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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09 15:33
[기타]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군 장군으로 변신하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4,724  

조선을 동경한 일본 장수 ‘사야가()’

사야가( 또는 )는 1571년(선조 4) 1월 3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선조 25)에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이때,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으며,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런데 그는 불과 며칠 만에 조국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의 장수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에 귀화한 조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왜군 중에는 조선에 투항해 왜군과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라 칭했다. 항왜는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조총을 비롯한 일본의 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사야가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충선 이미지 1

위의 글은 사야가가 남긴 자전적 가사 <모하당술회가()>의 제1단 부분이다. 사야가는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좌임향ㆍ격셜풍]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정벌하러 가게 되면서, 그는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야가는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결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의 선봉장이 되어 출정함에 귀화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그가 조선의 예의()와 문물을 사모하여 당호를 ‘모하()’라고 한 것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국()을 떠나는 사야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친척을 이별며 칠()형제 두 안을 일시에 다 나니 슬푼 마 셜은 지 업다면 빈말이라" 2)라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여러 가족들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사야가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꺾지 않았다. 그는 귀화의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요순삼대()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며,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의 사람으로 계승하기 위해서였다.3)

조선의 장수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야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휘하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귀순한 후, 순찰사(使) 김수() 등을 따라서 경주ㆍ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는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에 올랐다. 사야가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거듭 태어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하였다4).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충선()’으로 지어졌다5). 이처럼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일본 출신 귀화인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성씨와 이름을 부여해 조선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 권했다. 이때, 이름은 충선 이외에 향의(: 의를 향함), 귀순(: 순하게 돌아옴) 등으로 정해졌다.

김충선은 왕명으로 벼슬과 성명이 내려지게 되자, 그 기쁨을 <모하당술회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헌계(姿) 사성명()이 일시에 특강()니 어와 성은()니야 갑기도 망극다 이 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모화당술회가

성은이 망극하여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은혜를 갚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어서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적진을 파멸하고 왕에게 은혜를 갚은 후에 연회를 열겠다고 다짐하였다.

김충선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무기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의 무기를 돌아보니 정밀함이 적어, 이 병기를 가지고서 적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하여 전투에 활용코자 했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ㆍ정철()ㆍ권율()ㆍ김성일()ㆍ곽재우()ㆍ이순신()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총 등의 보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를 예로 살펴보자6).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에 화약을 섞는 법은, 지난번 비국()의 관문()에 따라 이미 각 진영에 가르쳤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사오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사옵니까.김충선, <통제사 이순신 공께 답하는 글>

이순신이 조총과 화포 및 화약 제조법을 물은 데 대해서 김충선이 쓴 답서이다. 이후에도 김충선은 화포와 조총을 만들어 시험한 후, 각처에 보급하여 전력을 강화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7). 조선으로의 귀화를 받아주고 특별히 벼슬과 이름을 하사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전쟁 후에 그는 우록동(鹿)에 터를 잡고 생활했지만, 조정에 변고가 생기면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와 싸웠던 것이다.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두 차례의 호란() 등에서 활약했던 김충선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의 충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시기에 김충선은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당시에 왜적 만여 명은 산음()에서 곧바로 의령으로 내려가 정진()을 반쯤 건너고 있었다. 이때, 김충선은 명나라 병사 수십 명과 전사() 등과 합세해 왜적에게 맞섰다. 조선의 군병은 기세를 떨치며 싸웠으나, 곧 왜적의 습격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군이 마병()으로 추격하여 포위를 하자, 조선 군병과 명나라 병사가 함께 포위된 위기 속에서 포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데에는 항왜들의 힘이 컸다. 당시의 전투에서 김충선도 적의 수급()을 베었던 것이 확인된다.

…… 명나라 병사와 항왜 등의 참급()은 많게는 70여 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나라 병사는 두 급을 베고, …… 항왜 동지() 요질기()ㆍ항왜 첨지() 사야가()ㆍ항왜 염지()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다. 그리고 왜기() 홍백ㆍ흑백의 크고 작은 것 3면()과 창 1병() 칼 15병, 조총 2병,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가 되어 갔던 우리나라 사람 1백여 명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 11월 22일(기유)

이 시기에 김충선은 김응서()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면모를 보였다. 명나라 제독() 마귀()는 왜적의 꾀에 넘어가 명나라 병사를 위험에 처하게 한 김응서를 엄격하게 군율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자 김충선은 자신이 전공을 세우면 김응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군령장()을 보냈다8). 그리고 실제로 3개월 후인 1598년(선조 31) 1월 울산 증성(, )에서 왜적을 대파하여 일을 무마시켰다.<모화당술회가>에

김충선 이미지 2

부분에서 이때의 일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의 주동자 이괄(, 1587~1624)은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동원하였다. 당시 이괄의 부장()은 항왜 서아지()였는데, 54세의 김충선은 서아지를 김해에서 참수()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사패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케 하였다9). [승정원일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장() 김충선()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복해 온 왜인을 추포()하는 일을 그 당시 본도의 감사로 있던 자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승정원일기] 1628년(인조 6) 4월 23일(갑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토병 한응변()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임하였고, 이로 인해 상당직()에 제수되었다10).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투장에 나와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병사를 무찔렀다. 22세에 조선에 귀화해 온 이후부터 66세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쟁터에 나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김충선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자손들에게도 강조하였다. 그는 1600년(선조 33) 인동() 장씨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여러 자식들을 두었는데, 자손에 훈계하기를 영달()을 탐하지 말고 효제()ㆍ충신()ㆍ예의ㆍ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계속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충선은 1642년(인조 20) 9월 30일,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鹿) 마을에서 세상을 떠나 삼정산()에 장사 지내졌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이 있으며,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었다. 그의 6대손 김한조()는 김충선의 생애를 정리하고 유작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된 [모하당집()]이 그것이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8044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 すずき まごいち, 1534년? ~ 몰년 미상)는 사이카슈(雑賀衆)의 우두머리이다. 사이카 마고이치(雑賀孫一)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고이치(孫市)라고 쓰인 사료도 있다.

스즈키 마고이치는 사이카 용병집단 우두머리에 대한 별칭이다. 스즈키 마고이치로 대표적인 사람은 스즈키 시데히데(1546년 ~ ?)이다. 그는 사이카라고 불리곤 해서 스즈키 대신 사이카라는 이름이 되었다. 마고이치라는 이름은 일본 철포 용병단의 후계자에게 계승되던 이름이었다. 즉, 스즈키 시데히게에서 ‘사이카’란 별칭으로 바뀌었고, ‘마고이치’라는 직책 이름이 붙어서 ‘사이카 마고이치’가 되었다. 그런데 본래는 스즈키 씨이었기 때문에 사이카 마고이치, 스즈키 마고이치, 두 가지로 이름이 전승되었다. 그는 일본 철포 용병단의 지휘자였고, 일본 막부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마고이치란 이름으로 유명한 사이카슈의 두령은 세 명이 있다. 스즈키 사다유, 스즈키 시게히데, 스즈키 시게도모가 있다.

사이카슈 두령들[편집]

스즈키 사다유[편집]

사다유는 사이카패의 두령으로써 혼간지 겐뇨와 연합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하였으며, 주로 내정 부분에서 활동하였고, 전투는 아들이 시게히데가 담당하였다. 사다유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이후 도도 다가토라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할복하였다.

스즈키 시게히데[편집]

두 번째로 마고이치로 불린 인물이자, 전투부분에서 활약한 시게히데가 있다. 시게히데는 사이가패를 이끌고 여러 전투를 누볐으며, 노부나가에게 협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혼간지가 노부나가와 적대시하게 된 이후에는, 노부나가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후 노부나가의 부하인 니와 나가히데의 의해서 전멸의 위기에 처하였지만,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급사하여서 전멸의 위기를 넘기었다. 그러나 그 후 도요토미군의 의해서 사이카패는 섬멸되었고, 시게히데는 도요토미를 따르게 된다.

스즈키 시게도모[편집]

세 번째로 불린 마고이치는 시게히데의 아들인 시게도모가 있다. 시게도모는 시게히데를 이어서 도요토미가를 따랐으며, 조선의 출병도 하였고, 세키가하라 때는 서군의 가담하여서 토리이 모토타다를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하자 낭인으로 지내다가 다테 마사무네의 알선으로 미토 도쿠가와가의 사격 사범이 되었다. 그리고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고이치는 두 번째에 시게히데이다.

그의 무덤[편집]

와카야마현(和歌山?) 와카야마시 히라이의 렌죠사(蓮?寺) 내에 마고이치의 묘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으며, 법명은 「샤쿠호우세이(釋法誓)」(묘비에는 「텐쇼 17년(1589년) 5월 2일」이라고 되어 있다). 미에현(三重?) 쿠마노시(熊野市)에는 마고이치 임종의 땅으로서 공양탑이 있다. 이곳의 법명은 「샤쿠코우토쿠(釋??)」이다. 「사이카에 살던 히라이 마고이치로 후지와라 요시카네(平井孫市?藤原義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이카 스즈키씨는 호즈미(?積) 성을 칭하고 있으므로 후지와라 성을 자칭하고 있는 이 무덤의 주인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묘의 주인은 아마다 사이카 용병집단 우두머리 중 '히라이 마고이치로(平井孫市)'라고 불리던 스즈키 시게카네(령목중겸,令木重兼 1540년 ~ ?)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주로 전장이 아닌 부족간의 화평과 단합 등 배후에서 정치공작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묘는 스즈키 시게카네의 묘임이 확실시 되고 있다. 묘에 서술된 히라이 마고이치로(평정손시,平井孫市)라는 수식과 카네(겸,兼)라는 이름이 일치한다.

김충선과 동일 인물설[편집]

일본 역사 소설가 고시카 지로는 그의 저서 바다의 가야금에서 사이카 마고이치가 일본을 배신하여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과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충선으로 지목되는 ‘사이카 마고이치’(일본 사이카 조총 용병집단 우두머리의 별칭)가 진짜 김충선이었다면, 자신을 본명(스즈키氏) 대신에 사이카라고 소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유력 다이묘가 아닌 시골 변두리 호족집단이었던 까닭에 (雜賀,잡하)라는 한자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의 입장에서는 조선은 외국이므로 한자권이면 다 뜻이 통한다는 것을 간과한 체, 조선사람을 시켜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 대필해주는 사람에게 사이카라고 대답했다면 듣는 조선 사람입장에서는 조선식 표음대로 한자를 썼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이카,雜賀 -> 사야가,砂也可)

1571년생인 김충선은 아마 선대 마고이치가 아닌 1585년 사이카 멸망(하시바 히데요시의 가신 도도 다카토라에 의해 멸망함) 이후 물려받은 후대 사이카 마고이치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이카 패당이 멸망했다는 것은 더 이상 수장끼리 서로 물려받을 권위도 사라지는데, 그가 호족 출신이 아닌 그저 사이카 마을 출신이라 사이카라고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김충선철포 제작 지식을 전수해 줬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볼 때, 철포 제작 기술은 사이카 마을의 비기로써 전해지는 것으로, 단순한 사이카 마을 일개 사무라이일 가능성은 미미하다. 또한 단위 부대를 이끌고 투항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위급 인사라는 걸 방증한다. 결론은 김충선사이카 마을의 우두머리 일족이었던 스즈키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A6%88%ED%82%A4_%EB%A7%88%EA%B3%A0%EC%9D%B4%EC%B9%98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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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스 17-04-09 16:38
   
잘 읽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임진왜란 연구자인 기타지마 만지 교수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에서는 임진왜란에 반대했다는 우메키타의 난과 김충선을 관련지어 주장을 하더군요.
히데요시가 삿사 나리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히고의 영주로 임명하자, 히고 고쿠슈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이들을 진압하고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킨 이들 중에 김충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확실히 김충선이 사이카 마고이치라는 것이 더 간지나긴 합니다.
남아당자강 17-04-09 21:18
   
김충선은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어렸을때부터 한류 매니아 였다고.......
바람꽃 17-04-09 22:05
   
일본인들은 기록을 잘 안남겨서 그런지 김충선이 일본어느지방에 누구인지 아직 일본에서도 몰라요. 와카야마 조총부대라는 설이 유력한데 그것도 정확한건 아니고 .. 일본인 교수가 테레비에 나와 하는말이 당시 일본사무라이는 주인을 바꾸는게 흔했기 때문에 여러이유로 도요토미에서 조선왕으로 주인을 바꿧을거라고 하더라고요.
     
관심병자 17-04-10 18:35
   
김충선의 자가 선지(善之) 입니다.
일본측 기록에 사이카슈에 속했던 鈴木善之(스즈키 요시유키) 기록이 있고,
사이카 마고이치는 조선출정을 했고 그후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즉 조선출정 당시의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요시유키(령목선지) 이고,
조선에서 이름을 받아 김충선(김선지)이 된거라 생각합니다.

예전 일본이 말하던 배신자라는건 맞지 않습니다.
원래 사이카슈는 혼간지를 따르며 오다가를 적대했고 사이카슈를 처부순 히데요시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리 없습니다.
자기세력을 멸망시킨 원수를 위해서 명분없는 전쟁터로 내몰렸으니,
칼을 들이대야할 상대는 히데요시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바람꽃 17-04-11 23:13
   
네  님이 주장하는 학설이 유력학설중 하나인데 일본측에선 정확한게 아니라고 하니 머라 말을 못하겟네요.
울묵뻬기 17-04-09 22:28
   
아~ 사야가 김충선 이야기군요^^
잘 봤습니다.^^
촐라롱콘 17-04-09 23:42
   
사야가 김충선이 3,000명을 거느리고 투항했다는 내용은 출처가 모하당문집에밖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당시 3,000명에 달할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출정할 정도라면
일본에서 적어도 5만석~10만석 규모의 영지를 보유한 중소 규모의 다이묘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참고로 임란 당시의 조선에 온 일본군 수군장수들이 대부분 일본에서는
1만석~7만석 정도의 중소 규모의 영지를 지닌 다이묘들로써 이들이 동원한 병력규모가
적게는 수 백명에서 많게는 2~3천명 수준인 것에 비추어볼때....
일시에 3,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투항이라면 여러 기록에 대서특필로 다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야가 김충선이 왜란 초기에 투항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3,000명의 병력이 일시에 줄어들었다면 가토키요마사군의 진격도 상당한 타격을 입고
추춤해야 상식적인데...
그와는 정반대로 가토의 제2군은 코니시군의 제1군보다도 나흘 늦게 조선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당시 부산~서울의 최단거리로 진격한 코니시군과는 달리 상당히 에둘러가는 진격로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양입성은 고니시군과 같은 날짜에 달성했을 정도로 당시 가토군의 진격이 파죽지세였음에
비추어보면... 3,000병력의 투항은 상당한 과장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모하당문집을 제외한 한일 양국의 어떤 기록에도 사야가 김충선의 투항한 병력규모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충선의 후손들이 훗날 부풀리거나 미화했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그냥 멋대로 추측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최대치로 잡아도 300명을 넘어서기는 힘들 것이라 봅니다!
300명이라 해도 다이묘의 유력가신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규모이고
심지어 다이묘급 가운데 가장 규모가 적은 1만석급의 다이묘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규모입니다!
     
관심병자 17-04-10 13:12
   
사이카슈(일본어: 雑賀衆 さいかしゅう)는 센고쿠 시대에 기이 국 북서부 사이카장원[雑賀荘] 일대(현 와카야마 시 사이카자키[雑賀崎])를 근거지로 하는 고쿠진·토호·지토 들이 결합한 잇키 집단이다. 사이카토[雑賀党]라고도 한다. 16세기 당시로서는 아주 많은 수인 수천 정의 철포로 무장하여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용병집단으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해운업과 무역에도 손댔으므로 정확히는 상인집단이라고 보는 쪽이 적합할 수도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A1%ED%95%98%EC%A4%91
유리히 17-04-10 22:03
   
서프라이즈에서 봤어요! 좀 오래전에 본거 같은데 다시 보니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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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4 [기타] [고증甲]프로 불편러들 때문에 사라졌던 고구려모드 … (1) 아비바스 11-25 520
19853 [기타] 일본, 중국, 한국의 고조선에 관한 역사기록들 검토 관심병자 11-24 520
19852 [기타] 식민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의 허구 (1) 관심병자 11-24 455
19851 [기타] 거란족, 거란 8부의 기원 관심병자 11-24 508
19850 [한국사] [FACT] 우리나라 사극에서 병력 고증 불가능한 이유 (1) 아비바스 11-24 473
19849 [기타] [FACT] 우리나라 사람이 병력 수에 둔감한 이유 아비바스 11-24 369
19848 [세계사] [FACT] 인류 최악의 선동꾼 "요제프 괴벨스" / 거짓말도… 아비바스 11-24 332
19847 [세계사] [FACT] 파멸을 위한 교육 : 2차 세계 대전 시절. 디즈니… 아비바스 11-24 290
19846 [기타] 황제헌원의 정체, 금살치우의 진실 관심병자 11-23 463
19845 [한국사] [FACT] 고조선 중기 군사력 (2) 아비바스 11-23 473
19844 [한국사] [FACT] 군사전문가 이세환 - 한국과 북한의 실제 군사… (4) 아비바스 11-22 540
19843 [세계사] [FACT] 군사전문가 이세환 - 지구상에 적수가 없는 미… 아비바스 11-22 337
19842 [한국사] [FACT] 군사전문가 이세환 - 전쟁나면 밝혀지는 실제 … (2) 아비바스 11-22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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