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절약생활과 각종 주변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올려본다. 여기에 올린 글들은 이미 책자나 각종 자료, 인터넷 등에서 여러차례 나왔고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든 내용들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을 수도 있지만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말고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면 받아들이고 수정을 할 생각이다
우리가 선대에게 배우는 것은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배우면 된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나쁘게 주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요점이 없다. 있다면 군사독재를 했다는 주장밖에 없다. 항상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객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 때 당시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잘못 배운 것이라고 본다.
군사독재를 했건 민주투사이건 간에 어느 역대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만큼 생활하고 통치를 했을까 ? 그가 여론조사에서 항상 1위로 나오는 것은 국민들이 모두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세대가 많이 죽고 신세대가 주축인 지금 박정희가 1위로 나오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 앞으로는 어떤 평가가 이루어질까 ?
----------------------------------------------------------------------------- ------------------------
[공짜를 싫어하는 대통령]
고 박정희 대통령은 공짜를 매우 싫어하셨다고 한다. 권력자가 되면 당연히 공짜였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는 판에 군부독재시대때는 당연히 그렇지 않겠냐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아니엇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통령 경호차가 요금을 내지 않고 지나가면 경호실장을 혼냈다. 그 뒤로는 반드시 경호 선도차에서 대통령 일행의 통행료를 한꺼번에 지불하곤 했다. (요즘은 어떤지 ?)
[국산애용과 한 번 사면 다 떨어질 때까지, 수선해서 사용]
박대통령은 옷가지와 구두를 꼭 돈내고 맞추어 신고 있었다. 와이셔츠는 삼도물산, 트레이닝복은 한일합섬, 양복은 세기양복점, 구두는 금강제화의 제품을 썼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축농증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었다. 몸무게가 4kg쯤 불어 64kg쯤 되었다. 헌바지의 허리쪽을 늘리는 수리를 해서 계속 입고 다녔다.
꼼꼼한 성격의 박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자로 허리를 잰 다믐 부속실 직원을 불러 『요 만큼만 늘리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단순한 스타일의 복장을 좋아했다. 양복 웃옷은 뒤에 한 줄로 가른 것을 입었으며 구두도 고전적인 투박한 형식이었다. 국산시계를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칼국수, 국수, 비빔밥를 좋아했던 대통령]
박대통령은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칼국수를 좋아했던가? ) 점심의 태반은 국수로 때웠다고 한다. 반찬이라야 김치, 깍두기 정도로 단출한 칼국수점심이었다. 박대통령에게 초대받아가면 배고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요리사들이 칼국수에 새알크기의 쇠고기덩어리를 서너개씩 넣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어린 시절 선산에서 즐겨 먹었던 비름나물 비빔밥을 그리워하였다. 청와대직원들은 비름나물을 구하기가 어렵자 청와대 터밑에 비름나물을 심었다. 박대통령은 간식을 거의 먹지 않았으나 커피를 좋아했다.
[양주가 아니라 막걸리를 좋아했던 대통령]
박대통령이 최후의 반찬자리에서 양주를 마셨기 때문에 시바스 리갈과 같은 양주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때 시바스 리갈 ~ 국산양주는 고등학생들 소풍갈 때도 가져갔다. 식품점에서는 얼마 안했다. 술집에서는 비싸겠지만..지금 국산양주가 이마트 매장에서 2만원 하면 술집에서는 20만원 한다.
사실 박대통령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 양조장에서 만든 빽빽한 막걸리를 가장 즐겨 마셨다. 대통령부속실직원들은 대통령이 막걸리를 과음할까봐 신경을 썼다.
[골프 대신 배드민턴으로 바꾸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가서는 골프를 자주 치지도 않았다. 대통령 행차 때문에 교통이 통제되고 수십명의 직원들이 후일에 동원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배드민턴으로 바꾸었다.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키다]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밀어닥치자 박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켰다. 그 더운 한 여름에도 창을 열어두고 부채와 선풍기로 견뎠다. 겨울의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난방기 가동이 제한되어 늘 한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그린벨트 등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에 의한 작품]
박대통령의 머리에는 자나깨나 국정에 관한 구상이 들어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건설, 포항종합제철 건설, 그린밸트 설치, 제주도 개발, 경주개발 등은 순전히 박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에 목숨을 걸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정치인(대표적인 인물: 김대중, 김영삼 등 지금 정치인들 상당수)들의 과오에는 관대하고 박대통령의 치적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그런 분위기에 살고 있다.
[죽을 때 발견된 양변기의 벽돌 한 장]
오일 쇼크 한파가 한국을 기습한 74년초, 중앙청 무역진흥확대회의에 들어서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장예준 상공장관에게 속삭였다. "이봐, 온나라가 에너지 절약에 한창인데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봤어. 지금까지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세수했는데 이젠 물을 받아놓고 해야겠더군. 그리고 말야, 양변기 있잖아. 그 물통 안에 벽돌을 한장 넣어두면 그만큼 물이 절약되지 않을까. 그 두가지를 요즘 실천중이야. " 유명한 "박정희의 양변기 벽돌" 은 그렇게 시작됐다. 벽돌은 79년 10월26일 그가 서거한 후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다시 등장한 야전 점퍼]
중동전쟁으로 오일 쇼크가 터진지 한 달 후인 73년 11월8일 정부는 국민.기업.정부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에너지 10% 절감운동을 발표했다. 朴대통령과 청와대가 운동에 앞장섰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金正濂) 씨의 기억이다. "朴대통령이 근무하고 기거한 청와대 구본관 (현정부가 헐었음)은 난방 온도를 낮추고 전등불을 줄여 춥고 컴컴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서 5.16혁명 때 입었던 그런 야전 점퍼를 입고 일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의 샹들리에 (천장 전등) 도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고 서류를 봤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절약을 실천하니 장관과 공무원들도 자연히 따랐다고 한다. 실장방엔 인왕산쪽으로 창문이 나있어 그는 스탠드조차 켜지 않았다. 장예준장관은 "정부청사도 전등을 형광등으로 바꿨고 그나마 줄여서 켰다. 나도 겨울 내복을 꼭 껴입고 다녔다" 고 회고했다.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말한 증언]
"박 대통령, 그 양반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런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 부분이 해져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 허리띠는 또 몇십년을 사용했는지 두세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고 구멍은 늘어나 연필 자루가 드나들 정도였다니까요. 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파리채를 든 에피소드]
김정렴(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말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여름에 대통령 집무실에서 늘 파리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집무실의 에어콘을 전기 아끼느라고 틀지 않고 늘 유리창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밖에서 파리들이 날아 들어와서 늘 파리채로 잡거나 쫓아야 했던 것이다. 세상에 어느 최고 통치권자가 그 집무실에서 파리채로 파리를 쫓으면서 집무를 하였을까.
[박대통령 서거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군의관 정규형의 증언]
박 대통령이 서거 당시 서울육군통합병원의 당직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자신이 10.26 당일 담당한 응급 환자가 대통령이었던 사실을 몰랐던 이유에 대해 합수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어져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후속정권들이 박정희에 대한 부정부패 들추기 불구 보이지 않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최고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내내 국민들에게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서거 이후에 국민들 속에 남아 있는 그의 향수를 지우기 위해 후속 정권들이 집요한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중 본인의 부정축재나 권력남용형 비리 사실이 들리지 않는다, 택시 운전수들이 역대 대통령은 욕해도 박정희는 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축농증 수술 - 시간 걸린다고 마취하지 않고 해]
66년도 쯤인가 박대통령은 평소 측농증증세가 있었다. 어느 날 낮에 시간을 내어 서울대학병원으로 차를 타고 가서 수술을 했다. 수술하기 전 박대통령은 의사에게 몇 시간이나 걸리겠냐고 물었더니 의사말이 수술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나 마취깨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답하자 박대통령은 "그러면 마취하지말고 그냥 하시요, 그렇게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어딨나" 놀랜 의사가 그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안 된다고 하자 박대통령은 고집대로 마취하지 말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자고 우겨서 기어이 마취없이 그대로 했다.
[혜화동의 막걸리 할매집]
70년대 중반쯤에 혜화동 로타리 근처의 막걸리집은 박대통령이 애용하는 단골집이었다. 죽마고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고심이 있으면 조용히 여기를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 막걸리집 주인은 박대통령인줄 몰랐는데 박대통령이 혼자 들어와서 막걸리 한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삼아 마셨다. 조금있다 막걸리주인이 부스럭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박대통령이 막걸리독에서 직접 또 한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리에서 동전을 꺼내어 계산하고 나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
[영국 런던의 도시계획 직접 시찰 권유에 돈도 없는데]
이동원비서실장이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시 오는 길에 바로 옆에 있는 영국의 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번 보시는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 했다.(이동원 회고록에서)
[교사 시절 때의 에피소드]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어느 날 학교근처에서 여학생이 물에 빠져서 야단이 난 적이 있었다. 교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 어깨에 트럼펫을 맨 어느 선생님이 트럼펫을 맨채로 물에 뛰어들어 그 여학생을 구했다 한다, 그 선생님이 박정희선생님이었다고 당시의 학생이 증언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99년 KBS프로에서)
대구사범학교시절의 학생기록부에 "일본인교사에게 반항적이며 불손하다."고 적혀있다 "(99년 KBS 제작프로에서) 당시 동급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항시 나폴레옹사진을 가지고 다녔으며 프루타크 영웅전을 손에 들고있던 걸 기억한다고 증언
[문세광 사건 때]
문세광이 쏜 총알이 연설대 모서리를 맞고 튕겨나가자 그때서야 위급함을 알아차린 박통은 얼른 자세를 낮춰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종료되자 박대통령은 아까 읽던 문장의 단어까지 정확하게 찾아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침착하게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연설문을 읽고난 뒤에 무대위를 훑어보고는 육여사의 신발을 발견하곤 주워서 손에 든 채로 걸어나갔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다 총맞을 뻔 해]
자유당시절 장군들끼리의 회식자리에서 박통이 이승만을 비난하자 다른 장군이 흥분해서 권총을 꺼내어 "이 새끼. 금방한 말 취소해, 안 하면 죽이겠어!"하고 소리지르며 머리에 권총을 갖다대자 모두 놀라서 숨죽이고 봤다. 박대통령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앞에 있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서 붓고는 태연하게 마셨다. 권총을 겨누고 있던 그 장군은 한참 있다 스스로 권총을 내렸다.
[가수 심수봉의 증언]
김재규의 총을 가슴에 맞고도 꼿꼿한 자세로 그대로 있어서 옆에 있던 심수봉은 총알이 빗나간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앞으로 쓰러지자 놀란 심수봉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자 "응, 나는 괜찮아."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후 유족들의 차 대접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얼마뒤 朴대통령의 일본지인들이 서울신당동으로 유족들을 위로방문한 자리에서 차대접을 받는데 이 사람들이 가만보니 찻잔하고 잔받침하고 하나도 짝이 맞는게 없더라는것입니다. 이에 이 일본인들은 "아! 박정희는 죽어서도 교훈을 주는 사람"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는것입니다. 18년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집에 제대로된 다기세트 하나가 없으니 놀랄수밖에요.
[유가파동시 부채사용으로 무더위를 견디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M-16 자동소총 과 박정희]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월남전참전 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나라가 지금 일부 사람들의 데모의 대상이 되는 미국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였고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