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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1 11:20
[기타] 청년 세도가의 개화 정책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497  

민영익은 17세에 문과급제를 하고 빠르게 승진하여 1878년(고종 15년)에 19세의 나이로 조정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매일 세 번씩이나 입궐했다고 한다. 그래서 죽동 그의 집 사랑에는 그에게 추부하는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영월루에서 바라본 남한강
영월루에서 바라본 남한강언덕 아래 강가에는 여흥 민씨 발생 설화로 잘 알려진 마암이 있다.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상리 소재.
뒷날 개화파의 맹장으로 활약한 김옥균(), 홍영식()을 비롯하여 이중칠(), 조동희(), 김흥균(), 홍순형(), 심상훈(), 어윤중() 등 쟁쟁한 노론 가문의 후계자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토론하며 국정을 논했다. 이들 여덟 명을 세상에서는 죽동팔학사()라 불렀고, 이들의 보좌로 민영익의 소년 세도는 날로 확장되었다.

1880년대 개화 정책은 민영익을 비롯한 이른바 죽동팔학사가 주축이 되고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북학을 학습한 중인 계층이 호응함으로써 추진되었다. 중인 계층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 전문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여 개화 정책의 행동대 역할을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의 행동 대원들은 거의 이들이었다.

민영익은 1880년(고종 17년)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 와서 보고한 일본의 서구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때 김홍집이 가지고 온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헌()의 『조선책략 』은 조야에 관심과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외교 전략에 관한 책자로서 지방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 상소를 촉발시켰다. 같은 해 12월 기존의 삼군부를 혁파하고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것은 『조선책략』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음 해(1881년) 2월 민영익은 통리기무아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4월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여 교련당상의 직책을 맡았다. 이보다 앞서 1월에는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등 12명의 조사에게 각기 통역관과 수행원을 붙여서 일본에 파견을 했다. 개화 정책 추진의 기초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면서 보낸 자주적인 사절단이었다. 이들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각 기관을 나누어 시찰하고 돌아와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한 일도 초기 개화 정책의 중요한 성과로 꼽을 만하다. 젊은 학도와 공장()들을 천진에 보내 서구의 이기들을 학습하게 한 것이다. 영선사로는 김윤식()을 임명했다. 신사유람단이 일본을 통한 서구 문물 수용의 시도라면, 영선사의 파견은 청나라를 통하여 선진 문물을 수용하던 기존의 통로를 계승한 것이다. 신사유람단이 개화 사상의 소산이라면 영선사는 북학 사상의 연장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해에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 영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도 영선사가 활약한 성과였다.

민씨 세도가 개화 정책에 편승하여 10여 년 간 지속되자 권좌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은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 복권하였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옛 군영 군인의 차별이 군란의 원인이었고, 민씨 정권이 통리기무아문ㆍ별기군 등 개화 정책 기관을 세도의 기반으로 이용함으로써 일반 지식층의 비판과 도전을 받게 된 결과였다. 군란 중에 명성황후는 충주로 피신했고, 민영익은 승려로 변장하여 양근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왔다.

군란이 끝난 뒤 민영익은 청나라에 다녀왔고, 1883년에는 조선보빙사 전권대신으로서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각지를 시찰한 뒤 미국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미군 함정을 타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1884년(고종 21년) 4월 귀국하자마자 그는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금위대장과 신군좌군영관을 겸임하여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기기국총판까지 맡음으로써 명실 상부한 세도 재상이 되어 개화 정책을 주도했다.

미국의 발전상에서 느낀 바가 많았던 민영익은 서울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지들의 배신으로 일어난 갑신정변은 그의 개화 의지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10월 17일 저녁 홍영식이 총판으로 취임한 우정국의 개설 연회에서 그는 심한 자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게 되었는데, 동석했던 독일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의 도움과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로 겨우 생명을 건졌다. 죽동팔학사로서 개화 의지를 함께 했던 김옥균이 자신의 제거를 주도하고, 미국에도 함께 다녀온 홍영식과 서광범 등이 자신의 제거 음모에 가담할 줄을 민영익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정국
우정국우정국을 무대로 이루어진 갑신정변은 안동 김씨 출신 김옥균 등과 당대의 세도 가문 출신 민영익이 확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소재.
김옥균은 안동 김문 출신으로서 연하의 세도 재상인 민영익에게 일말의 경쟁 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들은 1870년 후반부터 민영익의 죽동 사랑에 모여 개화 의지를 함께 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옥균에게는 안동 김씨 60년 세도에 대한 향수와, 안동 김씨 세도 복구의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는 부담이 있었다.

안동 김씨 가문에는 문중에서 가장 똑똑한 젊은이로 후계자를 삼는 관행이 있었고, 그 관행에 따라 김옥균은 강릉부사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충청도 공주에서 상경했다. 안동 김씨 세도 복구의 임무를 떠 안은 것이다. 김옥균의 기대는 개화 정책을 안동 김문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긋났다. 개화 정책이 민씨의 세도 구축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눈치채게 되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는 사이에 김옥균을 부추기며 개화파의 분열을 획책했다. 일본에게 조선의 자주적 개화와 그에 따른 부국강병이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일본공사의 공작은 김옥균의 권력 의지를 일깨웠고, 결국 갑신정변으로 낙착되었다.
민영익, 「석죽」
민영익, 「석죽」종이에 수묵, 82.0×150.5cm, 간송미술관 소장.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모든 희망을 포기한 뒤 한묵을 즐기며 난초와 대나무로 상하이의 예원을 압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년 세도가의 개화 정책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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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7-04-21 12:27
 
여담이기는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죽다 살아난 민영익이 그후 고종과 민비의 친러정책을 수행하다가
청나라 원세개로부터 위협을 받아 상해,홍콩 등지의 국외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고종과 민비가 그에게 부여한 홍삼독점판매권을 배경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마어마한 거부로 여생을 보낸 후 국권침탈 이후인 1914년 상해에서 객사합니다.

민영익이 객사한 후 홍삼판매로 벌어들인 막대한 유산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는데
물론 그중에 상당한 액수는 민영익 생전에 이미 고종의 비자금 용도로 제공된 것은 확실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평균 몇 년치 수출총액 또는 탁지부 몇 년치 예산 규모에 해당하는
막대한 유산이 여전히 남겨졌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민영익의 유산은 특히 상해임시정부수립 이후에 자금부족에 시달리던 임정요인들에게는 더욱 절실했는데
임정요인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민영익이 생전에 수입의 대부분을 상하이영상회풍은행에 예치해 놓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상하이영상회풍은행은 홍콩상하이은행의 전신으로 오늘날의 HSBC은행입니다!   

민영익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민정식을 설득해 앞세워 상해와 홍콩의 민영익 이름의 계좌와 은행개인금고를
개봉하게 되는데....... 상해와 홍콩의 은행금고 모두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은 소송관련 서류뭉치밖에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것은 민영익이 객사한 1910년대를 거치며 HSBC(홍콩상하이)은행이
중소은행에서 굴지의 대형은행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민영익 뿐만 아니라 1910년대의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청조가 멸망하고 군벌들이 난립하는
격변의 시기라 중국의 수많은 거부들 또한 격변에 휘말려 제명에 못살고 비명횡사하는 일이 잦았는데.....

당시의 HSBC(홍콩상하이)은행이 자기은행에 예치하거나 금고를 두었던 민영익을 포함하여
시대적 격변으로 비명횡사했던 여러 중국인거부들이 남긴 임자없는 예치금과 금고내용물을
꿀꺽했다는 혐의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오늘날 세계굴지의 은행이 된  HSBC은행이 급격히 성장한 배경에는
민영익의 유산도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는 것이죠~~~

믿거나말거나에 가까운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꼬마러브 17-04-21 12:36
 
오..흥미롭네요
mymiky 17-04-21 16:01
 
갑신정변은 근대화개혁을 시도한 것에, 의의와 긍정적인 면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따져보자면, 그 수단과 이후에 끼친 해악이 너무 큽니다.

첫째, 일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거 자체가,,,
일본이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남의 나라 반정을 공짜로 지원할까요?;;

결과적으로도 애초 그들이 목표였던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만 낳았죠.
개혁을 시도하려면 민중들 지지를 얻어야하는데,
왕을 위협하고 신하들을 죽여대며 일본외세를 끌어들이니 누가 좋게 볼까요?

이것은, 현대 기준으로봐도 외환죄를 범한 반란세력입니다.

**외환죄- (외환(外患)을 유치하거나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하거나,
적국에 이익을 제공하여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범죄)

이같은 뻘짓으로, 이후 [개화세력=역적]이란 여론이 생기며 개화추진 동력만 떨어졌죠.

더욱 웃긴건, 저들이 죽이거나 미수로 그쳤던 대상들도 따지고보면
노선와 속도 차이만 있지.. 엄연히 개화파였단 겁니다.

예를 들자면,, 근대화 한다면서
고종이 개항이후 근대화 추진하면서 참여했던 김윤식 같은 사람들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아군의 팀킬이 따로 없죠.
애초 갑신정변이 벌어진 곳이 근대 우편기관인 우정총국 개관축하연으로
여기 참석한 인원들 거의 개화파들이었는데;;;

정리하자면, 어설프고 잘못된 방법으로 빨리 정권잡으려다
아까운 인재들만 죽이고 근대화만 오히려 후퇴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갑신정변 이후에 개화파들이 싸그리 멸종했음.
이후 청의 간섭만 심해지고 일본한테도 배상금을 물어줬습니다.

이후 조선의 모든 개화정책이 정지됐고, 수도 한양에서 개화라는 말 조차 못 꺼냈으며
소수의 일본 유학파 지식인들도 조선에서 제대로 활동도 못해보고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즉, 1885~95년까지 조선의 잃어버린 10년이 됐죠.

정변 직후 발표한 정강14조는 물론, 놀라울정도로 혁명적인 정책입니다만.

문제는 정변 이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국을 어떻게 틀어 잡을지? 정변의 핵심인 일본과는 어떻게 소통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에 옮긴겁니다.

고작 2~300명의 병력으로 궁궐을 장악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거 자체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정작 청군이 창덕궁으로 쳐들어왔을때 일본군은 도망가 버리고
박영효가 이끌고 온 애꿎은 별기군들만 난사당했죠.

또, 하루 아침에,
규장각이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하면서, 유생들과 중인들 같은 상위 계급에게도 불만만 샀습니다.

어느 누구하나, 지지를 못 받고,믿었던 일본마저 뒷통수를 치니..
혁명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던 겁니다.
     
그노스 17-04-21 16:37
 
격하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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