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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4 10:09
[기타] 몽골군 10진법 통한 명령체계의 단순화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541  

"보잘것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하라"
 
알타이산맥과 파미르고원 두 곳의 고원지대를 제외하고 동서로 8000km에 달하는 광활한 초원지대는 만주와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기마유목민들은 오래 전부터 국가를 이루며 세계사의 주역이 되어 왔다. 특히 칭기스칸에서 출발하는 몽골족은 기동성, 체제의 단순화를 통해 유럽까지 진출하며 몽골 대제국을 형성했다.
 
김영학 leptile@
 
 
몽골군의 적 추격모습, <집사(集史), Jami' al-tawarikh>에서 발췌, 라쉬드 알 딘(Rashid al-Din), 1211
 
 
기마유목민족의 진원지는 몽골고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기마군단이 출현한 시기는 약 BC 8세기경으로, 18세기까지 동서양에 걸친 광활한 초원지대(유라시아 대초원)과 그 주변을 지배하며 세계사의 주역이 됐다. 그들은 총포를 필두로 한 화기의 등장이 있기 전까지 수많은 강국을 건설했다. 서쪽으로는 흉노(匈奴), 훈(Hun), 돌궐(突厥), 위구르(Uighur), 토번(吐蕃), 서하(西夏), 셀주크투르크(Seljuq Turks), 오스만투르크(Osman Turk)가, 동쪽에서는 선비(鮮卑), 5호16국(五胡十六國), 수(隋, 선비), 당(唐, 선비), 요(遼, 거란), 금(金, 여진), 원(元, 몽골), 티무르(Timur), 무굴(Mughul), 후금(後金, 청) 등이 건국됐다. 

지금은 몽골고원에 사는 이들을 몽골족(Mongol, 蒙古族(몽고족))이라 부르지만, 칭기스칸(Chingiz Khan, 1162~1227)이 제국을 건설하기 전까지 몽골족은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의 부족에 불과했으며, 다른 부족에 비해 월등히 강하거나 뛰어나지도 않았다. 이들 부족은 항상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고, 몽골고원을 둘러싼 나라들은 항상 부족들을 이익에 따라 압박했다.

라쉬드 알 딘(Rashid al-Din)은 1211년 저서 〈집사(集史, Jami' al-tawarikh)〉를 통해 몽골족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거 몽골(Mongolia)이라 불리던 투르크(Turk)족은 다른 투르크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에서 패하고 각각 두 명의 남녀만이 살아남게 됐다. 이 두 쌍은 다른 투르크족들을 피해 좁고 험난한 외길밖에 없는 목초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초원인 에르게네 쿤(Ergene Kun)에 숨어 살게 됐다. 두 쌍은 점차 시간이 흐르며 협곡에서 모두 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무리를 형성하게 됐다. 그들은 넓은 초원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집사〉에서 언급된 몽골족의 기원이다.
 

 
몽골제국의 시작
유목민족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바로 칭기스칸의 등장 때부터였다. 테무진(鐵木眞)은 1189년경 자신의 부족에 이어 여러 씨족들을 통일하고 1206년 부르칸 칼둔(현재의 헨티산맥(Hentiynn Mts)) 성산(聖山) 근처 오논강(Onon River) 원류에서 몽골 최고 결정기관인 쿠릴타이(Khuriltai)를 열어 칭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했다. 그 후 주변의 타타르(Tatar), 메르키트(Merkit), 케레이트(Kereit), 타이치우트(Taichiüd) 등을 정복하고 나이만(Naiman)족을 멸망시켜 세력을 확장, 몽골고원을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대칸(大汗) 지위에 오른 칭기스칸은 국가기구를 개혁해 유목민을 95개 천호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했다. 또한 부족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의 금지, 종교의 자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관계를 확대했으며, 부족이나 민족 단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몽골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군사제도를 관료제로 개편한 것도 이때였다.

이어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를 굴복시키고 1211년 금나라를 향해 진격, 1215년 금나라 수도인 중도(中都, 현재 베이징)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나아가 칭기스칸은 호라즘 샤(Khwārizm-Shāh) 왕조의 정벌에도 나섰다. 호라즘과는 교역을 위한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사절단 일행이 학살된 것을 계기로 서방세계에 대한 대원정을 감행, 그 결과 호라즘 국왕은 죽고, 왕자 역시 패한 후 인도지방으로 도망쳤다. 이때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며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동시에 전답과 화원, 관개시설을 모두 파괴했다. 몽골군은 진격을 계속해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크림반도를 침공했으며 서하 토벌에도 나섰으나 칭기스칸은 1227년 병사하고 만다.

칭기스칸은 영토를 아들과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그의 뒤를 이은 칸은 오고타이(Ogotai, 1185~1241)칸이었다. 그는 금나라의 나머지 세력과 전쟁을 재개해 금을 멸망시켰다. 1231년 고려를 침입한 것도 오고타이 칸 시대였다. 하지만 칭기스칸이 죽은 후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멸망했던 나라들은 다시금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고타이칸은 쿠릴타이를 열고 대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총사령관은 칭기스칸의 맏아들 주치의 아들인 바투(Batu,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의 제1대 군주, 1207~1255)였으며 기병대 5만 명, 투르크계 보명 7만 명으로 구성된 대군을 편성했다. 몽골군은 서아시아부터 유럽, 러시아까지 정복하고 폴란드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징발한 병사를 합류시켜 15만 군대를 만들었다.
 
가벼움 vs 무게감, 대전투의 서막
당시 유럽은 때때로 십자군을 일으켜 이슬람을 침공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몽골군은 악마의 군대나 마찬가지였다.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유럽 전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241년 헝가리의 왕 벨라 4세(Bela Ⅳ, 1206~1270)는 서신을 한 통 받았다. 주인공은 ‘하늘의 사자’라고 소개된 바투였으며, 그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잘것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하라.”

벨라 4세는 깜짝 놀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 1165?~1241)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몽골군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15만 명에 달하는 몽골군은 둘로 나뉘어 1241년 4월 초, 헝가리에서 500km 가량 떨어진 폴란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의 레그니차(Legnica)와 헝가리의 모히(Mohi)에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슐레지엔의 대공(大公) 하인리히 2세(Heinrich Ⅱ)는 바빠졌다. 그는 폴란드와 유럽 각국에서 군사를 모아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레그니차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발슈타트(Wahlstatt)에 포진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이 뚫리면 몽골군은 독일로 밀려 들어올 것이고, 그로 인해 유럽 역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 눈에 보였다.

하인리히 2세는 각각의 출신 국가별로 5개 부대로 나누어 사다리꼴로 배치했다. 제1진은 폴란드 농민들로 구성된 보병대였으며, 그들의 임무는 몽골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2진과 제3진은 지방 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기사와 그들의 종자, 그리고 영지에서 징병한 농민 보병들로 구성했다. 그리고 승부를 마무리할 부대로 제4진은 중장갑 기병인 튜튼 기사단(Teutonic Order)으로, 제5진은 중장갑 기병인 폴란드 기사단과 독일의 용병부대로 구성했다. 하인리히 2세는 제5진을 본진으로 삼았다.

당시의 중장갑은 아직까지 온몸을 빈틈없이 가릴 판금 플레이트 메일이 출현하지 않을 때여서 두텁게 짠 몸통 옷에 금속고리를 엮어 붙인 사슬갑옷이었다. 이 갑옷에 사용된 쇠고리는 3만 개 가량으로 무게는 9~10kg에 육박했다. 여기에 금속 투구와 3미터 이상의 장창인 랜스(Lance)를 들고 있었다. 또 십자무늬를 한 무거운 장검 또는 도끼나 메이스를 휴대했다. 한마디로 무겁고 힘이 있지만, 그만큼 기동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말에도 사슬갑옷을 입혔다. 보병의 무기는 도끼, 곤봉, 조잡한 창이 전부였다. 한편 기사들은 투척용 무기를 휴대하지는 않았다. 랜스, 메이스, 장검이 자부심을 상징한다고 믿었으며, 강한 적의 기사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으므로, 투척용 무기는 보병의 것이며 경멸의 대상이기도 했다. 보병의 투척무기는 대부분 노였다. 10세기경부터 사용된 노는 기계식 발사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명중률과 사정거리가 뛰어났으나 1분에 2대 밖에 쏘지 못한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유럽군과 모든 것이 반대였다. 15만 명의 몽골군은 3만 명씩 총 5개의 군단으로 나눠 사다리꼴로 배치된 유럽군을 포위하는 횡대 대형으로 진형을 구축했다. 유럽군의 입장에서 볼품없는 조랑말에 변변한 갑옷도 걸치지 않고 짧은 반달모양의 칼과 반궁(半弓)으로 무장한 몽골군의 모습은 지옥에서 온 군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정면에 나선 몽골군의 지휘관은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Chaghatai, 차카타이한국의 초대 왕, ? ~ 1242)의 아들 바이탈이었다. 바이탈은 유럽군이 5단 진을 형성하고 각 단별로 방어선을 구축해 몽골군에 대항한다는 전술을 간파했다. 바이탈은 유럽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전선을 압박할 기병으로 구성된 소부대를 편성했다.
 
 
유인전법에 놀아난 유럽군
레그니차전투(Battle of Legnica)의 시작은 유럽군의 제1진을 지휘하는 모라비아 변경백(Margraviate of Moravia)의 아들 볼레슬라프(Boleslav)가 공격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볼레슬라프 입장에서 몽골군은 외소하고 격식도 없어 보였다. 비록 수적으로 열세이나 이러한 군대를 상대한다면 승리는 장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몽골군도 징을 울리며 기병대를 투입시켰다.

선두에 선 유럽군 보병이 노를 발사했고 몽골군 기병 몇몇이 말에서 떨어졌다. 이에 랜스를 쥔 기사들이 돌격하자 몽골군은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기세를 탔다고 판단해 몽골군을 뒤쫓아 달려나갔다. 전쟁의 공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제2진도 몽골군을 뒤따라 갔다.

그런데 당황한 것은 몽골군이 아니라 하인리히 2세였다. 그는 대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해 제1진과 제2진의 돌격을 제지하려 했으나 여라 국가들의 출신으로 구성됐던 것과 아직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유럽군에게 명령은 쉽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군과 몽골군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몽골군 전위부대는 전원이 경기병으로, 단 한 명의 보병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말과 함께 살아온 이들은 기동성이 뛰어났던 반면, 유럽군은 중무장한 기사와 중장비를 갖춘 종자가 딸린 농민병까지 있어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몽골군은 유럽군에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며 유인했다. 그렇게 몽골군을 뒤쫓아가다 보니, 제1, 2진은 어느새 본진과 떨어진 벌판 한 가운데로 나오고 말았다.

‘아차!’라는 탄성이 나올 무렵, 앞쪽에서 하얀 기가 올라오더니 갑자기 수만 명의 몽골군 기병들이 함성과 함께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거짓후퇴로 유럽군을 유인에 앞장선 기병들도 말머리를 돌려 전장에 합류했다. 기병들의 함성소리에 이어 유럽군을 공격한 것은 비 오듯이 쏟아지는 화살들이었고, 방어책과 진열을 잃은 유럽의 제1, 2진은 화살 세례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화살촉에 독까지 발라놓을 정도로 치밀했던 몽골군에 유럽군의 전진부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거짓패주에 의한 유인전법은 몽골군의 주특기였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군에 대한 학익진을 펼치되 이들을 복병으로 숨겨두고 소병력의 전위부대만 먼저 내보내 적을 유인하게 된다. 이렇게 적의 병력을 분리한 후 대규모 기병집단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평원으로 유인, 복병으로 좌우에서 돌격하게 된다. 그리고 패주를 맡은 전위부대는 뒤 돌아서 적의 전진을 막는다. 이것은 초원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터득한 인력의 중요성으로 인해 전쟁에서의 인력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필살전법이었다.

유럽군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급함에 제3진을 진격시켰지만,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몽골군이 제3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력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몽골군이 적을 분단시켜 섬멸시키는 모습은 유럽군 입장에서 비정하고 냉혹한 전법이었다.

하인리히 2세가 계획한 전군 삭감전법은 역으로 몽골군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비참했다. 유인책에 걸려 전력이 줄어들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분산됐던 몽골군이 집결해 대규모 집단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2세는 승부수를 띄웠다.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만큼은 막고 싶었을 것이다. 최후의 필승조로 남겨 두었던 제4, 5진에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자긍심이 높은 듀튼 기사단과 폴란드 기사단, 그리고 독일 용병부대가 일제히 앞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기사의 시종과 농민들로 이뤄진 보병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의 최대강점은 기동성임에도, 유럽군은 그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로 편성되지 않았다.

아무리 유럽군이 정예부대이긴 하나 개인의 무용담과 가문의 격식을 차리는 보수적인 집단이었던 데 반해, 몽골군은 가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앞의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성과였던 능률적인 전투단위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기병대가 충돌하기 전, 먼저 포문을 연 것은 화살들이었다. 몽골군 기병대는 먼저 반궁의 속사 능력을 활용하며 석궁을 든 유럽군의 보병들을 해치워 나갔다. 아무리 석궁의 힘이 강해도 1분에 2발 정도 밖에 발사하지 못하는 보병에 비해 몽골군은 말을 타며 1분에 10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이어 제물이 된 것은 말을 탄 기사들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화살을 쏘는 몽골군을 유럽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화살촉에 독을 발랐던 터라 조금만 스쳐도 전력상실로 이어졌다. 말이 화살에 맞아도 타격이었다. 말에서 떨어져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휘두르기에 급급한 유럽군 기사들은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하인리히 2세는 쓰러져가는 부대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돌격을 지시하지만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의 목소리는 전장에 파묻히고 말았으며, 퇴각하기 시작하는 기사들이 나오자 혼란은 가속화됐다.  유럽군은 혼란에 빠졌고 바이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추격 명령을 내렸다. 몽골군 기병의 공격에 연합군의 모든 전선은 붕괴됐고, 하인리히 2세는 날아온 독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하인리히 2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목은 참수되어 몽골군 깃대에 높이 매달렸다.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레그니차전투에 이어 바투는 모히 전투(사조강 전투)에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5~6만명의 유럽 연합군을 격파해 나갔다. 하지만 원나라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회군 명령이 내려지면서 몽골군의 유럽원정은 여기서 끝을 맺게 됐다. 몽골군의 유럽원정으로 교황청에서는 제7차 십자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기마병의 효율성을 높인 명령 단순화
몽골족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의 대표적인 전투방법 중 하나는 바로 청야전법(淸野戰法)이었다. 청야전은 전쟁에 돌입하기 전, 농지를 모두 불태워 식량을 없앤 후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즉, 먹을 것이 없어진 공격군과 성 안에서 들어간 수비군간의 버티기 전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는 공격군의 역량이 뛰어날 때 수비군이 자주 이용하는 전략 중 하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군대에서 보급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몽골군에게는 보급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주로 말이나 양을 포로 뜬 후 말 방광에 보관했다가 물을 끓인 후 불려 먹었다. 방광 한 개 분량으로 몽골군은 개인이 90~100일 정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몽골군에는 별도의 보급병 없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다. 보급병과 함께 몽골군 전력의 핵심은 기병에 있었다. 몽골족은 전통적으로 말을 다루는데 능숙했다.
 
말을 운용하면서도 활쏘기에 능했기에,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기사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기병을 주축으로 한 전술운용은 쉽지 않았다. 보병에 비해 명령전달이 어려웠으며, 여러 부족들의 통합으로 이뤄진 군대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지휘체계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형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10진법 체제라는 관료제를 도입했다.

관료제는 철혈정책으로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가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관료제는 대규모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그리고 관료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모습을 나타냈다. 비스마르크의 관료제가 피라미드형 구조였다면, 조선시대 관료제는 사다리구조로 명령체계가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나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왕이 부재할 경우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체제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칭기스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203년 주변 씨족들을 통합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부족들로 얽히고 설킨 조직을 관리하는 데 있어 지휘체계와 명령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10진법 체계의 관료제를 완성시켰다. 몽골족의 10진법 체계는 몽골 군대와 부족을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카트(1000호), 투멘(1만 호) 체제로 재편한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체제 하에서 칸이 명령을 내리면 밑의 아르반 10명이 각각 10명씩 총 100명의 자군에게 명령을 전달하게 된다. 자군 100명은 각각 10명으로 구성된 밍카트 1000명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명령을 전달받은 밍카트는 10명씩 구성퇸 투멘 1만 명에게 명령을 전달할 수 있도록 체계의 단순화를 이룬 것이다.

이는 군사조직 역사상 최초로 관료제를 도입한 것으로, 이 덕분에 몽골군은 신분, 성과보상, 능력 등에 따른 선발제도가 자연스럽게 도입됐다. 각 체제에서 아르반, 자군, 밍카트, 투멘은 제대로 통솔을 하지 못할 경우 그들의 처자식과 함께 죄를 물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 10호, 100호, 1000호, 1만 호에서 임명됐다.

몽골군은 특히나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군대였다. 따라서 전투에서 어떤 전략을 사용해도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용인됐다. 즉 기습, 야습, 도주, 후퇴 등이 허용된 유일무이한 군대였던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 그리고 현재까지도 도주나 후퇴는 군인으로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도주와 후퇴를 밥 먹듯이 하다가 다시 모여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다른 국가들의 체제와 문화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상식 밖의 행동으로 이러한 모습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몽골군이 도주와 후퇴하는 전법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인명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후퇴를 했고, 근거리무기보다 원거리 무기를 우선적으로 사용해 인명손실을 줄였다. 더군다나 몽골군은 먼저 무조건적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상대방에게 먼저 항복여부를 물었다. 항복을 하면 자비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무자비했다.

약탈과정에서도 체계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그들은 개별적 행동보다는 집단적으로 약탈을 감행한 후 모두 모여 약탈품을 세세하게 나눠 배분했다. 심지어 배분의 공정성을 위해 아랍의 수학자를 등용해 배분작업을 맡길 정도로 평등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특히 살아있는 군인뿐만 아니라 죽은 군인의 가족에게도 배분함으로써 ‘내가 죽더라도 가족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심어줘 사기를 진작시켰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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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 17-04-24 14:09
   
대신 기마병의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순간에는 유럽군과 싸워 털릴 때도 있었죠.

몽골군이 무적은 아니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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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6 [한국사] 네이처(NATURE) - 한국인의 기원은 요서, "트랜스유라시… (21) 아비바스 09-18 1548
19765 [한국사] 한국,일본은 전혀다른 유전자 금성신라 09-18 1537
19764 [한국사] 제3차 여몽동맹(한몽동맹) 진행중 ㄷㄷㄷ 금성신라 09-18 1162
19763 [한국사] 마광팔, 디씨로 돌아왔네요 (2) doprsr 09-15 991
19762 [한국사] 대고조선제국(大古朝鮮濟國) 다큐 아비바스 09-05 1311
19761 [한국사] 기황후, 천추태후 이런 사극들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 천의무봉 09-03 1235
19760 [한국사] 대고구려제국(大高句麗帝國) 다큐 아비바스 09-03 1181
19759 [한국사] 고대 한국인, 예맥제국(濊貊帝國) (1) 아비바스 09-02 1299
19758 [한국사] 알려지지 않은 고조선(古朝鮮) 설들 아비바스 09-02 961
19757 [한국사] 역사 매국부역에 지분 태우지 말라 (1) 금성신라 08-23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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