 따라서 맹안(천부장)과 모극(백부장)으로 개편하여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완비하였습니다.
이에 송의 휘종은 금에 사신을 보내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는데 조건은 종래 송이 요에 보낸 세폐
를 금에 보낸다는 것과 금은 만리장성 이북의 땅을 공격해 취하고 송은 장성 이남의 땅을 취하며 서로
장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이로인해 요의 남경은 송이 함락하고 서경은 금이 공격하되
함락 후에는 송에게 되돌려준다는 조항을 붙인 제안이 타결됨과 동시에 거란을 내쫓는데 성공한 송과
금의 연합군은 사전의 약속에 따라 전후문제를 처리하였고 송은 신약을 맺어 남경을 돌려 받았습니다.
신약에 따라 요의 남경 이하 6주를 돌려 받은 송은 이 후 세폐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금의 조정에 내분
을 사주하자, 이에 금의 태종은 송의 배신을 응징하는 군사를 일으켜 복수하려 하자, 송은 숙질관계와
조공을 바쳐 불씨를 겨우 가라앉혔으나 얼마 후 송은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금 태종은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습니다. 금은 황하 이남의 점령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괴
뢰 국가 초국을 세우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족을 인질로 삼아 만주로 철수하기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정강의 변> 입니다.
송의 휘종에 아들이던 강왕은 남경에서 즉위함으로써 이가 바로 고종이었고 송은 금군의 추격을 받고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 그 곳을 수도로 정하니 이것이 바로 남송의 시작으로, 초국의 폐지와 남송 건국
소식을 들은 태종은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했으나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때 금에서는 태종이 죽고 희종이 즉위하는데 휘종은 태종과는 달리 내치에 주력하고자 하였으므로
양국간에는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이 기간에 두 나라는 전쟁의 소모없이 내치에 힘쓸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고, 특히 남송으로 하여금 내실을 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양자강유역의 개
발에 따른 수리 시설의 확충은 쌀, 옥수수, 차 등의 농업생산력을 증가시켰으며, 잉여노동력으로 각지
에서는 분업적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요. 도자기, 견직물, 제지업 등이 발전하였고 인쇄, 출판업
의 발달을 촉진시킴으로써 지폐의 사용을 자극하였으며 또한 큰 강을 끼고 있는 입지조건은 해상교통
의 발전을 가져와 대량화물을 운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잇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송과의 화평조약을 맺은 희종이 종제인 해릉왕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해릉왕이 왕권을 잡는데
그는 여진 사회속에서 벗어나 선진의 한문화를 통해 중원의 왕조다운 국가로 키우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릉왕은 상경에서 연경으로 천도하고 황제권을 강화시키는 한편 송에 대한 남침을 개시
하였으나 남침에 불만을 가진 호족과 군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가 물러나게 되고 세종이 즉위하는데
세종은 즉위 후 민심을 안정시켰고 이어 반격해오는 송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군대를 진격시키느가 하
면 한편 외교적으로도 송과의 교섭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바로 그 때 남송에서도 고종이 죽고 효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데요. 그는 주전론에 따라 전쟁을
계속하였지만 대패하여 군인들의 사기가 실추되자, 이에 양국은 다시 세폐를 줄이고 숙질관계를 맺는
다는 조약을 맺었으며 금의 세종은 고려의 무신정권에 대한 우호정책을 견지하자 고려 역시 적극적인
친대금정책을 펴게 되어 고려와 송과의 정치적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지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