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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4 11:14
[기타] 서북면병마사 박서, 몽골군의 침략을 맞이하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841  

서북면병마사 박서, 몽골군의 침략을 맞이하다
 
박서는 본관이 죽산(-죽주, 안성시 죽산면)으로, 1202년 신라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박인석(, 1143〜1212)의 7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호부상서()를 연이어 배출한 정통 문반 가문 출신이자만, 부친 박인석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호걸다운 면모를 갖고 있었다. 박서 역시 아버지를 닮아 도량이 크고 무예에도 능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3품직인 서북면병마사(西使)의 직책을 맡아 1231년에는 병마사영(使)이 있는 귀주(, 평북 구성시)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1231년 8월 초, 살리타(, ?~1232)를 원수로 한 몽골군 3만이 고려를 침범해왔다. 귀주는 1019년 강감찬(, 948~1031) 장군이 거란군 10만을 대파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몽골군의 공격을 당하지 못한 정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귀주로 모여들었다. 이에 몽골군은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고, 일부는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9월 2일, 몽골군 1만은 귀주성을 사면에서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귀주성의 군사는 5천에 불과했지만, 박서는 단호하게 항복을 거절했다.
 

귀주 1차 전투

다음날부터 몽골군이 공격을 감행해오자, 박서는 군사를 3방면으로 나누었다. 김중온의 삭주()부대는 성의 동편을, 김경손의 정주부대는 성의 남면을, 자신은 직접 북문의 수비를 지휘했다.
9월 4일, 몽골군은 운제(), 당차() 등 공성무기를 동원해 성문을 공격해왔다. 고려군은 화살과 발석차()로 사격을 가해 적을 저지하는 한편,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때 고려의 위주부사 박문창()이 몽골군에게 생포를 당하고 말았다. 몽골군은 그에게 귀주성으로 돌아가서 항복을 권유할 것을 시켰다. 그러자 박서는 즉시 박문창의 목을 베어 몽골군 진영에 보냄으로써 항전 결의를 더욱 다졌다.
몽골군은 정예 기병 300명으로 북문을 공격하는 한편, 수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앞장세워 엄폐물로 삼아 성을 공격해왔다. 그러자 박서는 끓는 쇳물을 성 위에서 포차로 내쏟아 적이 쌓아놓은 풀과 나무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몽골군은 누차(, 공성용 수레)와 큰 목상()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겉을 싼 뒤, 그 속에 군사를 감추고 아래로 접근하여 굴을 뚫어 공격하게 했다. 박서는 성벽에 구멍을 파서, 쇳물을 부어서 누차를 불태웠다. 또한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땅굴 입구에 던져넣어 굴을 파던 몽골병을 불태워 죽였다. 그러자 몽골군은 공격 대상을 남문으로 전환해 거대한 포차() 15문으로 남문을 포격했다. 고려군도 남문 성벽에 언덕을 쌓아 성벽을 보수하고, 포차로 돌을 날려 적을 공격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다음날 몽골군은 섶에다 기름을 적시어 놓고 불을 질러 화공을 시도했다. 고려군은 물을 뿌려 대응했으나, 도리어 불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러자 진흙을 개어 던져 불길을 잡았다. 화공을 진압한 후, 고려군은 성문을 열고 출격해 몽골군을 급습했다.
이날 저녁 몽골군은 또다시 수레에 풀더미를 싣고, 여기에 불을 질러 성문을 불태우고자 했다. 그러나 박서는 몽골군의 화공에 대비해 문루 위에 미리 물을 저장해놓고 있었다. 고려군은 저장해놓은 물로 적의 화공을 제압했다. 몽골군은 9월 3일부터 10월 초순까지 30여 일간 온갖 계략을 써서 귀주성을 공격했으나, 박서의 임기응변으로 번번이 공격이 저지당하자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몽골군의 2차 공격을 막아내다

하지만 몽골군은 고려 서북변의 요지인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않고는 주력 부대의 남진에 제약이 있으므로, 다시금 귀주성 공격을 시도했다. 10월 20일, 몽골군은 귀주성을 다시 포위하고 수십 대의 운제와 발석차를 동원해 성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고려군은 사력을 다해 몽골군을 격퇴하고, 무너진 성벽을 즉시 수리했다.
다음 날 몽골군은 서문 쪽을 집중 포격하고, 성안으로 다시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북문의 방어를 맡고 있던 박서는 급히 서문으로 달려가 진두지휘를 하여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울러 적의 운제와 석포, 궁시, 창검 등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그의 활약으로 11월 초순까지 20여 일간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몽골도 감탄한 귀주성의 항쟁

11월 22일부터 12월 17일까지 몽골군은 포차를 앞세워 세 번째로 공세를 가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고려군의 강한 반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귀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자 몽골 장군 살리타는 고려인을 보내 다시금 항복을 권유했다. 특히 당시 몽골과의 정전협정을 주관하던 회안공() 왕정()의 글을 보냈다. 하지만 박서는 왕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살리타는 12월 하순부터 다음해 1월초까지 몽골군을 일시에 동원해 다섯 차례 귀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운제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하면, 고려군은 대우포()로 맞받아 공격해 모조리 분쇄해버리니 사다리가 접근할 길이 없었다. 대우포는 커다란 날이 달려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신무기였다. 이처럼 박서는 몽골군을 끝까지 막아냈다.
귀주를 포위하던 몽골군 장수 가운데 나이가 70에 가까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귀주성을 돌아보고서 이렇게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뒷날 박서는 그의 말대로 문하평장사(, 정2품 재상직)에 임명되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

박서는 귀주성을 방어하면서 부하들을 믿고 맡겼고, 위급할 경우 자신이 직접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를 도운 장군 가운데 정주 분도장군(, 정4품) 김경손(, ?~1251)이 특히 용감했다. 9월 3일 전투 첫날 몽골군의 무서움을 알고 있던 고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피하려고 하자,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성 밖으로 나가 몽골군을 급습하여 적을 혼란시켰다. 그러자 성내의 고려군도 달려나가 적을 퇴각시킬 수 있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자, 박서는 김경손과 결사대를 맞이해 절을 하며 그들의 공을 치하했다. 김경손은 적의 발석차에서 날아온 바윗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갈 정도로 적의 공세가 심해졌을 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을 굳게 지킨 장군이었다. 그는 청렴하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박서 곁에 김경손이 있었기에, 귀주성이 튼튼히 지켜질 수 있었다.
 

왕명에 의한 항복

박서가 귀주를 잘 지켜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려 땅에서 몽골군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몽골의 강대함을 절감한 고려 정부는 항쟁을 포기하고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1231년 12월 몽골과 고려의 화친 협상이 시작되면서, 살리타는 박서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박서는 굴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자 몽골군은 귀주성이 항복하지 않음을 들어 고려와의 화의를 거절했다.
다급해진 것은 고려였다. 고려 정부는 감찰어사 민희() 등을 시켜 4, 5차례에 걸쳐 거듭 박서에게 귀주성 밖을 나와 항복할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박서는 왕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왕명임이 확인되자, 결국 박서는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비록 항복했지만, 박서는 몽골 원정군의 1/3이 넘는 1만여 명을 무려 4개월이나 귀주성에 붙잡아둠으로써, 몽골군의 작전 전반에 차질을 빚게 했다. 이로 인해 몽골군이 서둘러 화의를 하고 철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몽골이 죽이려고 했던 박서

몽골은 고려의 완전한 항복을 받지 않고, 화의() 형태로 서둘러 전쟁을 마무리했다. 화의의 조건은 물론 고려가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고려의 최고 권력자 최이()는 개경으로 돌아온 박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 대한 경의 충절은 비할 데가 없으나 몽고 원수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잘 생각해 처신하라.”
그것은 몽골에서 끝까지 항전한 박서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때문에 1232년 3월, 박서는 서북면병마사에서 해임되어 고향인 죽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상을 받지 못했다. 김경손이 개경으로 돌아와 종3품 대장군으로 승진한 것과는 달리, 몽골의 압력 때문에 박서는 벼슬마저 내놓고 조용히 물러나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별세와 평가

낙향을 한 박서가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단지 1236년 9월, 몽골 침입 때 죽산성 사람들이 몽골군을 물리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전투는 귀주성 전투의 재판이었다. 귀주성 전투에 참여한 방호별감 송문주()가 적의 포격, 화공 작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죽주는 박서의 고향인 만큼, 이때 낙향해 살던 박서가 전투에서 활약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시점엔가 다시 등용되어 문하평장사에 오르지만,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그는 조용히 잊혀졌다.
하지만 그의 충절과 전공은 후대인에게 길이 기억되었다. 1298년 충선왕은 박서의 내외손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충신의 업적을 기억했다. 또 1703년 조선에서는 귀주성 남쪽에 박서와 김경손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과 사적비를 세웠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1712〜1791)은 박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외로운 성, 약한 군사로 천하의 사납고 강성한 오랑캐를 맞아 적을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진실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도다.”
안정복의 평가처럼 박서는 막강한 몽골군을 수성전()에서 물리친 장군으로, 우리 역사에서 길이 기억할 만한 명장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승한, [고려 무인 이야기 3 – 최씨 왕조 하], 푸른역사, 2003년
유재성, [대몽항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년
김용선 편, <박인석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년
홍완표, <고려시대 죽산 박씨 가문 연구>, [역사와 담론] 33집, 2002년.
[네이버 지식백과] 박서 [朴犀] - 몽골군의 침입에 맞선 비운의 명장 (인물한국사)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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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17-04-24 20:29
   
개인적으로 한국사 명장중 top5안에 들어가시는 분
귀요미지훈 17-04-25 00:43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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